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핍은 성장 에너지
PD로서 나는 누구인가? 스스로 물음을 던져본다. 내 기준으로 PD는 크게 둘로 나뉜다. 서울 PD, 지역 PD. 지역 PD는 서울 PD가 아닌 PD다!! 요즘은 지방 대신 지역이란 표현으로 서울과 수평적 관계를 유지하려 안간힘을 쓰지만 아직 현실은 지방이다. 나는 강원도 산골 PD다.
지역방송에서 방송을 만들다 보면 인력, 장비, 예산 등 서울 방송에 비해 불편한 것. 부족한 것 투성이다. 음악감독이 없어 음악 작업도, 종합편집실도 없어 화면 효과도, AD가 없어 제작비 정산 행정업무도, 카메라맨이 부족할 땐 언제든 카메라 촬영도, CG실이 바쁠 땐 자막도 급하게 만들 줄 알아야 한다. 이 모든 걸 군소리 없이 해낼 수 있어야 진정한 지역 PD다.
불편함이 과연 열등한 것일까?
생각해 본다. ‘궁하면 통한다’고, 불편하다고 느끼면 편리하게 만들려고 노력해서 뭔가를 바꾸려는 데에서 인간의 창조성은 발현됐고 인류 진화의 역사가 그걸 말해주고 있다. 인간이 타조나 말처럼 빨리 달렸다면, 자동차를 발명했을까? 우리가 가진 그 어떤 것도 불편한 것일 뿐 열등한 것은 아닌데 자꾸 비교하다 보니 열등해지는 것 아닐까? 열등함은 우리 의식이 일으키는 것이다. 그러니 처음부터 열등한 것은 없다.
산골 방송의 부족함이 오히려 이것저것 다 아울러야 되는 레오나르도 다빈치형 역량을 키울 수도 있지 않을까? 요즘 시대가 요구하는 융합형 인재인 셈이다. 게다가 꼬박꼬박 월급 받으며 이 모든 기술과 요령을 공짜로(?!) 습득할 수 있으니 그리 나쁠 것도 없다. 이것저것 부족하고 불편한 것은 있지만 PD로서 내 존재를 살 찌우기에는 그야말로 이곳이 ‘딱’이다.
남들과 비교하는 성공보다
나를 더 단단하게 다지는 성장
나도 한때는 서울 PD가 되어 보려고 했지만,
번번이 고배를 마셨고 가까스로 지역방송에 입문했다 그래도 미련이 남아 서울 프로그램 연출 제대로 배워 서울 공중파 프로그램 만들어보겠다는 일념으로 정규직 지역 PD를 그만두고 무작정 상경해 비정규직 프리랜서 외주제작 PD로 일해 보기도 했다. 물론 지나고 보니 부양가족도 아랑곳하지 않는 무모한 객기를 부리긴 했어도 가슴이 시키는 일을 해봤기에 후회는 없다.
그러면서 알 게 된 것이 있다. 마라톤은 자신의 페이스를 놓치면 끝이다. 산골 PD가 서울 PD 따라 하면 어떻게 될까? 황새 따라가는 뱁새의 민망한 가랑이가 될지도 모른다. 서로 다른 마라톤에선 코스가 다름을 인정해야 자신만의 페이스로 포기하지 않고 달릴 수 있다. 길이 다르면 방식도 달라야 함을 알게 되었다. 지역과 서울을 다 경험한 후에야 얻은 결론인 셈이다.
꿈보다 나를 찾는 여행
몇 년 전 나를 찾아가는 강연 여행 <청춘, 길을 묻다>란 프로그램 제작을 마치고 출연했던 서울의 청춘들을 홍대 앞에서 만난 적이 기억난다. 성공과 꿈을 좇다 열정 과잉으로 삶의 에너지가 방전된 청춘들이 방송 출연 후 사뭇 달라져 있었다. 지역에 터전을 둔 삶의 진정한 멘토들과 만나는 ‘강연 여행길’에서 '꿈보다 나'를 먼저 찾게 되었다고 했다. 남들과 비교하는 성공보다 나의 내면을 단단하게 다지는 성장이 앞으로 지치지 않고 멀리 오래 가게 하는 삶의 자양분임을 깨닫게 되었다고 했다.
삶이란 속도보다 방향
속도에 지친 삶은 멈추지 않으면 그 방향을 바꿀 수 없다. 정신없이 내달리다 잠시 멈춰 쉴 때 비로소 왜 이렇게 달리고 있는지 생각할 수 있는 것처럼 복잡하고 급박하게 돌아가는 세상의 속도에 정신없이 끌려만 가다가 잠시 멈춰 한숨 돌리면 그제야 알게 된다. 거기에 이끌려가던 지금 모습이 진정 자신이 원했던 모습이었는지를…. 다시 내게 묻는다. 나는 어떤 PD인가? 이제는 당당하게 답한다. 나는 산골 PD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