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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육그램 Dec 07. 2018

돼지와 돼지고기의 역사

제 2화, 고려 시대의 돼지



고려시대의 돼지


 

 고려시대에 가축사육도 한층 발전하였다. 고려시대의 가축사육은 크게 두 가지 형태로 진행되었다. 하나는 국가가 운영하는 큰 규모의 목장들에서의 가축사육이었고 다른 하나는 농가들에서 자체의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가축사육이었다. 국가 목장들에서는 말, 소, 낙타, 노새, 하늘소들을 길러 전마(군마)나 국가 물자 운반 등에 이용하였고 농가들에서는 부림소, 부림말, 돼지, 양, 닭, 개 등을 길러 농산 작업과 고기와 알 생산에 이용하였다. 고려시대의 국가 목장 가운데서 비교적 규모가 큰 것들로는 지금의 황해남도 청단군의 용매도 말 목장을 비롯하여 황주, 청주, 개성, 광주, 봉천, 철원들에 목장이 있었다. 이밖에 비교적 규모가 작은 철산의 백 량 목장을 비롯하여 전국 각지에 목장들이 설치되어 운영되었다. 이것은 고려시대에 이미 큰 목장 운영에 필요한 가축사육 기술은 물론 수의방역과 가축우리 건설, 새끼낳이 조직 등에 대한 기술이 상당한 정도로 발전하였으리라는 것을 알 수 있게 한다.

 고려시대 국가가 운영하는 소나 말, 낙타 등을 기르는 큰 규모의 목장들이 있었으나 돼지를 목장에서 길렀다는 자료가 없는 것으로 보아 전적으로 분산사육의 형태로 돼지를 길렀을 것이다. 1150년에 제정한 가축 하루 먹이량 기준에도 돼지에 대한 자료는 없다.『고려사』 권77 백관지 2의 진구서조에 '잡축사육을 담당하였다'는 말이 있는데 잡축이란 당시 아무 먹이나 다 잘 먹는 가축 즉 돼지라는 뜻이다. 돼지의 이러한 소화생리적 특성을 이용하여 고려 사람들은 집집마다 돼지를 기르면서 뜨물이나 농부산물 등 아무것이나 먹이면서 길러 왔다고 짐작된다. 그러므로 농사가 시작된 첫 시기부터 가축으로 길러 온 돼지 사육이 가정에서 아낙네들이 하는 일로 취급되면서 과학화되지 못하였다.



고려 초기의 육식 문화에 대한 다른 생각



 고려 초기는 불교의 번성과 권농정책으로 육식 문화가 위축되고 절제되는 시기였다. 고려왕들은 여러 번에 걸쳐 소 도축금지령을 내리고 금령을 어겼을 때는 살인죄에 준하는 자자형(刺字刑)을 내려 도축을 엄격하게 통제했다. 조선시대에 우금령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던 것에 반해 고려 전반기에는 살생을 금하는 불교의 번성으로 도축금지령이 비교적 잘 유지되었다.『고려도경』에 따르면 살생을 꺼리는 풍조 때문에 도축이 서툴러 고기 맛을 버린다고 할 정도로 고려 전반기에는 육식 문화가 위축되어 있었다. 고려도경이라는 책이 나온다. 고려 도경은 1123년(인종 1)에 송나라의 사절 서긍(徐兢, 1091∼1153)이 고려에 사행을 다녀왔다가 지은 책으로, 전 40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본래 제목은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이다. ‘도경’은 글과 그림을 곁들여 설명했다는 의미이다. 책은 모두 29개의 큰 항목으로 나뉘었고, 다시 300여 개의 작은 항목으로 세분화되어 있다. 형상을 그릴 수 있는 것은 먼저 글로써 설명하고 그림을 덧붙이는 형식을 취하였는데, 현재 그림은 전하지 않는다.

『고려도경』은 외국인이 직접 보고 겪었던 12세기 고려의 모습과 고려인들의 생활상 등을 기록한 당대의 자료라는 점에서 그 가치가 높다. 『고려도경』은 기본적으로 송나라 사람의 시선으로 보는 고려를 서술한 것이다. 따라서 서긍이 서술한 고려의 풍속에도 그 자신의 주관성이 상당 부분 들어가 있다. 서긍 스스로 언급했듯이 그가 숙소 밖을 나가 본 것이 5∼6차례뿐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가 고려의 풍속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서술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리고 이러한 잘못은 백성의 삶에 대한 부분에서 좀 더 크지 않을까 한다. 서긍이 일반 백성들의 생활을 기록한 것은 가치가 있으나, 그 기록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신중을 기해야 할 필요가 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고려도경』은 분명한 한계를 지니는 사료이다. 아울러 『고려도경』이 찬술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송나라가 전쟁에 휘말린 탓에, 『고려도경』의 원본을 찾기 어렵게 되었고 이로 인해 판본도 여러 가지가 있어 연구에 혼란을 주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고려도경』의 사료적 가치를 절대로 폄하해서는 안될 것이다. 『고려도경』은 고려시대 당대의 모습을 보여주는 충분한 사료적 가치를 갖고 있다.

 고려초기 백성의 생활과 풍속에 대한 기록이 거의 남아 있지 않은데 고려도경에서는 도축에 관한 나름 상세한 기록이 있었으니 이 기록만으로 고려 초기 육식 문화가 위축되었다.라고 거의 모든 책들과 보고서가 기록하고 있다. 필자도 아무 생각 없이 고려 초기에는 도축도 제대로 못할 만큼 육식 문화가 위축되었구나 하고 생각했었다. 워낙 '어느 누구도 아니다.' 라고 말하는 사람이 없으니 상식으로 받아들였다. 그런데 백정, 양수척 등 도축과 관련된 역사를 찾아보니 이 땅의 도축을 업으로 살았던 사람들은 전쟁 포로로 잡혀 온 외민족들이라는 설이 있는데 어릴 때 위인전에서 읽었던 귀주대첩이 1019년(현종 10)에 강감찬(姜邯贊)이 중심이 되어 고려를 침입한 거란군을 귀주(龜州)에서 무찌른 전투를 말한다. 이때 살아 돌아간 거란병사가 수천이고 수만병의 거란병사가 포로가 되었다고 한다. 적어도 이 수만명의 거란 병사들이 고려에 남아 소, 돼지를 잡는 일에 종사했을 거다. 기록에 의하면 양수척, 화적, 수척이라고 하던 무리들은 후삼국시대부터 존재하였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도 수렵시대부터 인간은 사냥을 하고 고기를 먹었다. 가축을 사육하면서 도축의 기본적인 방식에 대해서는 도축을 담당하는 사람들은 잘 알고 있었을 거다. 또한 고려가 불교 국가여서 쇠고기를 안 먹었다면  968년 광종을 시작으로 988년 (성종7) 1066년 (문종20) 1107(예종2) 여기까지가 몽고 간섭기 이전이고 이후 1310년 (충선왕2), 1352년 (충숙왕2), 1371년(공민왕20)등 도살 금지령이 내려진 역사만으로도 쇠고기에 대한 우리 민족의 기호는 억제할 수 없는 것이었다.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그런데 왜? 고려전기 육식 문화의 위축설이 있을까?



 이는 우리나라 식품사 연구의 대학자인 이성우 교수님의 주장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한다. 이성우의 주요 저서로는 『고려이전한국식생활사연구(高麗以前韓國食生活史硏究)』(1978)·『한국식경대전(韓國食經大典)』(1981)·『조선시대조리서의 분석적연구』(1982)·『한국식품문화사(韓國食品文化史)』(1984)·『한국식품사회사(韓國食品社會史)』(1984)·『한국요리문화사(韓國料理文化史)』(1985)·)·『동아시아속의 고대한국식생활사연구』(1992)·『식생활과 문화』(1992)·『한국식생활의 역사』(1992)·『한국고식문헌집성(韓國古食文獻集成)』(1992) 등이 있는데, 그의 저서속에서 주장한 고려 전기 육식문화 위축설을 아마도 그 당시에 식품사를 연구하는 어느 학자도 반박하지 못했던 것 같다. 일본에서 공부를 한 고 이성우 교수의 이력으로 짐작해 보면 이성우 교수의 연구의 많은 기초 자료들은 일제 강점기 일본인 학자들에 의해서 연구된 우리 역사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아마 고려도경에 대한 일본인 학자들의 오랜 연구도 있었을 것으로 사료된다.

 그래서 고려도경 속에서 그 시절 사람들의 육류 소비에 대한 자료들을 찾아보기로 했다. 그리고 도재편 이외에도 고기와 관련된 기록이 여러 편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고려도경 제8권 인물 편에 이자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당대의 권력자인 이자겸의 집에 고기 선물이 너무 많이 들어와 썩는 고기가 수만근이라는 대목이 나온다.

선화봉사고려도경 제8 권 인물 수태사상서령 이자겸 
고려는 본래부터 족망(族望)을 숭상하고 국상(國相)은 거개 훈척(勳戚 나라에 공이 있는 사람과 임금의 친척)을 임용한다. 왕운(王運 선종(宣宗))으로부터 이씨(李氏)의 후손에게 장가들었는데, 왕우(王? 예종)도 세자(世子) 때에 또한 이씨의 딸을 맞아 비(妃)로 삼았다. 이로 말미암아 문호(門戶)가 빛나고 드러나기 시작하여, 자겸의 형 자의(資義)가 전대(前代) 왕 때에 이미 국상이 되었다가 일에 연좌되어 유찬(流竄 귀양 보내는 것)되었기 때문에 자겸이 형의 일을 경계삼아 매양 스스로 조심하였으므로, 왕우가 깊이 신임하고 중히 여겨 춘궁(春宮 세자)의 스승이자 벗을 삼았다. 이때 왕해(王楷 인종)가 아직도 어렸지만, 자겸이 박식하고 견문이 많은 선비 8인을 선발하여 지도하게 하였다. 이를테면 김단(金端) 같은 무리는 그 무렵 본조(本朝)로부터 사제(賜第 임금의 명령으로 특별히 급제한 사람과 똑같은 자격을 주는 것)를 받고 귀국하였는데, 바로 이 선발에 참여되었다. 임인년(1122, 예종 17) 여름 4월에 왕우(王俁)가 죽으매, 여러 아우들이 다투어 왕위에 오르려고 했다. 이에 앞서 왕옹(王顒 숙종)이 아들 다섯을 두었는데 왕우가 맏아들이었다. 자겸이 이미 왕해를 세웠는데, 중부(仲父) 대방공(帶方公) 보(俌)가 그 왕위를 탈취하려고 하여 드디어 문하 시랑(門下侍郞) 한교여(韓繳如)ㆍ추밀사(樞密使) 문공미(文公美)와 더불어 불궤(不軌 반역)를 음모하니, 예부 상서(禮部尙書) 이영(李永)ㆍ이부 시랑(吏部侍郞) 정극영(鄭克永)ㆍ병부 시랑(兵部侍郞) 임존(林存) 등 10여 인이 내응(內應)하기로 했었는데, 미처 거사하기 전에 음모가 누설되매, 곧 체포하여 하옥(下獄)하였다. 자겸이 이에 왕에게 풍간(諷諫)하여 보를 해도(海島)에 추방하고 여러 악인들을 베었으며 관련자 수백 인을 잡아들였다. 그리하여 변란을 안정시킨 공으로 태사(太師)로 승진시키고 식읍(食邑)과 채지(采地)를 더 주었으며 벼슬이 상서령(尙書令)에 이르렀다. 자겸은 풍모(風貌)가 의젓하고 거동이 화락하고 어진이를 좋아하고 선(善)을 즐겁게 여겨, 비록 정권을 장악하고 있으면서도 자못 왕씨(王氏)를 높일 줄 알아서, 오랑캐 중에서는 능히 왕실을 부장(扶獎)하는 자이니, 역시 현신(賢臣)이라 할 만하다. 그러나, 참소를 믿고 이득을 즐기며 전토(田土)와 제택(第宅)을 치장하여 전답이 연달아 있고 집 제도가 사치스러웠고, 사방에서 궤유(饋遺 선물)하여 썩는 고기가 늘 수만 근이었는데, 여타의 것도 모두 이와 같았다. 

 생각해 보자. 고기는 어느 시절이나 귀한 것이었다. 선물을 귀한 걸 하지 법으로 금지된 걸 선물했을까? 선물하는 고기가 방혈도 되지 않은 냄새가 나는 고기였을까? 


 다음은 우마차에 대한 이야기. 고려도경 제15권 거마편에 나오는데 일상 속에 소가 지속적으로 이용되었다면 숙소 밖을 5-6차례밖에 나가지 못한 서긍이 우마차를 보았다면 그 당시 개경에는 상당한 우마차가 다니고 있었다는 걸 의미하지 않을까? 이는 상당수의 소가 고려 초기에 일상 속에 있었다는 거다.     


선화봉사고려도경 제 15 권 거마牛車] 우거
우거의 시설은 제작이 간략하여 특별한 법도가 없다. 아래에 두 개의 수레바퀴가 있고, 앞의 멍에에 소를 매어 끌게 하는데, 매양 그 위에 물건을 싣고는 반드시 새끼줄로 꿰어 매어야 비로소 기울어 엎어짐을 면할 수가 있다. 더구나 그 나라는 거개가 산길이어서, 행진하면 울퉁불퉁 흔들리니, 다만 예를 갖춘 도구일 뿐이다.


 고려도경 제21권 조례 방자편에 평상시에 고기를 먹는 일이 드물어서, 중국 사신이 올 때는 바로 대서(大暑)의 계절이라 음식이 상해서 냄새가 지독한데, 먹다 남은 것을 주면 아무렇지 않게 먹어 버리고 반드시 그 나머지를 집으로 가져간다. 이것이 지금의 로스구이의 원조격인 방자구이를 말하는 것으로 『고려도경(高麗圖經)』 방자조에도 방자라는 하인은 박봉이라 채소 등이 급여될 뿐이어서 간혹 윗사람이 먹다 남긴 고기 찌꺼기를 비록 조금 변질되어 냄새가 나도 달게 먹고 집에 가지고 가기도 한다고 하였다. 방자구이는 소금만 뿌려서 굽는 것이므로 특별한 양념재료나 조리기술이 없어도 누구나 쉽게 할 수 있고, 식품이 가지고 있는 자체의 맛과 향을 즐길 수 있다. 먹을 때는 날파나 상추의 겉절이를 곁들여 먹기도 하였다. 네이버 지식 백과에 설명되어 있는 이 방자구이의 참고 문헌이 고려 이전 한국식 생활연구 (이성우 향문사 1978)이다. 서긍의 묘사는 평사시 고기 먹는 일이 드물었다고 이야기하지 못 먹었다고 이야기하지 않는다. 당시 하급 관리가 고기를 마음대로 먹을 수 없는 사회 환경이었을 거다. 방자구이는 양념하지 않고 소금만 뿌려 구운 고기음식인데 달리 해석해 보면 방자는 관청에서 식재료 등의 검수를 담당하던 직책으로 납품된 고기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서 고기를 구워 소금에 찍어 먹었다는 설도 있다. 관청의 육류취급을 담당하였으니 상한 고기도 방자의 책임이었을 거구 아무리 상해도 삶아 먹는 것이 주 요리법이던 고려 시대에 방자가 그 상한 고기를 먹었다는 아마 부대찌개의 역사랑 같은 맥락 아닐까 생각한다.



선화봉사고려도경 제21 권 조례 [房子] 방자
방자는 사관(使館)에서 심부름을 하는 자들이다. 각방에 사신과 부사로부터 관의 높낮음에 따라 많고 적고의 차이가 있다. 그 복색은 문라(文羅)의 두건에 자색 옷[紫衣]에 각대(角帶)와 검정 신[皁履]을 신는데, 응대를 잘하는 자만을 선택하여 방자를 삼는다. 그 몸가짐을 보니 매우 근신하게 법을 지키고 또 붓글씨를 잘 쓴다. 고려의 봉록(俸祿)이 지극히 박해서 다만 생쌀과 채소를 줄 뿐이며 또 평상시에 고기를 먹는 일이 드물어서, 중국 사신이 올 때는 바로 대서(大暑)의 계절이라 음식이 상해서 냄새가 지독한데, 먹다 남은 것을 주면 아무렇지 않게 먹어 버리고 반드시 그 나머지를 집으로 가져간다. 접대례를 마치고 관(館)을 물러날 때에는 몇 줄기 눈물이 흘러내리니, 대개 고려 사람은 중국에 대하여 그 정이 더욱 두텁기 때문에 방자라도 그렇게 떨어지기 섭섭해한다.  


고려도경 제 23권

도재편. 드디어 고려도경에서 인용이 많이 되고 고려 초기의 우리 민족의 육식문화가 위축되었다고 이야기하는 예 도재(도축) 편이다. 이 시절 권력 계급은 양과 돼지고기를 먹었다. 특이한 건 양고기에 대한 언급일 거다. 양고기는 별로 이야기된 적이 없는데 이렇게 기록되었는 건 더 깊이 연구해 봐야 할 문제다. 도축을 잘못해서 방혈이 안되면 고기에서 냄새가 날 수 있다. 돼지의 경우 거세를 하지 않아도 냄새가 나고 사료에 따라서도 냄새가 많이 난다. 현재는 배합사료를 먹이지만 그 시절에는 잔반도 없었을 거고 농업 부산물이나 인분이 주요 먹이였을 거구 인분을 먹은 돼지고기는 무진장하게 냄새가 났을 거다.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후삼국시대에 도축을 업으로 하는 외민족이 반도에 살고 있었는데 송나라 사신 서긍이 보는 앞에서 도축을 하면서 그것도 서긍이 먹을 양과 돼지를 개판으로 잡은 건 송나라 사신이라고 고려를 무시하는 송나라 사신단에 대한 고려의 해프닝이었을지도 모른다. 사신이니 고기는 대접해야겠는데 사신들 태도가 건방지니 맛없는 고기를 대접하기 위한 외교적 해프닝이거나 서긍의 왜곡된 시선으로 서술한 글일 수도 있다. 고려도경 속에 여러 고기와 관련된 이야기들을 종합해 보면  고려 초기에도 권력 계급의 육식 소비는 계속되었을 것 같은데 왜? 고려 초기 육식문화가 위축되었다고 다들 해석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선화봉사고려도경 제23 권 잡속 2  [屠宰] 도재
고려는 정치가 심히 어질어 부처를 좋아하고 살생을 경계하기 때문에 국왕이나 상신(相臣)이 아니면, 양과 돼지의 고기를 먹지 못한다. 또한 도살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다만 사신이 이르면 미리 양과 돼지를 길렀다가 시기에 이르러 사용하는데, 이를 잡을 때는 네 발을 묶어 타는 불 속에 던져, 그 숨이 끊어지고 털이 없어지면 물로 씻는다. 만약 다시 살아나면, 몽둥이로 쳐서 죽인 뒤에 배를 갈라 내장을 베어내고, 똥과 더러운 것을 씻어낸다. 비록 국이나 구이를 만들더라도 고약한 냄새가 없어지지 아니하니, 그 서투름이 이와 같다.   


고려도경 제23권 토산편에 소와 양을 키우는 걸 좋아했다 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가축을 키우는 건 용도가 있어야 한다. 애완용으로 사육하는 것이 아니라면 분명 소와 양을 키우는 목적이 있었을 거다. 소를 키우는 목적이 우경이었다고 해도 늙은 소 병든 소는 잡아먹는다. 이 땅의 어느 역사책에도 우리의 풍습에도 열심히 일한 소가 불쌍해서 묘를 만들어 준 사례는 거의 없다. 소의 역할은 역우와 고기 두 가지 확실한 사육 목적이 있었다. 필자는 간혹 종교적으로 돼지고기를 금지하는 회교도나 소고기를 금지하는 힌두교처럼 종교적 구속이 강하지 않았다는 건 우리 민족이 농경민과 유목민의 복합체이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     


[土產] 토산

고려는 산을 의지하고 바다를 굽어보며 땅은 토박하고 돌이 많다. 그러나 곡식의 종류와 길삼의 이(利)와 우양(牛羊) 축산의 좋음과 여러 가지 해물의 아름다움이 있다. 광주(廣州)ㆍ양주(楊州)ㆍ영주(永州) 등 3주에는 큰 소나무가 많다. 소나무는 두 종류가 있는데, 다만 다섯 잎이 있는 것만이 열매를 맺는다. 나주도(羅州道지금의 전라도)에도 있으나, 삼주(三州)의 풍부함만 못하다. 열매가 처음 달리는 것을 솔방[松房]이라 하는데, 모양이 마치 모과[木瓜]와 같고 푸르고 윤기가 나고 단단하다가, 서리를 맞고서야 곧 갈라지고 그 열매가 비로소 여물며, 그 방(房)은 자주색을 이루게 된다. 고려의 풍속이 비록 과실과 안주와 국과 적에도 이것을 쓰지만 많이 먹어서는 안 되니, 사람으로 하여금 구토가 멎지 않게 하기 때문이다. 


고려도경 제26권 연의 편을 보면 

그 술은 맛이 달고 빛깔이 진한데, 사람을 취하게 하지는 못한다. 과일과 채소는 풍성하고 살졌는데 대부분 껍질과 씨를 제거하였고 안주에는 양육(羊肉)과 제육이 있기는 하지마는 해물이 더 많다.

연례에 술과 안주가 나오는 걸 이야기하면서 분명 양육과 제육 즉 돼지고기 안주가 있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연음(燕飮)의 예에 쓰이는 장식과 장막 등속은 다 광채가 나고 화려하다. 대청 위에 비단 보료를 펴 놓았고 양쪽 행랑에는 단을 두른 자리를 깔았다. 그 술은 맛이 달고 빛깔이 진한데, 사람을 취하게 하지는 못한다. 과일과 채소는 풍성하고 살졌는데 대부분 껍질과 씨를 제거하였고 안주에는 양육(羊肉)과 제육이 있기는 하지마는 해물이 더 많다. 탁자 표면에는 종이를 덮었는데, 이는 정결함을 취한 것이다. 기명(器皿)은 대부분 금칠한 것을 썼고 혹 은으로 된 것도 있으나, 푸른색 도기(陶器)를 값진 것으로 친다.          

 고려도경에는 고려 초기 육류 문화에 관한 몇 가지의 이야기가 있는데 유독 도재편만을 인용 고려 초기 육식 문화가 위축되었다 라고 이야기하는 건 많은 무리가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어떤 근거인지는 몰라도 몽고 간섭기에 몽고인들에 의해서 우리 민족의 육싯 문화가 부흥된 것처럼 이야기하고 있다. 이삼 백 년씩 단절된 요리법이 지금처럼 요리책이 있는 시대도 아닌데 다시 만들어진다는 것 상식 밖의 이야기다. 맥적 등 고조선부터 발전했던 우리 육식문화의 전통을 이야기하려면 고려도경에 대한 연구와 고려 초기 육식 문화가 위축되었다는 시각의 교정이 필요하다. 고려 초기에 불교가 아무리 융성해도 지방의 호족 권력들이 중앙 정권의 통치력 밖에 있었던 지역도 많았을 건데 고려 왕조가 불교를 장려한다고 육식이 거의 자취를 감춘 건 이해할 수 없는 해석이다.



고려 후기의 육식문화



 고려에 들어온 몽고의 둔전병은 농경과 식용으로 소를 징발하였지만 고려에는 그들이 요구하는 만큼의 소가 없었다. 몽고 사람들은 목축 기술이 능숙하여 충렬왕 2년 (1276년) 제주도에 목장을 직접 개발하였다.

영조대에 간행된 것으로 보이는 몽고어 사전인 몽어류해에 의하면 몽고에서는 맹물에 고기를 넣고 끓인 것을 공탕이라 적고 슈루라 읽고 있다. 따라서 오늘날의 곰탕이나 설렁탕처럼 맹물에 고기를 넣고 삶는 조리법은 몽고 사람을 통하여 배우게 된 것이라 볼 수 있다. 또 송대말 또는 원대 초기에 누가 지었는지는 몰라도 몽고풍이 강하게 깃든 가정 백과전서로서 거가필용이라는 책이 있다. 조선조 요리서의 기본 바탕을 이루는 것은 1715년경에 나온 홍만선의 산림경제라 하겠는데 이 책의 조리 편 육요리의 약 60%가 거가 필용의 내용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이다. 이 거가필용의 고기 조리법은 80,90%는 굽는 조리이고 고기를 미리 유장, 술, 향신료 등으로 조미하여 굽고 있다. 몽고의 간섭기부터  맥적이  설야멱적(雪夜覓炙)ㆍ설리적(雪裏炙)ㆍ설야적(雪夜炙)’이라는 이름으로 되살아나서 정착되었다. 『산림경제(山林經濟)』(1715)에는 ‘설야멱적(雪夜覓炙)’에 대하여 ’소고기를 저며 칼등으로 두들겨 연하게 한 다음 대나무 꼬챙이에 꿰어 기름과 소금을 바른다. 충분히 스며들면 뭉근한 불에 구워 물에 담갔다가 다시 굽는다. 이렇게 세 차례 하고 참기름을 발라 숯불에 다시 구우면 아주 연하고 맛이 좋다’고 하였다. 『해동죽지(海東竹枝)』(1925)에는 ‘설야적(雪夜炙)’이 나오는데, ’개성부(開城府)의 명물로서, 소갈비나 염통을 기름과 훈채로 조미하여 굽다가 반쯤 익으면 찬물에 잠깐 담갔다가 센 숯불에 다시 굽는다. 눈 오는 겨울밤의 안주로 좋고 고기가 매우 연하여 맛이 좋다’고 하였다. 우리 민족이 쇠고기에 대한 선호가  높아진 건  몽고의 간섭기 이후부터가 아니었나 추측할 수 있다. 몽고는 유목민족이라 돼지고기에 익숙하지 않았으니 지배 계급의 문화가 자연스럽게 고려 후기에 우리 민족의 식생활에 영향을 미쳤다고 하겠다.




by 고기박사 김태경




참고문헌:

돼지의 맛 뉴스Q2017.7.13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7/03/2017070302172.html

한국사콘텐츠 고려도경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R0006    

한우마당(http://www.ihanwoo.kr)

[네이버 지식백과]방자구이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encykorea.aks.ac.kr/Contents/SearchNavi?keyword=%EA%B3%A0%EB%A0%A4%EB%8F%84%EA%B2%BD&ridx=0&tot=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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