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굴까요~~
주말 오후 5시, 도서관은 문을 닫는다. 그전에 책을 빌리러 서둘렀다. 유아자료실 입구 옆에, 커다란 이동선반이 있다. 그곳엔 사람들이 보고 올려놓은 책이 가득 놓여 있었다. 안녕달의 <할머니의 여름휴가>가 눈에 띄었다. 신발을 벗고 이용해야 하는 유아자료실로 가는 대신, 선반에서 재밌어 보이는 책을 골라 담았다. 이미 한 번 누군가에게 선택되었던 책들. 나름 선별도서인 셈인가.
표지의 토끼 그림이 귀엽고, '사랑'이 들어간 제목에, 100만 부 돌파 표시가 된 책이 보였다. 처음 보는 그림책인데 이렇게 유명했다는 것에 호기심이 생겼다.
2018년 뉴욕 타임스&아마존 베스트셀러 1위 100만 부 돌파!
아무 사전지식 없이 넘기기 시작한 그림책은, 수컷토끼 말런분도가 또 다른 수컷토끼 웨슬리와 사랑에 빠진 내용이었다. 그리고 이들의 사랑과 결혼을 '나쁨'으로 규정해 버리고 반대하는 구린내 킁킁이에 함께 대항해 가는 친구들.
이 책에 대해,
뉴욕 타임스는 "성소수자 권리를 인정하지 않는 미국 부통령 마이크 펜스에게 신랄하고도 강력한 한 방을 날리는 그림책!"이라고 했다.
피플 매거진은 "무진장 웃기고 엄청나게 매력적이다!"라고 했다.
BBC는 "미국 부통령 가족의 그림책을 패러디해 단 하루 만에 아마존 베스트 1위에 올랐다!"라고 소개했다.
이 책에 대해,
"그림책을 읽는 우리도 차이가 차별이 되지 않는 세계를 생각하면서 마음을 활짝 열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라고 아동문학평론가이자 이 책을 옮긴 김지은 님은 말하고 있다. 무거운 주제를 진지하게 소개하는 느낌이다.
그리고 또 한 편으론,
이 책을 출판한 비룡소에서 독자리뷰어로 활동하는 어떤 분은, "작가에게 일부는 공감하지만 또 일부는 공감할 수는 없어서 아직은 이 책을 00에게 보여주진 않을 것 같아요."라고 했다.
브런치 파랑윤작가님은 "우리나라랑은 안 어울려서 다른 결말을 상상해 봤어요." 라며 여러 가능성의 삽화를 보여주고 있다.
이렇게 온도차가 다른 리뷰는, 물론 한국의 문화적 특성도 있지만, 그들은 알고 우리는 모르는 책 한 권이 있어서 이기도 하다. 바로
<Marlon Bundo's A Day in the Life of the Vice President > by Charlotte Pence. 미국 어린이들에게 부통령의 직업을 설명하는 교육적인 책으로 2018년에 출간되었다. 이런 배경지식이 있다면, 이 책을 패러디한 토끼 책이 '무진장 웃길' 수 있는 이유를 알 수 있다. 그렇지 않고, 이 책으로만 이해하려면, 도대체 어디가 그리도 우스운 것인지 공감하기 어려울 듯...
십여 년 넘게 영국에서 살았다. 런던의 초등학교에서 보낸 시간도 적지 않았다. 두서너 학교를 거치면서 동성애자 동료들을 여럿 만났다. 종교학교에서 레즈비언이라는 이유로 해고되었지만, 또 다른 초등학교에서는 교감으로 문제없이 일하는 경우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그런 문화적 배경 속에서 이 그림책은 많은 외국사이트 리뷰에서 보이는 것처럼 'adorable!' 하게 받아들여질 듯하다.
그럼에도, 이 책이 출판된 해에 태어난 아들에게 (지금) 읽어줄지는 솔직히 살짝 고민했었다. 이 그림책이 사랑스럽지 않아서도, 그 내용의 일부라도 공감하지 않아서는 아니었다. 서로 다름의 차이가 받아들여져야 한다는 내용인데... 마음 한 구석, '활짝' 열려 있지 않는 곳을 발견했다. 모순이다. 토론을 위한 책이었다면 선뜻 택했을 책인데 말이다. 이런 내용이 익숙지 않은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눠 볼 수 있는 친근하고 귀여운 책이었음에 틀림없었기 때문이다.
어젯밤, 남편과 아들 그리고 나는 이 책을 함께 읽었다. 한참 이야기를 듣던 아들이 사랑에 빠져 결혼하기로 했다는 페이지 그림을 보고 물었다.
"누가 남자야?"
말런이나 웨슬리는 (주로) 남자 이름으로 불린다. (어느 캐릭터에 웨슬리라는 여자 아이 이름이 있었던 적이 있어, '주로'를 첨부해야 할 듯하다) 그러나 이런 사실을 아직 모르는 어린 아들이 물을 수 있는 질문이었다.
"둘 다 수컷 토끼야. 말런 분도는 웨슬리가 좋대. 구린내 킁킁이 말처럼 다른 게 나쁜 걸까?"
아들은 고개를 저었다. 아마 악당으로 보이는 구린내 킁킁이가 쫓겨나고 행복하게 웨딩마치 올리는 그림을 보며, 귀여운 토끼 그림책 정도로 받아들인 듯 보였다. 담담한 반응의 아들을 보면서, 괜한 생각을 앞서하고 있지 않았나 우스워졌다.
한국은, 미국, 캐나다, 스웨덴, 남아프리카 공화국 등 다른 30여 개국 중 26위로 다른 국가들에 비해 성소수자의 비율이 낮다. 동성커플의 결혼과 육아가 합법화되어야 하는가의 질문에, 부정적 견해가 42%, 긍정적인 답변 35%로, 아직은 보수적인 성향이 우세하게 나왔다. 이런 분위기로 미루어, 성소수자의 비율이 실제보다 낮게 나온 것은 아닐까도 한 번 생각해 보았다.
사랑에 빠진 토끼를 보며
한국에서 살고 있는 일곱 살 아들에게,
'다름'을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용기'에 대해서도 함께 이야기하고 싶어졌다.
부당함을 유머러스하게 풀어낼 수 있는 센스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싶어졌다.
대통령이라도 패러디할 수 있고,
그런 해학이 환영받을 수 있는 사회 속에서
우리 아들도 자랄 수 있기를 바라본다.
품격 있는 저항.
백만 독자가 열광했던 진짜 이유가 아니었을까 싶다.
<Marlon Bundo's A Day in the Life of the Vice President > / <A Day in the Life of MARLON BUND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