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한 편 글 서너 줄 쓰기도 버거운 보통 사람들에게 크게 위안이 되는
도서 『내 인생의 글쓰기』는 2008년 출간된 '나남 산문선 71'이다.
김용택, 김원우, 도종환, 서정오, 성석제, 신달자, 안도현, 안정효, 우애령 9인 작가의 글이 담겼다.
유명 작가들도 '한 편의 글을 쓰기 위해서는 숱한 고행과 쉼 없는 노력을 감수해야 한다'(김원우 작가의 글 중에서)니, 시 한 편 글 서너 줄 쓰기도 버겁기만 한 보통 사람들에게 크게 위안이 되는 글이다.
이 책의 인세는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에서 소외계층의 독서활동 지원에 사용한다고 밝힌 바 있다.
김용택 시인은 섬진강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이다. 태어난 곳에서 성장하고 아이들과 함께 동고동락하며 책을 벗하고, 글을 풀어내는 시인의 모습이 인자하다. 자연친화적이며 서정적인 감성을 그대로 드러낸 김용택 시인의 글들은 소박한 시인의 모습과 딱 하나로 일치된다.
이런 삶의 모습은 독자들에게 위안이 되고, 편안함을 준다.
..... 나는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곳에서 지금도 산다. 그러기를 원했다. 어느 날 나를 찾아온 책들이 지금처럼 내가 살기를 원했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곳에서 평생을 아이들과 함께 하기를 원했다. 그런 삶도, 그런 인생도 아름다울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책이 그렇게 나를 가르쳤다.
사는 게 별것이 아니라는 것을 일찍 알았다. 삶은 허망한 것이고 바람 같은 것이라는 것을 나는 일찍 알았다. 별것이 아닌 삶을 살기 위해 사람들은 사람이기를 버린다는 것을 나는 알았다. 나는 그 어는 것에게도 머리 숙이기를 거부했다. 내가 머리를 숙이는 곳은 어린아이들이 노는 땅이었다. 저 무구한 어린이들의 모습이 내 앞에서 꽃이었다. 나는 그 꽃밭에서 오래오래 산 것이니, 그렇게 되기를 원했더니, 마침내 내 삶은 그렇게 된 것이다.
책을 보기 시작하면서 내 인생은 시작되었고, 나는 책을 따라다니며 글을 썼다. 그 길고도 긴 인생의 길이 책 속에 있었던 것이다. 내 책이 다른 책들 속에 섞여 있을 때 나는 신기하다. 내가 처음 글을 써보려고 했던 기억을 나는 지금도 또렷이 기억한다. 책을 읽다가 방바닥에 등을 대고 누워(많은 책을 보면서) 나는 이렇게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 저 책을 쓴 것이 사람들이지. 그렇다면 나도....' 그리고 나는 글을 써보기 시작했던 것이다. (29쪽~30쪽)
김원우 작가는 젊은 날부터 지녀온 책 읽기 버릇이 있다고.
첫 번째 특징: 난독(亂讀)이란 말 그대로 소설, 문학평론, 전기, 역사, 시, 기행문, 수필 등의 장르를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읽는 버릇.
한 번 손에 잡은 책은 끝까지 독파하므로 숙독하는 버릇이 길들여졌다.
두 번째 특징: 읽히는 '문장'을 찾아서, 구체적 사실을 분명하게 전달하는 활달한 '문맥'을 쫓아가며 세독(細讀)과 탐독(耽讀) 하는 버릇.
장르를 가리지 않지만 그 내용의 실적만은 확실하게 손에 쥐어지는 이런 '문체' 우선주의 취향은 자연스럽게도 어느 특정 필자에 대한 편독(偏讀)을 재촉하는 경향으로 나갔다.... 볼 것만 제대로 보기에도 벅차다는 능력의 한계를 시인하게 되고, 자연스레 작가 식의 글맛을 맛볼 수 없는 책은 읽다가 내물리게 됐다.
세 번째 특징: 작가는 표지 장정도 그렇지만 본문의 활자나 레이아웃이 단정하고 빈틈없는 것을 선호한다.
편집 체제(레이아웃)가 일관된 질서를 그 면적이 무미 일관하게 일정한 백지 위에다 모양 좋게 펼쳐놓은 것이다. 모든 질서가 그렇듯이 그것은 겸손해야 하고 중뿔나게 두드러지면 곤한 하다고.... 작가는 지면의 낭비, 곧 하얀 여백의 다발은 금물이라고.
그러나 나같이 늙어가는 독자는 지면의 낭비가 있는 책이 시원시원하고 좋더라.
시력이 급격하게 나빠지다 보니 여백 없는 편집이나, 활자체가 10P로 작거나 줄 간격 1.5 이하일 경우, 책 읽기가 즐겁지 않고 고달프다.
이 책 출간 연도인 2008년엔 나도 김원우 작가처럼 활자가 촘촘하게 가득 들어찬 책을 좋아했다.
아마도 김 작가도 2022년 현재는 세 번째 특징이 바뀌지 않았을까 혼자 생각해 보며 웃는다.
잘 썼든 못 썼든 한 편의 글을 완성하고 나면 그 득의 감은 과장이 심한 상투적 표현을 끌어다 쓰면, 천하를 얻은 성취감과 견줄 만하다. 어떤 종류의 글이든 세상의 이치에 대한 부분적 진실에 다가가기 위해 나름의 시간, 설명, 해석으로 풀어 보였으므로 자가당착의 빈말만도 아니다. 게다가 극소수의 독자들로부터나마 공감을 얻을 수 있다는 자부심은 꽤나 알찬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글쓰기는 오복 중 하나라는 유호덕과(攸好德) 견줄만한 일상의 낙일 수 있다. 그런 낙을 만끽하려면 숱한 고행과 쉼 없는 노력을 감수해야 한다. (53쪽)
도종환 시인은 행동하는 작가다. 한국작가협회 사무총장(2007년)도 아무나 하는 자리는 아니니, 이때부터 이미 국회의원, 문화부 장관을 수행할 자질과 징조가 보였을지도.
'접시꽃 당신'의 시인이 처음엔 정치인의 옷이 맞기나 할까, 좀 의아하기도 했다. 나중엔 국회의원 직도 거뜬히 해내는 것이 멋져 보이기도 했고.
개인적인 시간 개인적 공간에서 무언가를 쓰고 도 쓰는 행위는 다른 사람들에게 끝없이 자기를 알리고 싶어 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자기표현이야말로 자기 존재의 확인인 것이다. 부재의 시간 속에서 소통을 향한 신호를 끝없이 날리는 일이다.
시는 정신적 허기를 채우기 위한 해위이며, '결핍된 언어에 대한 보상'이다. 대화다운 대화에 대한 욕구, 억압으로부터 해방되고자 하는 욕망이다. (65쪽)
지금까지 우리는 내가 보고 싶은 것만을 보아왔다. 듣고 싶은 것만 듣고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해 왔다. 눈으로 대상을 바라보지만 관찰의 수준으로 바라본다. "물론 전에도 나무를 보고 새도 보았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본 것이지 하나하나 개체로서의 긴밀한 만남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글을 쓰게 되면 우리의 눈은 대상 속에 들어 있는 의미를 간파해 내는 눈을 갖게 된다. 내가 관심을 갖게 되는 대상 하나하나와 긴밀한 만남을 가지기 시작한다. 대상과 나와 새로운 관계가 형성되는 것이다.
그리고 나 자신도 그런 눈으로 바라보게 된다. 나 자신을 다시 발견하게 된다. 내 삶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되고 새로운 인생을 만나게 된다. 그래서 우리가 글을 쓰는 것이다. (70~71쪽)
항상 좋은 옛이야기를 들려주는 인자한 스승의 모습이며,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분으로 기억된다.
서정오 작가는 모든 옛이야기 속에는 담긴 한결같이 착한 일을 하면 복 받고, 나쁜 일을 하면 벌 받는다는 내용이 아주 단순하고 유치한 것처럼 보이지만, 이 세상에 그보다 더 소중한 교훈은 없다고 했다.
..... 이제는 누구나 작가가 되어야 한다. 입 가진 사람이 누구나 말을 하듯이, 글 배운 사람은 누구나 글을 쓸 수 있어야 한다. '문단'이라는 걸 만들어 둘레에 높은 울타리를 쳐 두고, 무슨 신춘문예니 추천제도니 하는 시험을 봐서 심사위원 눈에 들어야 그 안에 들어갈 자격을 주던 시대는 이제 옛날로 흘려보내야 한다. 말하는 데 자격증이 필요 없는 것처럼 글 쓰는 데 면허증 따위는 필요치 않다. 아니, 도대체 내가 글 쓰겠다는 데 누가 허락을 하고 말고 한단 말인가?
그래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은 다 작가다. 하루 일을 마치고 지친 몸으로 집에 돌아와 오늘 일터에서 느낀 즐거움이나 억울함을 내 나름대로 글로 써 본다면, 이미 당신은 훌륭한 작가다. 비 오는 일요일 아침 문득 생각난 옛 동무의 이름 석자 가만히 불러보고 마음에 묻어 둔 말 네댓 줄 끼적여 본다면, 이미 당신은 훌륭한 시인이다. 어릴 적 할머니한테서 들은 옛이야기 한 자리 떠올려 여섯 살배기 아이에게 나긋나긋 들려준다면, 이미 당신은 훌륭한 이야기꾼이다. 달리 무엇이 더 필요하단 말인가? (91~92쪽)
성석제 작가는 두 자리 숫자의 나이가 되었을 때, 우연히 읽은 <흙손 엄마>라는 시에서 문학이 가지고 있는 본질, 보편의 감동에 닿았다. 그 어린아이는 난생처음 경험하는 감정, 감각에 당황한다...... 어린 소년은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감동과 느낌을 재현하기 위해 애를 쓰게 된다. 문자와 단어와 문장을 만들고 연결하고 풀었다 재조합하는 일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 첫 번째 감동은 작가의 문학적 체험의 원형이 되고 언어예술에서 받는 감동의 원형이 기도 했다.
시로 등단 한 작가는 10여 년 만에 소설을 쓰게 된 계기로 <지방색 - 모래밭> 책 속에 등장하는 이야기를 꼽는다.
작가는 이 이야기를 20살 대학시절 교양 국어 강사로부터 처음 듣는다. 한동안 이 책을 직접 찾으려 했으나 찾지 못한다. 어쩜 그 책은 원래 없었는지도 모르겠지만!
작가가 그 '이야기'를 글로 옮긴 일부를 소개한다.
그 지방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출구가 없고 입구도 없다...... 사람들은 변두리에서 태어나 차츰 안쪽으로 밀려들어가 최후에는 가장 안쪽에서 죽게 된다고 한다. 그들은 바깥세상을 알지 못하다. 바깥세상에 대해 말하는 것도 금기다.
남처럼 변두리에서 태어난 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남들처럼 죽기 위해 안쪽으로 밀려들어갔다가 어느 날 뭔가 좀 이상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왜 산과 하늘밖에 없는가. 살거나 죽는 일밖에 없는가. 그것밖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가. 왜 출구가 없는가. 왜 아무도 오지 않는가. 입구가 없기 때문에 당연한 일이라고 한다. 왜 당연한가.
그는 안으로 들어가는 대신 밖으로 가기로 했다. 그래서 산으로 갔다. 산에는 '입산금지' 팻말이 붙어 있었다. 그는 팻말을 거꾸로 돌려 '지금 산으로 들어감'이라는 뜻으로 바꿔놓았다.
산에 올라서자 바다가 보였다. 바다다! 그는 바다라는 말을 몰랐지만 그게 바다인 줄은 알았다. 그는 잠깐 자신이 태어난 곳을 돌아보았다. 커다란 주름이 잡히듯이 천천히 안으로 밀려가는 사람들이 보였다. 그는 다시는 그곳을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돌아가지도 않겠다고 결심했다.
그는 공처럼 산을 굴러 내려갔다...... 파도가 밀려와 그의 구두를 적셨다. 그의 양말을 적시고 발목을 덮쳤다. 문득, 그의 몸은 가벼워졌고 또한 무거워졌다. 발목 아래가 모래로 변했던 것이다. 파도는 그의 발목과 함께 밀려갔다.
다시 파도가 밀려왔다. 그의 무릎 아래가 모래로 변했다. 그는 끓어앉은 것처럼 보였으나 이미 무릎이 없었다...... 배를 적시자 그의 가슴이 모래로 변했다.
마지막 숨을 쉬기 전, 그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이 모래밭은 자신처럼 산에서 뛰어 내려온 사람들이 만든 것이라고.
그는 모래로 변해 모래밭에 섞였다. 파도는 밀려오고 밀려갔다.
..... 강의가 끝나고 나서 나는 혼자 강의 실에 앉아 있었다. 그 이야기를 생각하고 생각했다. 곱씹으면서 슬픔, 허무, 인간의 존재 조건 같은 다양한 맛이 느껴졌다. 고양된 시적 언어로 직격 당했을 때 받는 감동이 아니라 이야기로 잘 감싸인 진실, 어쩌면 보편의 진리가 거기에 있는 듯 느껴졌다. 도그마가 아닌 조용한 이야기, 그리고 진리가 어쩔 수 없이 설파된 뒤의 침묵이 아름다웠다. (107~109쪽)
신달자 작가는 딸 부잣집 일곱 번째(현실적으로 다섯 번째) 딸로 태어났다. 이어 태어난 귀한 남동생에게 '엄마의 사랑과 관심'을 모두 양보하며 성장한다.
1950대 작가의 아버지는 가진 것이 많은 '행복한 남자'였다. 재산도 많았지만 주위에 항상 여자들도 많았다. 중학교를 마치고 부산으로 전학 갈 무렵, 소녀 신달자는 그런 아버지의 일기장 5권을 우연히 마주하게 된다.
..... 아버지의 일기장엔 내가 아는, 이 세상에 가장 행복한 남자는 보이지 않았다. 놀랍게도 아버지는 페이지마다 외롭다고 그리고 슬프다고 그리고 날개가 있으면 멀리 날아가고 싶다고 적고 있었다.
그 많은 것을 가지고도 행복하지 않고 외롭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때 나는 얼굴은 보이나 보이지 않는 인간의 얼굴을 찾는 마음의 내면 읽기를 찾아 떠나고 싶었다. 그것이 문학 그리고 시를 찾아 나설 이유가 되었던 것이다. (118쪽)
작가는 이른 결혼으로 3명 딸을 출산한다. 그리고 작가 나이 35살쯤 혈압으로 쓰러진 남편과 친정어머니의 이승 작별 등으로 문학을 잠시 떠나 있게 된다.
1977년 5월 나는 내 인생의 가장 중심에 내 힘으로는 결코 복원할 수 없는 운명의 폭격을 맞게 된다. 내 나이 35살쯤이었다.
사람들은 말했다. 너의 불행이 너의 시를 존재케 한다고. 어찌 시가 문학이 인간의 불행을 담보로 주어지는 것이던가. 아니다 아니다. 나는 하느님께 대들었다. 적어도 신은 인간에게 그런 보상의 거래를 해서는 안 된다고 나는 외치며 비명을 질렀던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냉혹하고 엄격했다. 나는 그때 알았다. 지상에서 내가 짚어야 할 지팡이는 내 의지밖에 없다는 것을, 그리고 나는 나와 약속했다. 결코 초라하거나 비겁하지 마라. 일어서라 일어서라 결코 포기하지 마라. 내 인생에 고개를 국이기엔 내 삶에 절망하기엔 나는 그때 눈 시리도록 젊었다. (131~132쪽)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너에게 묻는다>
안도현 작가는 국어교사에서 전업작가로, 대학교수로 활동한 행동하는 지식인으로 기억된다.
그는 2013년 초에 현 정부에 대한 반대로 절필을 선언했다. 대선이 끝난 직후 검찰 소환을 받는다. 본인 생각에 따르면 아무리 생각해도 야당을 지지한 것에 대한 보복이라고 밖에 생각할 수 없어 이런 환경에서는 시를 쓸 수 없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삶과 문학, 두 가지를 앞에 놓고 나는 뭔가 전환의 기회로 삼지 않으면 안 된다고 나 자신에게 주문했다. 그 주문의 목록은 대충 이런 것들이다. 시에서 지나친 과장과 엄살을 걷어낼 것, 너무 길게 큰소리로 떠들지 않을 것, 팔목에 힘을 빼고 발자국 소리를 줄일 것, 세상을 망원경으로만 보지 말고 때로 현미경도 사용할 것, 시를 목적과 의도에 의해 끌고 가지 말고 시가 가자는 대로 그냥 따라갈 것, 시에다 언제나 힘주어 마침표를 찍으려고 욕심을 부리지 말 것, 시가 연과 행이 있는 양식이라는 점을 분명히 제고할 것..... (153쪽)
한 편의 시를 위해서 무엇보다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나는 안다. 그래서인지 시를 쓰는 동안에는 시간이 잘 간가. 마치 애인하고 함께 보내는 시간처럼. 남의 시를 읽을 때도 시인이 장인적 시간을 얼마나 투여했는지 유심히 살펴본다. 시간을 녹여서 쓴 흔적이 없는 시, 시간의 숙성을 견디지 못한 시, 말 하나에 목숨을 걸지 않은 시를 나는 신뢰하지 않는 편이다. (154쪽)
문학은 여전히 외로운 자들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외로움을 모르는 문학이 있다면, 외로움의 거름을 먹지 않고 큰 문학이 있다면 그 뿌리를 의심해 봐야 한다. 글을 쓰는 일은 외롭기 때문에 아름다운 일인지도 모른다. (155쪽)
중학교 때부터 만화를 그린 다재다능한 작가다. 가끔 신문의 시사만평을 그릴만큼 그림 실력은 수준급이며, 만화뿐만 아니라 유화도 그린다. 그의 책에 실린 간결한 삽화들은 재치 있고 유머러스하다고들 한다.
<안정효의 글쓰기 만보>는 구체적이고 실용적인 글쓰기 방법을 알려준다. 글쓰기를 위한 가장 실용적인 연장 통이지만, 비결이나 요령 같은 것을 기대하는 사람에게는 크게 도움이 안 된다. 작가는 시행착오와 실수조차 긍정적으로 바라본다. 경험은 작가의 가장 큰 재산이기 때문이다.
..... 현실과 타인의 방해를 받지 않는 혼자만의 시간은 미래를 내다보는 시야를 한없이 넓혀주었고, 그런 자유의 시간에는 환상과 백일몽에 잠겨도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나는 깨달았다.
나는 생명을 잉태했다.
잉태한 그 생명을 빛의 세상으로 내보내야 할 사람, 창조의 폭발을 일으킬 사람, 아직 형성되지 못하 나의 존재를 일으켜야 할 사람은 바로 나 자신이라는 사실을 나는 깨달았다.
그러기 위해서는 해야 할 일이 많았고, 많은 시간을 쏟아 부아여 한다는 숙제 또한 눈앞에 선히 보였다. 그러나 해야 할 일은 곧 하고 싶은 일이 되었다. 그것은 더 이상 숙제가 아니라, 욕망의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176~177쪽)
서울 여자인 우애령 작가는 농촌마을 배경 작품 <당진 김 씨>를 통해 인간 근원적인 심성을 돌아보고 이 시대의 부박한 삶을 비춰볼 수 있는 흥미롭고도 진지한 소설들을 펴낸 바 있다. 작가는 가정문제 전문 상담가이기도 하다.
가족치료나 가족 상담을 할 때 본인에게 조부모부터 가계를 그려보게 하는 경우가 있다. 결혼 전에 선택의 여지없이 받아들였던 가족에게 일어났던 일들이 개인의 성향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고 보기 때문이다.
오랜 세월 동안 가장 가까운 인연으로 맺어진 가족과 친지, 그리고 스쳐 지나가는 여러 사람들을 만나면서 고통과 슬픔이 평안과 기쁨보다 더 많이 삶에 그 흔적을 드러내고 있는 것을 보았다. 무엇이 사람을 이렇게 강한 힘으로 휘두르는가..... 우리는 운명에 맞서 싸울 아무 힘도 지니지 못한 무력한 존재인가..... 의문은 지금도 내 곁에 머무르고 있다. 아마 나는 그 의문에 대답해 보려고 절망에서 우리를 일으켜 세우는 사랑과 삶의 의미에 관한 글을 쓰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문학과 심리학을 접목시켜 독특한 분야를 개척했다는 평을 받은 카운슬링 에세이집들을 출간한 것은 소설책을 내는 것처럼 보람 있는 일이었다.
글 쓰는 일이 제일 즐겁다는 이야기를 듣고 어느 작가가 글 쓰는 일이 고통스럽지 않고 즐거우면 아직 갈 길이 멀었다고 말한 적도 있다. 그런지도 모르겠지만 사람들이 내 글을 읽고 위로받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 나야말로 큰 위로를 받는 느낌이 든다. (202~203쪽)
내가 쓴 글이 책이 되어 사람들의 머리맡에 놓여있을 생각을 하면
마음속에 등불이 켜진 듯한 따뜻한 느낌이 든다......
첫 장편 소설 <트루먼스 버그로 가는 길>의 서문의 한 구절이다. 지금도 그 마음은 변함이 없다. 글을 쓰게 된 것은 내 삶에서 가장 행복한 느낌을 준 일들 중 하나이다. (203쪽)
아홉 명 작가의 이야기를 한 권 책에서 만날 수 있어 좋았다.
<내 인생의 글쓰기>는 그대로 '나의 인생의 글쓰기' 꾹 눌러 담아 둔다.
지칠 때마다 다시 들여다보면 위안이 될 것이다.
유명 작가들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글 쓰는 작업이 녹록하지 않은 시간의 연속이었다니, 그동안 나를 거쳐 간 시간이 하나도 아깝지 않다.
지금 9명의 작가들과 만나는 이 시간이 더없이 소중하다.
앞으로 내게 찾아올 긴 시간조차 설렘으로 맞아들일 수 있을 것만 같다.
겸손한 마음의 자세로 읽고 쓰다 보면 내게도 삶의 메모로 기록으로 차곡차곡 쌓이고 남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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