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
'수필과 비평'에 실린 글입니다.
초고를 다듬어 글이 성장할 수 있도록 지도해 주신 선생님께 감사말씀 전합니다.
200자 원고지 12매 내외 분량 제약으로 다 담지 못했던 부분을, 브런치에 남겨봅니다.
분량 내에, 더할 것도 뺄 것도 없이 온전히 생각을 담아낼 수 있는 그날까지 써봅니다.
한 여자가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검은 옷에 검은 운동화를 신은 뒷모습. 가사였을까. 음색이었을까. 먹먹한 사연이 느껴졌다. 반주가 끝나고도 그녀는 정지 화면처럼 무대 위에 서 있었다. 고요함에 무게가 있다면, 꽤나 묵직했을 시간이었다.
사회자가 입을 열자, 하나 둘, 멈추었던 호흡을 토해내듯 심사단 평이 이어졌다. 이렇게 노래를 잘하는 데 왜 이제야 오디션에 참가했느냐는 질문에, 그녀는 자신의 사연을 말하다 결국 울컥하고 말았다.
그녀처럼 무대 위에서 노래할 수 있다면, 세상 부러울 것 하나 없어 보였는데. 하긴, 겉으로 완벽해 보이지만, 지나간 시절에 눈시울 붉힐 이가, 어디 그녀뿐일까. 무명 시절 아무도 불러주지 않던 서러움, 활동하면서 부딪히고 깨지던 마음들. 아이의 어린 시절 함께 해주지 못한 미안함, 자신이 성공하기 전 돌아가신 부모님에 대한 그리움. 조명이 꺼진 뒤, 커튼 뒤에서 감내해야 할 상처는 혼자만의 몫이었겠지. 오 년, 십 년. 그 고독을 견디며 버텼던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성공하면 괜찮아지려나. 어느 중견 영화배우는, 화가 나면 그저 멍하게 지낸다고 한다. 무슨 일로 그러느냐 하니, 그냥 살면서 생기는 일들이 있지 않겠느냐고 했다. 그의 자리는 꽃방석일 것만 같았는데. 그 삶에도 불덩이 같은 것이 끊임없이 솟아오른다니. '나만 왜 이런가'라는 한탄으로 올라오던 화가 피식 꺼졌다. 옆집에 살고 있다면 달려가 소주잔이라도 한 잔 기울이며 위로하고 싶었다.
문득, 영국에서 지낼 때 들었던 이야기가 떠오른다. 최고 요리사가 하루 세끼를 차려주고 최고의 디자이너가 만든 옷을 입고 전용기로 세계 각국을 누비는 왕자들. 그러나 어릴 적, 사고로 어머니를 잃은 그들은, 마흔이 넘은 지금도 '마음에 난 구멍'을 채우지 못해 아직 아파하고 있다고 한다. 어머니에 대한 사무침이 영겁의 세월로 덮어질까. 세 아이의 아버지가 된 지금도, 어머니가 생각날 때면 마음속 작은 소년이 된다.
왕자도 견뎌야 하는 아픔 하나 있는 것이 삶인가 보다.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은 묘한 위로가 된다. 그도 나도 한 인간으로 평등해진 느낌이랄까.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내야 하는 마음이 왕세손이라 해서 남들보다 더하거나 덜할 것인가. 아픔은 그저 아픔일 뿐이다. 험한 세상살이, 나만 아픈 건 아니라는 동질감. 누구나 깊은 상처 하나쯤 견디며 살아가야 하는 유사성에 위로를 주고받는다.
신이 인간에게 시간보다 공평한 것을 주었다면 그것은 아마 감정이 아닐까. 누구에게나 하루 24시간이 똑같이 주어졌다지만 그것이 정말 평등한 시간일까. 다른 이의 시간을 살 수 있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하루가 어떻게 같을 수 있을까.
그러나 감정은 시간과 다르다. 사거나 팔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누가 빼앗아 갈 수도 없는 나만의 것이다. 누구나의 가슴속에 존재하는 감정. 기쁨은 기쁨으로, 슬픔은 슬픔으로, 그 순간만큼은 누구와 비교할 수 없이 온전히 그 감정을 '겪는다'.
박완서 선생은 "아기가 온몸으로 기쁨을 표현하는 것을 보면 인간이 말하는 행복의 원형을 보는 듯하다"라고 했다. 올림픽에서 금메달 딴 선수나 조기 축구 경기에서 골을 넣은 아저씨도, 최고의 훈장을 받은 유명인이나 삐뚤빼뚤 손 글씨 편지를 받아 든 엄마도, 첫 월급 받은 청년이나 원하는 사탕을 손에 쥔 아이도 모두가 그 순간, 동일한 순도의 행복을 느낀다. 찰나의 반짝임일지언정, 크기를 재거나 우열을 가릴 수 없는 순수함이자 고유함이다.
모두의 가슴을 아리게 했던 노래의 주인공. 그녀는 고등학교 시절 교실에서 불렀던 노래 영상이 조회수 600만을 넘길 만큼 대단한 가창력의 소유자다. 하지만 노래와 상관없는 외모에 대한 악플을 견디지 못하고 노래를 그만두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 그녀는 병으로 쓰러진 아버지를 위해 용기를 냈다고 한다. 부르고 싶었던 노래를 부를 수 없던 세월, 그리고 딸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아버지의 마음까지. 그녀의 노래가 단순한 가창력을 넘어 더 절절할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악의적인 댓글은 여전히 남아 있다.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일이라 해서, 내 고통이 덜어지는 것은 아니다. 나만의 고유한 감정이기에 더 외롭고 더 괴로울 수 있다. 그러나, 그녀는 아버지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아물지 않을 것 같던 상처를 다스렸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는 힘을 냈다. 그녀의 용기는 감동으로 전해져 보는 이를 따뜻하게 했다. 노래를 듣다 흘린 눈물은 막힌 가슴을 열어 숨을 틔웠다. 그 순간만큼은 모두가 하나 되어 서로를 위로했다.
끝을 알 수 없는 우주. 그곳에서 바라본 지구는 말 그대로 '티끌' 보다 작다. 그러나 한 편으론, 풀잎하나 벌레 한 마리조차도 우주만큼이나 신비로운 생명이지 않은가.
사람의 감정도 그렇다. 사람은 감정 변화에 따라 그만의 우주에 소용돌이가 치기도, 은하수가 펼쳐지기도 한다. 불쑥불쑥 고개를 내미는 불쾌하고 어두운 감정, 치기 어린 질투, 찰나의 벅찬 희열, 일상에서의 소소한 만족과 행복. 모두 내 안에서 만들어지고 소멸될 수 있다는 것. 그것이 바로 신이 우리에게 내려준 선물 아닐까. 누구에게나 주어진, 시간보다 공평한 선물.
결승선을 통과해야만 가질 것 같았던 행복이었다. 그래서일까. '행복은 내 안에 있다'라는 말에 오랫동안 냉소적이었다. 그런데 문득 그 의미가 새롭게 다가온다. 그러자 세상을 향한 억울함이 조금 누그러진다. 성마르고 조급하게 동동거렸던 마음에 바람이 통한다. 숨이 쉬어진다. 누구도 가져간 적 없던 나만의 '그것'이 하얀 실뿌리를 내리는 듯하다. '마음에 난 구멍'을 메우며 어제보다 한 뼘 더 단단해진 오늘을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