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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대원이 아빠 Sep 16. 2022

끝까지 쓰고 또 쓰겠다고

그날 조용히 결심했다.


언론사에서 일한 지 8년이 넘었다. 처음 지망했던 곳은 시사 주간지였는데 여러 차례 시도했지만 번번이 떨어졌다. 학력이나 연령 제한 없이 오로지 글발과 사회를 바라보는 시선을 면밀하게 검토해 뽑는 곳이었기에 아쉬웠지만 후회는 없었다. 글쓰기(더 정확히는 기사 쓰기)를 제대로 배워본 적 없는 공대생에겐 큰 산이었지만 덕분에 서서히 실력을 키울 수 있었다. 


시간이 조금 흘렀다. 별다른 기대 없이 지원한 지방 신문사에 합격해 기자생활을 시작했다. 많은 기사를 쓰진 못했지만 동경했던 신문사 풍경을 두 눈으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늘 마음이 두근거렸다. 내 이름 석자가 지면에 기재된 첫 기사를 읽었던 감동은 잊을 수 없다. 원고지 10 매도 채 되지 않는 분량이었지만 나는 그 기사를 쓰기 위해 취재하느라 며칠 밤을 새웠다. 대단한 기사는 아니었지만, 의미 있었다. 땀 냄새 풀풀 풍기는 기사를 쓰고 싶었고, 나는 썼다. 얼마 뒤 그 칼럼을 읽었다는 방송사 관계자를 연락과 함께 시사 라디오 디제이 제안을 받았다. 신났다. 매주 일요일 아침마다 내 목소리가 흘렀다. 물론 지독한 경상도 사투리를 숨기고자 다소 로봇 같기도 했지만 서서히 좋아졌다. 


그렇게 작은 신문사와 시사 라디오를 진행하며 3년을 보냈다. 이후, 경력직으로 훨씬 더 큰 신문사에 입사했다. 주간지였는데 부수가 상당했고, 나는 문화부 기자로 지원했다. 그때가 스물아홉이었다. 지방대를 나왔고 특별한 이력이 없었지만, 나는 또 덜컥 합격했다. 그렇게 주간지 신문사 기자 생활을 시작했지만 얼마 가지 않아 생각지도 못한 보직을 부여받게 됐다. 몇 달간 마음을 잡을 수 없어 힘들었다. 가족과 친구들에게 서울 생활이지만 멋지게 성장해서 내려올게,라고 말했는데 업무뿐만 아니라 근무지도 전혀 생각지도 못한 전라도 광주로 발령나버렸다. 


그 무렵쯤, 브런치를 시작했다. 취재는커녕 글쓰기조차 편하게 할 수 없는 나날이 이어지던 중에 발견한 플랫폼이었다. "그래, 이곳에서 필명을 짓고 또 다른 정체성으로 계속 글을 써 보자." 며칠을 고심해 필명을 짓고 작가 신청을 했다. 두 번의 탈락 고배가 있었지만, 다행히 세 번째 만에 합격했다. 그때 썼던 글은 지금 다시 읽어도 부끄러울 정도로 넋두리가 대부분이었다. 글 쓰는 시간이나 일정도 딱히 없이, 답답할 때마다 끄적이는 정도의 수준이었다. 그러니 독자가 제대로 모일 리가 있을까. 그래도 안 쓰는 것보단 낫지 않나,라고 스스로 다독였다. 


그렇게 몇 해가 흘렀고 이왕 쓰는 글, 꾸준하게 진심을 담아 딱 한 달만 써보기로 했다. 지난날 실패담과 만난 사람과 장면, 문장을 썼다. 어느 날은 조회수가 1천 회를 넘겼고, 또 어떤 날에는 "나도 같은 마음이었는데, 작가님 덕분에 위로받았어요."라는 댓글도 받았다. 그때, 깨달았다. 나의 글쓰기는 아직 끝난 게 아니구나. 아니, 더 정확하게는 이제 시작이구나. 진짜 내 이야기를 써보자고 결심했다. 오후 6시에 퇴근하면 동네 카페에 들러 밤새도록 썼다. 그렇게 쓴 글 중에 가장 고민 없이 '발행'버튼을 누른 글이 다음날 그야말로 폭발적인 반응을 일었다. 시계 종소리에 눈을 뜬 것이 아니라 브런치 알람에 놀라 깬 아침이었다. 낯선 이들이 계속 댓글과 구독을 눌렀고 조회수는 10분 단위로 1천 회씩을 넘겼다. 그렇게 하루에만 8만 명이 내 글을 읽었고, 좋아요는 800개가 넘었다. 댓글도 100개 넘어 대댓글을 남기기도 어려운 상황에 놓였다. 


내가 쓴 글보다 
낯선 이들이 남겨 놓은 댓글에
울고, 웃었다.

아, 나만 마음이 허했던 것이 아니었구나.
어쩌면 내 실패담이 누군가에게 위로가 될 수 있구나.

기자라는 직업을 벗어나
평생 글 쓰는 사람으로 살아가야 되겠다고,
끝까지 쓰고 또 쓰겠다고
그날 조용히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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