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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온책읽기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프리드리히 니체

니체의 핵심 철학인 '초인', '힘의 의지', '영원회귀'의 대서사시

by Someday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프리드리히 니체(nietzsche, Friedrich Wilhelm 1844~1900)의 사상과 철학이 담긴 4부로 구성된 대서사시다.

니체는 '신은 죽었다'라며, 2천 년 동안 기독교와 함께 한 유럽 문명이 쇠하는 허무주의(nihilism) 도래를 예견했다.


'자라투스트라'에 의하면, 허무주의 원천은 인간의 몸과 정신을 병들게 할 수 있는 '양심의 가책'과 닿아 있다.

죄의 감정은 근원적이며 오래된 개인관계에서 비롯한다. 종족의 권위가 거대해질수록 사회에 빚을 지고 있다는 부채의식도 커진다.

갚을 수 없는 채무자의 부채 의식은 공포스럽도록 깊어진다. 그리고 그 공포가 마침내 신으로 변형된다.


인간은 도저히 빚을 감을 수 없게 되고, 채무를 갚지 못할 경우 형벌을 받음으로써 죄의식에서 벗어나는 경험을 한다.

신이라는 절대자와 국가라는 거대한 힘의 폭력에 의해 인간의 자유 본능은 내면화되고 잠재적인 것으로 억눌려 왔다. 계속 뒤로 물러서기만 하다 보니, 이것이 양심의 가책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양심의 가책은 하늘로부터 내려진 것도 아니며, 타고난 원죄라는 것도 그 실체가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이는 그가 위대가 존재이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이 스스로 빈약한 존재라 믿었기 때문이다.

니체는 니힐리즘 극복을 위해 고대 페르시아 예언자인 '자라투스트라'를 불러와 니체 자신의 철학과 사상을 입혀 우리에게 보냈다.


책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1883~1885)에는 니체의 핵심 철학인 '초인', '힘의 의지', '영원회귀' 등이 시적인 언어로 명쾌하게 쓰여있다. 19세기 후반에 쓰인 작품이라는 것을 인지하며 읽어나가는 것이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우리나라에서는 2004년 1월 '세계문학전집 94'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믿음사에서 펴냈다.

옮긴이는 동의대 교수를 역임한 장희창 번역가다.


자라투스트라는 누구인가?

그는 BC 1000년에 태어난 '자라투스트라' 또는 '조로 아스 트레스'로 불리는 예언자로 이란 북부지방에서 태어났다.

그는 그의 이름을 딴 '조로아스터교'를 창시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자라투스트라의 생애와 출생 연대 및 활동 지역에 관해서 엇갈리는 기록들이 전해진다.


조로아스터교(Zoroastrianism)는 기원전 6세기 페르시아의 예언자 조로아스터가 창시했다.

예언자 조로아스터의 가르침을 기반으로, 유일신 아후라 마즈다를 믿는 고대 페르시아 종교다.

아베스타(Avesta)를 경전으로 하며, 선신(善神) 아후라 마즈다와 악신(惡神) 아리만과의 대립 투쟁의 이원론으로 일체를 설명한다. 근검(勤儉) 역행(力行)의 노력에 의하여 악신을 극복하고 선신이 승리한다는 믿음을 근간으로 한다.

선신의 상징인 해ㆍ불ㆍ별 따위를 숭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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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자라투스트라의 가르침


자라투스트라(니체의 분신)는 방랑자이자 여행자다.

니체도 본인도 떠다니는 사람이며, 모든 이들에게도 떠나라고 전하는 철학자다.

인간은 목적이 아닌 다리(橋)다.

방랑자는 목표도 없으니 돌아갈 곳도 안주할 곳도 없다.


인간은 짐승과 초인 사이에 놓인 밧줄이다. 심연 위에 걸쳐진 밧줄이다.

저쪽으로 건너가는 것도 위험하고 줄 가운데 있는 것도 위험하며 뒤돌아보는 것도 벌벌 떨고 있는 것도 멈춰 서는 것도 위험하다.

인간의 위대함은 그가 다리(橋) 일뿐 목적이 아니라는 데 있다.

인간이 사랑스러울 수 있는 것은 그가 건너가는 존재이며 몰락하는 존재라는 데 있다. (19쪽)


제1부 서문 22쪽과 24쪽에 보면 말종(末種) 인간(der letzte Mensch)이 등장한다.

자라투스트라는 시장(오늘날 가치가 규정되는 장소) 바닥에서 왜소해지고 균일화된 인간들을 말종(末種) 인간이라 부른다.

19세기 시장 바닥이나 오늘날 시장과 마트, 백화점에 몰려있는 현대인들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는 대부분 똑같은 것을 원하고 똑같이 사고하고 똑같이 행동한다.

삶의 유일한 목표는 자기 보존일 뿐이다.

건강한 사람은 가치의 기준을 스스로 정하지만, 대중은 남과 같지 않은 자신을 용납하지 못하며 산다.

이에 따라 사물과 행동에 가치를 부여한다.

그러므로 건강한 자의 최고 형상이라 할 수 있는 초인은 말종 인간과 대각점((對脚點)에 있는 존재다.

자라투스트라의 여정은 말종 인간과 초인 사이에 있는 수많은 인간을 만나고 체험하면서 초인을 향해 나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한 개의 길로 돌진하는 것이 아니다.

천 개의 오솔길과 천 개의 숨겨진 삶의 지점들을 지나간다.

'차원 높은 인간'들과의 만남은 그중 하나다.

아직 발견되지 않은 채로 무궁무진하게 남아 있는 곳이며 진정한 인간의 대지다.


세 가지 변화에 대하여

정신의 세 가지 변화: 정신이 낙타가 되고, 낙타는 사자가 되며, 사자는 마침내 아이가 되는가를... (35~43쪽)


정신의 강인함은 무거운 짐을 요구한다.

인내심 많은 정신은 '무엇이 무겁다 말인가?'를 물으며, 낙타처럼 무릎을 꿇고 짐을 가득 싣고자 한다.

낙타는 원재 지고 있는 짐자체 만으로도 묵직한 삶의 무게를 느끼게 한다.


자신의 오만에 고통을 주기 위해 자신을 낮추는 것

지혜를 조롱하기 위해 지신의 어리석음을 드러나게 하는 것

승리를 구가하는 일로부터 물러나는 것

유혹하는 자를 유혹하기 위해 높은 산으로 올라가는 것

깨달음의 도토리와 풀로 연명하면서 진리를 위해 영혼의 굶주림을 참고 견디는 것

병석에 누워 문병 오는 자들을 돌려보내고 그대가 들려주고자 하는 바를 결코 듣지 못하는 귀머거리와 우정을 맺는 것

진리의 연못이라면 더럽더라도 그 속으로 뛰어들어 차가운 개구리도 뜨거운 두꺼비도 물리치지 않는 것

우리를 경멸하는 자들을 사랑하고, 유령이 우리를 위협하더라도 그 유령에게 손을 내미는 것


인내심 많은 정신은 이 모든 무겁기 그지없는 짐을 짊어지고 자신만의 사막을 건넌다. 등위에 가득 짐을 실은 채 사막을 달리는 낙타처럼.


고독하기 그지없는 사막에서 두 번째 변화가 일어난다. 여기서 정신은 사자가 된다.

정신은 자유를 쟁취하려 하고 사막의 주인이 되고자 한다.

새로운 가치 창조. 이것은 사자도 아직 이루지 못하는 일이다.

그러나 새로운 창조를 위한 자유의 획득. 이것은 사자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다.

새로운 가치를 위한 권리를 쟁취하는 것

이것은 인내심 많고 외경심을 가진 정신에게 주어질 수 있는 가장 놀라운 소득이다.


세 번째 변화로 강탈하는 사자는 왜 아이가 되어야만 하는가?

아이는 순진무구함 자체이며 망각이고, 새로운 출발, 놀이, 스스로 도는 수레바퀴, 최초의 움직이며, 성스러운 긍정이 아닌가!

그렇다. 창조라는 유희를 위해서는, 성스러운 긍정이 필요하다.

이제 정신은 자신의 의지를 원하고 세계를 상실한 자는 이제 자신의 세계를 되찾는다.

세 단계 변화는 어떻게 하여 정신이 낙타가 되었고, 낙타는 사자가 되었으며, 사자는 아이가 되었는가를 말했다. (38쪽)


정신은 겸손하나 인내할 수 있어야 하며, 사자처럼 자유롭고 강해야 한다.

그러나 독선에 빠지지 않도록 항상 깨어있어야 한다.

그 강함 속에는 아이 같은 순수함이 담겨 있어야 한다.

오로지 놀이에 몰두하는 아이처럼 창조적인 자세와 긍정적인 태도가 우리에게도 필요하다.


덕을 가르치는 강의에 대하여

명성 높았던 강단의 현자들에게 지혜란 꿈 없는 잠이었다. 그들은 삶의 보다 나은 의미를 알 수가 없었다.(43쪽)


덕이란 도덕적ㆍ윤리적 이상을 실현해 나가는 인격적 능력이다.

지혜는 사물의 이치를 빨리 깨닫고 사물을 정확하게 처리하는 정신적 능력이다.

강의를 하는 현자가 마흔 가지 생각을 갖고 있다 한들 자라투스트라에게는 바보로 비친다.

지혜는 단잠을 이루기 위해 깨어 있으라는 것이니, 삶이 무의미하다.


자유로운 죽음에 대하여

명성을 얻고자 하는 자라면 누구라도 알맞은 때 명예와 작별하고 알맞은 때 떠나는 어려운 재주를 부려야 한다.

가장 맛이 좋을 때라도 자기 자신을 계속 먹히도록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된다.

오랫동안 사랑받으려고 한 자들은 이 점을 잘 알고 있다.

가을의 마지막 날까지 기다리도록 운명 지어진 신 사과들도 있다.

이 사과들은 익음과 동시에 노랗게 되고 쪼글쪼글해진다.

어떤 자는 마음이 먼저 늙고 어떤 자는 정신이 먼저 늙는다.

그리고 또 어떤 자는 젊은 시절에 백발이 된다.

그러나 늦게야 청년이 되는 자의 젊음은 오래간가.

많은 자들은 삶에 실패하며, 독충이 이런 자들의 마음을 갉어먹는다.

이런 자들은 그만큼 더 죽음에 성공하도록 유의해야 한다. (126쪽)

..... 그대들의 정신과 덕은 대지를 둘러싸고 있는 저녁놀처럼 활활 타올라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그대들의 죽음은 실패 이리라.(128쪽)


이 세상 생명을 가진 모든 자들의 삶은 자기만의 시간대로 오고 간다.

자유로운 죽음 앞에서 다른 생명의 길고 짧거나, 가늘고 굵은 숱한 시간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베푸는 덕에 대하여

만물의 가치는 그대들에 의해 새로이 정립되어야 한다. 그대들은 투쟁하는 자, 창조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몸은 앎을 통하여 자신을 정화시킨다.

몸은 앎과 더불어 시도함으로써 자신을 고양시킨다.

인지하는 자에게 있어서 모든 충동은 성스러워진다. 고양된 자들에게 영혼은 즐거운 것이다. (134쪽)


위대한 정오란 인간이 짐승과 초인 사이에 놓인 길의 한가운데에 서 있을 때이며, 저녁을 향해 나아가는 그의 길을 최고의 희망으로서 축복하는 때이다. 왜냐하면 그 길은 새로운 아침을 향해 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때 몰락해 가는 자는 자신이 저 너머로 건너가는 자임을 알고 스스로를 축복할 것이며, 이때 그의 인식의 태양은 그에게 정오의 태양이리라.

"모든 신은 죽었다. 이제 우리는 초인이 등장하기를 바란다." 이것이 언젠가 찾아올 위대한 정오에 우리의 마지막 의지가 되기를!(136쪽)


'신의 죽음'은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출발점이다.

여행자 니체와 자라투스트라의 여정은 인간 대지에 대한 탐색이다.

주체적 인간이 운명과 가치를 창조해가는 과정이다.

닫힌 공간을 열고 들어서는 과정도 포함된다.

그곳에 균열을 내는 용기가 필요하다.

예전의 풍습을 그대로 따르며 살아왔지만, 이제 스스로를 해방시키려는 자유정신을 발견해야 한다.

이는 자유인으로서 실천하는 힘이며, 관점을 설정하는 역할까지 다 해야 한다.


도덕은 특정 지워진 시대의 정해진 조건의 결과일 뿐이다.

그 가치관을 뒤바꿀 수 있다면 가치 자체 체계를 전환시킬 수 있다.

자신이 속한 세상과 그 안의 사상(事象)에 대해 지녔던 평가의 근본적 태도가 변환되는 것이다.

목적을 신성화하기 위해 오랜 세월 가해졌던 폭력과 쌓여온 위선이 드러나게 된다.

신이 존재하는 것은 그가 위대한 존재이기 때문이 아니다.

인간이 스스로 빈약한 존재로 자처했기 때문이다. 아니 스스로 빈약하다고 오해했을지도 모른다.

1부 '자라투스트라의 등장'은 이런 배경에 연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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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초인과 예언자의 고요한 시간


행복의 섬에서

신은 모든 곧은 것을 구부러지게 하고, 서 있는 모든 것을 비틀거리게 하는 사상이다. 무슨 말이냐고? 시간은 사라져 버려야 하고, 모든 지나가는 것은 허상이어야 한단 말인가?

이러한 것을 생각하면 온몸은 소용돌이치고 어지럽고, 위장은 구역질을 일으킨다. 이러한 일을 억측하는 것에다가 나는 현기증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하나인 것, 완전무결한 것, 움직이지 않은 것, 충만한 것, 변하지 않는 것에 대한 이 모든 가르침. 이것을 나는 사악하고 인간 적대적인 것이라고 부른다.

불멸한 것이란 오직 비유일 뿐이다! 시인들은 너무도 많은 거짓말을 한다.

최선의 비유라면 마땅히 시간의 흐름과 생성에 대해 말해야 한다. 이러한 비유는 모든 무상(無常) 함을 찬양하고 옹호해야 한다.

창조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고통으로부터의 위대한 구원이며 삶을 가볍게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창조하는 자가 되기 위해서는 고통과 많은 변신이 필요하다. (148쪽)

그렇다 그대 창조하는 자들이여, 그대들의 삶에는 수많은 고통스러운 죽음이 있어야 한다! 그리하여 그대들은 그 모든 무상함의 대변자가 되고 옹호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창조하는 자 스스로가 새로 태어날 아이가 되려면, 그 자신이 산부(産婦)가 되어 그 산고를 겪으려 해야 한다.

..... 나의 모든 감정은 괴로워하면서 감옥에 갇혀 있다. 그러나 나의 의욕은 언제나 나를 해방시키는 자로서 그리고 나에게 기쁨을 주는 자로서 나를 찾아온다.

의욕은 해방을 가져온다. 이것이 의지와 자유에 대한 진정한 가르침이며, 자라투스트라는 이것을 그대들에게 가르친다. (149쪽)


19세기를 살다 간 니체의 사상을 특정 종교와 연관 지어 비판할 필요는 없다.

그가 추구하는 '초인'의 모습은 오늘 우리가 닮고자 하는 '전인(全人)'과 크게 다르지 않다.

불멸은 존재하지도 않으니, 우리는 살아생전 각자 자신이 하는 일(작업)에서 더 창조적인 인간으로 살고 싶어 한다.

알에서 깨어나지 않는 새는 없다.

독일의 문호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의 중요 구절이 떠오른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오기 위해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새롭게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누구든 하나의 세계를 파괴해야 한다. 새는 신을 향해 날아간다..... '

글쓰기도 창조적인 인간이 누릴 수 있는 기쁨에 속한다.

돈을 벌기 위한 직업 활동은 물론이고,

여가와 취미생활 속에서 누리는 크고 작은 창조적인 활동은 인간에게 적극적 자세와 욕망을 불러일으킨다.

의욕이 넘쳐나도 창조적인 작업에는 산고가 따르게 마련이지만,

그러나 창조하는 자는 항상 뜨거운 의욕이 앞장서서 스스로를 밀어주고 격려해 준다.

각자의 의지와 자유에 의한 깨어있는 활동은 우리를 창조적인 인간으로 성장시킨다.


도덕군자들에 대하여

인간의 고귀함을 보지 못하는 많은 자들은 인간의 저열함을 아주 가까이서 보고는 그것이 덕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어떤 자들은 고상하게 고양되기를 바라면서 그것을 덕이라고 부른다. 또 어떤 자들은 스스로 뒤집히기를 바라면서 역시 그것을 덕이라고 부른다.

이런 식으로 거의 모든 사람들은 자신이 덕에 관여하고 있다고 믿는다. 누구라도 최소한 자신이 선과 악에 정통해 있다고 주장한다.

자라투스트라는 사람들에게 그런 바보와 거짓말쟁이에게서 배운 진부한 말에 염증을 내도록 하기 위해 온 것이다.

대가, 복수, 형벌, 정의로운 보복과 같은 말이나, "착한 행동이란 비 이기적인 행동이다."라고 말하는 데 싫증 내도록 하기 위해서다. (165쪽)


아이들이 바닷가에서 놀고 있었다. 그때 파도가 밀려와서 그들로부터 장난감을 빼앗아 바다 깊은 곳으로 가져갔다. 그래서 아이들이 울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같은 파도가 아이들에게 새 장난감을 가져다주고 알록달록한 새로운 조개들을 쏟아놓으리라!

그러면 아이들은 위안을 얻으리라.

그리고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벗들이여, 그대들도 위안을 얻게 되니라. 그리고 알록달록한 새로운 조개들도!(166쪽)


위 글에서 아이들은 창조적인 인간을 뜻한다.

니체는 '미래의 인간이 초인이다.'라고 했지만, 이는 시간과 공간을 지칭하는 말은 아닌 듯하다.

우리는 아직도 '초인'에 다가가고자 할 뿐 '초인'이 아닌 평범한 사람들이다.

초인으로의 변신은 자기 밖에서 가치의 기준을 두고 복종해온 인간이 노예 생활을 청산하고 자기 가치의 주인 됨을 뜻한다.

초인은 현재를 넘어서 나아가며 끊임없이 한계와 제약을 돌파해 가는 육체적 이성의 주체이다.

인간의 미래에 대한 니체의 희망과 우리의 가능성은 긍정적이다.

머지않아 '차원 높은 인간'으로 서로 만나게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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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

방랑자의 귀향과 세 가지 악


방랑자

..... 나는 방랑자이며 산을 오르는 자다. 나는 평지를 사랑하지 않으며, 오랫동안 한자리에 있지를 못한다.

앞으로 내가 어떠한 운명을 맞이하게 되든, 그 무엇을 체험하게 되든, 거기에는 늘 방랑과 산을 오르는 일이 있을 것이다. 인간이란 결국 자기 자신만을 체험하는 존재가 아닌가.

내가 우연한 일들이 닥칠 수 있는 그런 때는 지나갔다. 이미 나 자신의 것이 아닌 그 어떤 일이 새삼 내게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오직 되돌아옴이 있을 뿐. 나의 고유한 자기, 그리고 이 자기를 떠나 오랫동안 낯선 곳을 떠돌며 온갖 사물과 우연들 사이에 흩어져 있었던 것, 그것은 마침내 집으로 돌아오고 만다.

..... 나의 더없이 험난한 길을 이제 올라야 한다. 아, 나의 더없이 고독한 방랑이 시작된 것이다.

나와 같은 인간은 이러한 시간을 피하지 못한다. 자신에게 이렇게 말하는 시간을, "이제 비로소 그대는 위대함으로 통하는 그대의 길을 간다! 정상과 심연, 그것은 이제 하나로 연결되었다.

그는 위대함으로 통하는 그대의 길을 간다. 지금까지 그대의 최후의 위험이라고 불리었던 것이 이제 그대의 최후의 피난처가 되었다.

그대는 위대함으로 통하는 그대의 길을 간다. 그대의 위에 이미 어떠한 길도 없다는 것, 그것이 이제 그대의 최상의 용기가 되어야 한다. (270쪽)


끊임없이 자신을 아끼기만 하는 자는 결국 그렇게 너무 아끼다 병들고 만다. 그러니 준엄하게 되는 것을 칭송하라! 버터와 꿀이 넘쳐흐르는 땅을 나는 칭송하지 않는다!

많은 것을 보려면 자기 자신을 놓아버릴 줄 알아야 한다. 산을 오르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혹독함이 필요하다.

인식하는 자로서 눈에 보이는 것에 지나치게 집착한다면, 어떻게 만사에 있어서 겉으로 드러난 근거 이상의 것을 볼 수 있을 터인가!

..... 나 자신과 나의 별들마저도 저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것, 나는 그것을 나의 정상이라 부른다. 그것은 나의 마지막 정상으로 내게 남겨진 것이다. (271쪽)


나그네가 가는 길은 정한 곳 없다.

방랑자는 이리저리 떠돌아다닌다.

우리네 인생길이 나그네(방랑자) 여정과 크게 다르지 않다.

목표가 있다 한들 말종(末種) 인간이 겨냥하는 곳은 하루하루 부대끼며 살아가는 일상과 이어질 뿐이다.

결국 남보다 많은 부를 소유하고 남보다 더 높이 오르려는 권세를 향한 것이 아닐는지?

'전인'이나 '초인'을 향한 목표나 정상과는 다른 방향이다.

초인이 되려는 자는 안락함을 칭송하거나 비교를 거부한다.

스스로의 정상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간다.


왜소하게 만드는 덕에 대하여

지나치게 유순하고, 지나치게 관대한 것, 이것이 그대들의 토양이다. 하지만 나무는 성장하려면 단단한 바위를 뚫고 굳게 뿌리내려야 한다. 그대들이 어떤 일을 아무리 태만하게 하더라도, 그 일은 온 인류의 미래라는 직물에 짜여 들어간다. 그대들의 무위(無爲)마저도 거미줄이며, 미래로부터 피를 빨아먹고 사는 거미다.

그리고 그대들은 받을 때도 마치 훔치듯이 한다. 그대 왜소한 도덕군자들이여. 그러나 악당들마저도 명예심이 있어 이렇게 말하지 않는가. "강탈할 수 없을 때에만 훔쳐라."

"저절로 주어진다." 이것 역시 순종의 가르침이다. 그러나 그대들은 저절로 빼앗길 것이며, 더욱더 많은 것을 빼앗기리라!

그대들은 그 모든 어정쩡한 의욕을 버리고 태만이든 행동이든 과감하게 결정해야 하리라!

아, 그대들은 나의 다음과 같은 말을 알아들어야 한다. "그대들이 의욕 하는 바를 언제든 행하라. 하지만 그보다 먼저 의욕 할 수 있는 자가 돼라.!

"그대들의 이웃을 언제나 자신처럼 사랑하라. 하지만 우선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자가 되도록 하라!

"커다란 사랑으로 사랑하며, 커다란 경멸로 사랑하라!" 신을 부정하는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한다. (304쪽)


세 가지 악에 대하여

육욕, 지배욕, 이기심. 이 세 가지는 지금껏 가장 저주받아 왔고 가장 나쁘게 왜곡되어 왔다. 하지만 나는 이 세 가지를 인간적으로 제대로 보려고 한다. (334쪽)

..... 육욕은 더 높은 행복과 최고의 희망을 예고하는 크나큰 상징적 행복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결혼과 결혼 이상의 것이 언약되어 있으니 말이다. (335쪽)

..... 지배욕. 그 시선 앞에서 인간은 기어 다니고 머리를 조아리고 알아서 기며 뱀과 돼지보다 더 비굴해진다. 마침내 참다못한 그 인간이 경멸로 소리칠 때까지.

... 그러나 그것은 또한 매혹적인 몸짓으로 순결한 자, 고독한 자에게로, 그리고 저 위쪽 자족하고 있는 고귀한 자에게로 올라간다. 대지의 하늘에 보랏빛 행복을 매혹적으로 그려 보이는 사랑처럼 달아오르면서. (336쪽)

지배욕. 그러나 고귀한 것이 아래로 내려와 권력을 갈망한다면, 그 누가 그것을 탐욕이라 부르리! 참으로 그러한 갈망과 하강에는 그 어떤 병도 탐욕도 없다.

자라투스트라는 강력한 영혼으로부터 샘솟는 건전하고 건강한 이기심을 복된 것으로 찬양했다. (337쪽)


육욕, 지배 욕과 이기심이 인간이 올바른 길을 걷도록 하는 올바른 심성이라 할 수는 없다.

그러나 내면에 이 세 가지 악을 전혀 없는 품지 않고 사는 사람은 없다.

함께 지니고 평생을 살아가야 할 동지라면, 악이라고 몰아세우기보단 인간적인 눈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인간의 속마음에서 떼어낼 수 없는 욕심의 마음이라면 악으로 몰아세우기보다는 그 존재를 자연스레 인정하는 편이 낫다.

이도 '영원회귀'로 들여다보면, 우리 마음속에 딱 멈춰있는 대단한 악마가 아니다.

오고 가기도 하며, 미약하고 어설프기도 하며, 독재자나 폭군의 형상으로 악하게 표출되기도 한다.

'초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용기와 창조성을 지니며 바르게 살아가면 된다.

긍정의 힘과 의지로 스스로 만든 선과 악을 엄격한 잣대로 조정해야 한다.

본능적으로 어려운 과제일 수 있지만, 살아있는 한 창조와 파괴를 거듭하는 이런 내적 동력은 영원히 지속된다.

초인으로 살 것인가, 말종 인간으로 살다 갈 것인가의 선택은 각자 스스로 할 수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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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부 최종부

초인이 들고나는 인간의 왕국이 보인다.


제물로 바친 꿀

자라투스트라의 영혼 위로 세월이 흘렀다. 그는 개의치 않았지만, 머리는 하얗게 세어 있었다.

4부에서 그는 많은 생명체들과 만난다.

짐승들은 자라투스트라에게 높은 산에 오르라고 권한다. 이런 날은 공기가 맑아 어느 때보다도 세상을 더 잘 볼 수 있다.

그가 제물에 대해, 제물로 바칠 꿀에 대해 한 말은 술책이었다. 참으로 효과 있는 어리석은 행동이다.

꿀을 갈망했지만, 진정으로 내가 원했던 것은 투덜거리는 곰과 기이하고 까다롭고 사악한 새들도 입맛을 다시는 좋은 미끼와 달콤한 즙과 점액이었을 뿐이다.

사냥꾼과 어부가 필요로 하는 최상의 미끼를 바랐을 뿐이다. 이 세계가 지승이 사는 어두운 숲과 같고 모든 거친 사냥꾼들의 유원지 같은 것이라면, 내겐 오히려 그 세계가 바닥을 알 수 없는 풍요로운 바다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415쪽)

인간의 세계, 인간의 바다가 그렇다. 이 바다에 이제 황금 낚싯대를 던지면서 내가 말한다. "열려라, 그대 인간의 심연이여!"

나의 행복을 사방팔방으로 저 멀리, 일출부터 정오를 거쳐 일몰까지 던진다. 인간이라는 수많은 물고기들이 나의 행복을 잡아당기고 거기 매달려 버둥거리는 것을 배우지나 않을까 해서다. (416쪽)


자라투스트라의 천년 왕국은 신의 왕국이 아닌 인간의 왕국이다.

그의 왕국은 영원한 토대 위에, 굳건한 원시암 위에, 가장 높고 가장 강건한 원시 산맥 위에 서 있다.

매일 새롭게 동터 오는 인간의 미래가 그를 둘러싸고 있다.

자라투스트라의 머리 위로 펼쳐진 장밋빛 고요가 구름 한 점 없는 침묵을 보낸다.


정오에

..... "행복해지려면 아주 적은 것만으로도 족하다. 행복해지려면!" 나는 일찍이 이렇게 말하면서 내가 현명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불경한 생각이었다. 그것을 나는 이제 배웠다. 영리한 바보들이 말은 더 잘하는 법이다.

가장 적은 것, 가장 조용한 것, 가장 가벼운 것, 도마뱀의 바스락 거림, 한 번의 숨결, 한 번의 스침, 순간의 눈길, 바로 이처럼 작은 것이 최고의 행복을 만든다. 조용!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들어보라! 시간이 날아가 버렸는가? 내가 추락하고 있는 건 아닌가? 내가 이미 떨어져 버린 것은 아닌가. 들어보라! 영원의 샘 속으로 떨어지지 않았는가? (486쪽)

.... 언제쯤인가. 영원의 샘이여! 그대 명랑하면서도 소름 끼치는 정오의 심연이여! 언제쯤 그대는 내 영혼을 그대 속으로 다시 마시려 하는가?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그리고 마치 낯선 취기에서 깨어나기라도 하듯이 나무 옆 그의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보라. 태양은 아직도 그의 머리 바로 위에 있었다. 그는 그렇게 오래 자지는 않았으리라고 누군가가 추측하더라도 맞는 말일 것이다. (487쪽)


징조

"그대 위대한 별 이여."라고 그는 예전처럼 말했다. "그대 그윽한 행복의 눈이여, 그대가 빛을 비추어준다 하더라도 그것을 받아들일 존재가 없다면, 그대의 행복은 무엇이겠는가! (568쪽)

징조가 왔다. 그의 눈앞에는 옛 주인을 다시 찾은 듯한 사자가 갈기를 휘날리며 엎드려 있었다..... 자라투스트라는 "나의 아이들이 가까이 왔구나, 나의 아이들이" 그리고 그는 완전한 침묵에 들었다. 그의 마음은 녹아들었고,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 방울방울 그의 손에 떨어졌다.


..... 동굴 안에서 차원 높은 인간들이 잠에서 깨어나 동굴 입구에 도착하자 사자는 별안간 자라투스트라에게서 등을 돌리고 사납게 울부짖으며 동굴 쪽으로 달려들었다.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외치며 달아나 순식간에 사라졌다. (571쪽)


인간은 차원 높은 이나 보통 사람이나 대체로 어떤 작용에 대한 정 반대의 힘을 끌어들인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신의 죽음이 만들어 놓은 생성(生成)의 공간에서 반동적으로 뒷걸음친다.

중력의 힘이나 영(靈)에 끌려간다.

중력의 영이란 강제, 율법, 필요와 귀결, 목적과 의도, 선과 악 같은 것이다.

차원 높은 인간들도 자라투스트라가 자리를 비운 사이 다시 우상을 섬기게 되는 것을 뜻한다.

차원 높은 인간일지라도 자기 극복과 자기 보존 사이에서 갈등한다. 가치 파괴가 일어나면, 두려움을 극복하기란 쉽지 않다.

신의 죽음은 인간적 형태의 우상 숭배의 종식을 뜻한다.

자라투스트라가 신의 죽음을 전한 곳에서 초인을 가르치려 한 것도 이 때문이다.


결국 자라투스트라는 홀로였다..... 그는 자신 속으로 침잠했고, 다시 그 커다란 바위 위에 앉아 곰곰이 생각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동정이다! 차원 높은 인간들에 대한 동정이다!" 그는 이렇게 소리쳤고 그의 얼굴은 청동빛으로 변했다. "좋다! 그것도 이제 끝이다!" (572쪽)


나의 고통과 나의 동정. 그것이 어쨌단 말인가! 내가 행복을 얻으려 애쓰기라도 한단 말인가? 나는 나의 과업을 위해 분투하고 있지 않은가!

자! 사자가 왔다. 나의 아이들도 가까이 있다. 자라투스트라는 성숙했다. 나의 때가 왔다.

이것은 나의 아침이다. 나의 낮이 시작된다. 자, 솟아오르라, 솟아오르라, 그대 위대한 정오여!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그러고는 어두운 산 위에서 솟아오르는 아침 태양처럼 타오르며 힘차게 그의 동굴을 떠났다. (573쪽)


정신의 강인함은 사자가 되었으며, 사자는 마침내 창조적인 어린아이가 되었다.

니체는 인간 세상의 미래에 대해 긍정적이며, 생명 그 자체가 인간의 힘과 의지라고 믿는다.

'힘의 의지'와 '영원회귀 사상'은 니체가 '신의 죽음과 가치 상실에 직면한 근대 세계'에 직면한 문제를 처리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니체는 몸의 '기원'을 말하고, 그 몸의 '해방'을 알린다.

그는 정신세계에 안주하지 않고 스스로 방랑자가 되어 떠났다.

니체는 짜라 투스트라라는 예언자를 대동하고 독자들에게도 함께 떠날 것을 권한다.

'초인'으로 살고자 하는 독자들에게 믿음직한 동행자가 생긴 것만으로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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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를 만나고, 헤어지고, 거듭 만나고 다시 헤어지길 반복한다! - 니체와 독자가 함께 '영원회귀'를 이어가길

니체는 1844년 10월 15일 뤼첸 부근 작은 마을 뢰켄에서 목사인 카를 루트비히 니체와 이웃 마을 목사의 딸인 프란치스카 윌러 사이의 세 자녀 중 첫째로 태어났다.

1849년 아버지 뇌 연화증으로 사망, 1950년 가족과 함께 나움 부르크로 이사.

1858년 기숙학교인 '슐 포르타'에서 교육받고, 1862년 『운명과 역사』 작성. 이 글은 그의 사유에 관한 예견서 역할을 한다.

1865년 라이프치히로 학교를 옮김. 고서점에서 쇼펜하우어의 『의지의 표상으로서의 세게』를 발견하고 탐독.

1866년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에 관한 연구로 라이프치 대학에서 상을 받음. 드디어 문헌 학자로서의 니체의 명성이 알려지기 시작한다.

1867년 10월부터 1868년 10월까지 1년간 포병으로 복무. 승마와 대포 쏘는 법을 배움.

1868년 승마 중 떨어져 가슴에 심한 부상을 입고 모르핀 주사를 맞는다. 11월 동양학자인 브로크 하우스의 집에서 바그너와 만남.

1870년 『그리스 음악극』 관련 강연, 4월 정교수가 된다. 7월, 프로이센-프랑스 전투에 자원, 위생병으로 참가하지 마자 이질과 디프테리아에 걸려 10월 다시 바젤로 돌아옴.

1876년 『반시대적 고찰』 제4권 출간. 8월 바이로이트 축제의 마지막 리허설이 이루어지고 있을 때 니체는 그곳에 있었지만, 바그너에 대한 숭배 분위기를 견디지 못하고 축제 도중 바이로이트를 떠남.

1878년 바그너가 보낸 대본, <파르치 발>에 대해 니체는 악평을 함.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제1부를 읽은 바그너는 니체와 결별.

1879년 건강이 악화된 니체는 바젤 대학에 사직서를 제출. 이탈리아 제네바로 휴양을 떠남.

1880년 페터 가스터(니체의 절친)와 함께 베네치아에 머물면서 요양. 『아침놀』을 집필,

1881년 『아침놀』 출간. 7월 실스 마리아로 옮김. 이곳에서 산책 중 '영원회귀'에 대한 구상을 떠올림.

*실스 마리아(Sils-Maria)는 스위스 실스임엥가딘사일의 한 지역으로 영화 《클라우즈 오브 실스 마리아》의 무대이기도 하다.

실스 마리아는 니체에게 영원회귀(永遠回歸)의 영감을 준 산이기도 하다.

영원회귀는 영원한 반복이다. 겨울 봄여름 가을이 돌고 돌아 다시 꽃이 피고 꽃이 지는 그때 그 상황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니체가 말하는 회귀는 시지프스의 굴러 떨어질 바위를 또다시 언덕 위로 밀어 올리는 것처럼 괴롭고 고달픈 반복과는 다르다.

니체의 영원회귀는 변화를 말한다. 영원회귀는 영원한 변화, 영속성을 지닌 변환이다.

1882년 『즐거운 학문』 집필. 로마에서 살로메를 처음 만남. 이후 두 차례 청혼을 하지만 거절당한다. 니체는 이탈리아 각지를 전전한다.

*루 살로메(루 안드레아스 살로메, 1861년 2월~1937년 1월)는 독일의 작가이자 정신분석학 자이다.

많은 소설과 수필 등의 작품을 남겼으며 특히 니체, 릴케, 프로이트 등 당대 유럽 최고의 지성인들을 매혹시키며 이들과 사랑과 교감을 나누며 이들에게 창조적 영감을 주었던 여인으로 알려져 있다.

니체는 남프랑스 지중해 절벽에 위치한 에제 마을에서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영감을 얻어 집필을 시작한다.

1883년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제1부 출간. 제3부까지 집필.

1884년 제4부 완성.

1885년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제4부 출판사를 찾지 못해 자비로 출판. 실스 마리아에서 여름을 보내면서 『힘의 의지』 집필 구상.

1886년 『선악의 저편』 역시 8월에 자비로 출판.

1887년 건강이 악화된 상태에서 6월 살로메의 결혼 소식을 들으면서 우울증에 빠진다. 11월 『도덕의 계보』 출간.

1888년 『힘의 의지』 집필. 『반 그리스도』와 『바그너의 경우』 출간.

1889년 1월 초, 카를로 알베르트 광장(이탈리아 토리노)에서 채찍질당하는 말을 보호하려 말을 감싸 안다가 발작을 일으킨다. 죽마고우인 오보 베크가 니체를 바젤로 데리고 가서 정신 병원에 입원시킴.

1890년 5월 어머니가 니체를 나움 부르크로 데리고 가서 돌봄.

1894년 여동생이 니체 전집의 편찬을 담당할 니체 문서 보관소 설립.

1897년 어머니 사망. 여동생이 그를 바이마르에 있는 '빌라 실버블릭'으로 데려 감.

1900년 8월 25일 정오경 사망.



"그대 이름은 後世(후세)들에게 신성하게 불릴 것이다." - 친구인 '페터 가스트'의 니체 弔辭(조사)에서

http://news.imaeil.com/page/view/2009082507133725684



http://minumsa.minumsa.com/book/17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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