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속 4km ①] 내 생의 로그아웃까지 남은 30분

벼랑 끝 진창에서 나를 건져 올린 경이로운 생의 복선

by 희원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업으로 삼은 나에게, 평일 오전은 일주일에 두 번 있는 미팅을 제외하곤 꽤 여유롭고 느긋한 시간이다. 그런데 그날, 무심코 확인한 문자 한 통이 그 고요를 와장창 깰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삼성카드 결제 금액 498,000원'.


순간 이게 뭐지, 싶어 머릿속을 바쁘게 굴려보았다. 승인 시간대를 보니 내가 아이를 가르치느라 한창 바빴을 오후가 아닌가. '내가 그 시간에 카드를 썼을 리 없는데.' 잘못된 결제가 확실하다는 생각과 함께 마음 한구석에선 의구심이 일었다.


결국 사실을 확인하려 전화를 걸었다. 그것이 내 삶을 통째로 집어삼킬 혹독한 시련의 시작이 될 줄은, 꿈에도 모른 채 말이다.


상대방은 차분했다. 카드사 직원이라는 그녀는 '00동'에서 옷값으로 결제된 것이 맞는다는 것이었다. 그럴 리가 없다며 번복하는 나에게 검찰청 번호를 안내해 주었다. 이어지는 수사과 검사와의 통화. 귀에 바짝 대고 있던 핸드폰에서 확확 열감이 올라왔다.


하지만 단순할 줄 알았던 예상과 달리 통화는 몇 차례나 뱅뱅 돌았고, 신경은 날카로워질 대로 날카로워졌다. 지친 나머지, "신속히 처리해 주겠다"라는 말만 믿고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개인정보를 건넸다.


"보내드리는 링크를 누르세요. 바로 확인해 드릴게요."


아뿔싸! 그 링크를 누르는 순간, 나는 내 눈을 의심해야 했다. 낯선 화살표 하나가 화면 위아래를 마치 제 폰인 양 차근차근, 아주 침착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내 휴대폰인데도 나와는 무관한 듯, 제 할 일을 묵묵히 수행하는 그 기괴한 광경.


'지금 내가 무슨 짓을 한 걸까.'

'이제 나는 망했구나.'


참담한 생각과 함께 즉시 전화를 종료했지만, 이미 심장은 걷잡을 수 없이 방망이질을 해대고 있었다.




낯선 화살표가 내 영혼을 해킹하던 공포


덜덜 떨리는 손으로 오 분 만에 당도해 준 콜택시에 몸을 던졌다. 경찰서로 가 달라는 내 목소리는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다. 횡설수설 상황을 설명하는 내 말을 듣고 있던 기사님이 획 고개를 젖혀 나를 보며 단호하게 입을 뗐다.


"아이고, 손님! 지금 경찰서가 문제가 아니에요. 지금 당장 삼성전자 서비스센터로 가야 해요! 제 딸이 거기 다녀서 잘 아는데, 지금 손님 폰에서 정보를 다 내려받는 중일 거라고요. 서둘러야 해요!"


그 말이 채 떨어지기도 전에 택시는 빗줄기를 가르며 전속력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차창 밖 풍경은 흐물흐물 형체를 잃고 뒤로 밀려났다. 하지만 머릿속에선 이미 파멸의 시나리오가 상영되고 있었다. '정말로 보이스피싱을 당한 거야.'


단순히 돈이 모두 털려서 거리에 나 앉는 수준의 공포가 아니었다. 나를 세상에서 가장 예쁜 꽃으로 여기며 곁을 지켜주는 남편. 서슬 퍼런 칼날 같은 원칙을 지탱하며 의연하게 살아온 그에게, 나의 이 어처구니없는 실수는 결코 용납될 수 없는 결격 사유처럼 느껴졌다. 빗물 맺힌 차창을 보며 나는 이미 그와의 이별을 예감했다. 남편의 실망 섞인 눈빛을 견뎌낼 자신이 없어, 내가 먼저 "헤어지자"라고 내뱉을 것이었기에 보이스피싱은 돈을 떠나, 내 삶의 전부인 가정마저 파괴하려는 악령이었다.




빗줄기를 가르며 달린 생의 골든타임


"뭐해요? 빨리 뛰어가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을 거예요."


기사님의 외침이 아득하게 번졌다. 빗속을 뚫고 센터 로비를 가로질러 미친 듯이 뛰어 올라갔다. 내 번호표를 본 직원이 상황을 눈치채고 손짓했다. 그는 내 폰을 낚아채듯 가져가 유심칩을 뽑아냈다. 단 몇 초. 칩이 빠지는 순간, 그는 책상 위로 폰을 내동댕이치듯 내려놓으며 깊은숨을 몰아쉬었다.


"1초만 늦었어도 다 털릴 뻔했네요. 딱 30분이면 끝나는 작업인데. 골든타임 끝자락에서 간신히 멈췄습니다."


툭, 팽팽하게 당겨졌던 정신줄이 끊어졌다. 보이스피싱. 글쎄, 절대 나는 당하지 않을 거라고 장담했던가? 아니, 장담했었다. 그토록 자만했던 오만이 얼마나 위험천만한 행동이었는지 절실히 깨달은 순간이었다.


그날 이후 한시도 잊지 못했노라고, 지금에서야 이 자리를 빌려 성함조차 묻지 못한 택시 기사님과 삼성 센터 직원분께 뒤늦은 진심을 전한다.


"아저씨, 다짜고짜 경찰서부터 가자고 횡설수설하던 저를 다독이려 ‘따님이 삼성에 다닌다’는 말을 건네셨죠. 아마 평소 따님과 이런 일에 대해 자주 대화를 나누셨던 모양이에요. 제가 당황할까 봐 사뭇 차분하게 상황을 설명하시면서도, 빗길을 전속력으로 내달리던 아저씨의 뒷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택시비는 안중에도 없이 오직 속전속결만이 해결책임을 아셨기에, 벼랑 끝 그 심란했던 진창 속에서 저를 무사히 건져 올릴 수 있었습니다. 그날 아저씨를 만난 건, 제 생애 가장 경이로운 생의 복선이었습니다.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그리고 제 다급함을 제 일처럼 여겨주신 센터 직원분. 당신들이 보여준 뜨거운 오지랖이 무너져 가던 한 사람의 세상을 구했습니다."




무너지는 세상을 건져 올린 '뜨거운 오지랖'


이제는 모르는 번호에는 '무심함'이라는 방패가 필요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믿는다. 타인의 위급함을 내 일처럼 여기는 그 뜨거운 선의야말로, 이미 그 자체로 기적의 씨앗임을 말이다.


돌이켜보면, 무너질 뻔한 나를 끝내 붙잡아준 것은 타인의 오지랖뿐만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극한의 공포 속에서도 끝내 정신을 놓지 않으려 애썼던 힘. 어쩌면 나는 그때부터 이미, 나도 모르는 사이에 훗날 나를 지탱해 줄 '영혼의 근육'을 조금씩 저축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 찰나의 30분이 내게 남긴 것은 공포가 아니라, 로그아웃되지 않도록 내면을 더 단련해야 한다는 생의 엄중한 경고였음을 이제야 깨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