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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드리셋 Oct 08. 2021

꽃게탕과 애정

사랑은 갑각류를 타고



새우도 그렇고 게도 그렇고 갑각류 너무 귀찮아. 들인 공에 비하면 진짜 알맹이는 요만해. 껍질 까주는 게 진짜 보통일이 아니야. 웬만큼의 애정이 있지 않고는 진짜 못할 짓이라니까.​

홍두식한테 홍게살을 발라주던 윤혜진이 말했다.

(드라마 '갯마을 차차차' 얘기다. 혜진아 홍게는 양반이다, 꽃게는 진짜..)





어제 저녁 꽃게탕을 해먹었다. 꽃게는 가을이 제철이라는데 주부 10년 차지만 아직 살아있는 꽃게 손질은 못하겠어서 잡은 지 얼마 안 된 애들 얼린 걸로 두 팩을 사 왔다. 된장에 고추장, 고춧가루, 약간의 간, 거기다 무 잔뜩. 그것만으로 먹고 또 먹고 싶어지는 맛을 내는 걸 보니 아무래도 꽃게 자체의 육수 뽑는 능력치가 보통이 아닌 것 같다.

셰프의 기쁨 중 최고는 사람들이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는 것일 텐데, 특히 우리집 어린이들은 입맛이 까다롭기 때문에 걔네들만 잘 먹어줘도 그날 요리는 선방이라 볼 수 있다.

꽃게 냄새가 좋다, 매운데 맛있다 좋은 평이 들려오는 걸 보니 안심해도 되겠다...싶지만, 셰프는 난관에 봉착한다.


"엄마 근데 이거 어떻게 발라 먹어?"


이런...

대충 젓가락으로 이렇게 슥슥 저렇게 잘잘 발라보렴 했지만, 역시나 입에 들어가는 것보다 딱지 안에 남아있는 살이 더 많아 보인다. 어쩌겠어. "엄마, 맛없어서 못 먹겠어"도 아니고 입 짧은 내 새끼들이 먹겠다는데!! 어쨌든간 맛있다는데 게살 발라주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지...(아무것도 아닌 게 아닌 게 아닌 게 꽃게 아닌 게...) 세 아이 중 한 명이 자긴 꽃게 주지 말라고 김 싸 먹겠다고 한 게 불행인지 다행인지 모르겠지만 어제만큼은 어쩐지 다행에 아주 조금 더 가까웠던 거 같다. 

"살만 먹으면 또 별로야. 이건 국물에 살을 다 발라놓고 푹 익은 무랑 흐물흐물하게 만듯 비빈듯 밥이랑 같이 떠먹어야 맛있어."

열심히 설명해주면서 밥도 말아주는데 맞은편 남자가 눈에 들어온다.


남편. 그는 원래 생선 발라먹는 걸 귀찮아하지만(꽃게라고 다르지 않음) 어쨌거나 맘먹고 바르면 나보다 꼼꼼해서 가시 하나 없이 살을 잘 바르는 편인데, 어제는 거의 애들 수준으로 꽃게를 못 발라먹고 있었다.(엄밀히 말하면 '못'이 아니고, 홍두식처럼 '안'이었겠지만)

애들 발라주느라 바빠 죽겠는데 "아, 도저히 귀찮아서 못 발라먹겠다. 근데 너무 맛있어..."라며 열심히 살 바를 맘은 안 먹고 국물이랑 야채만 잔뜩 먹고 있는 이 남자를 빵야빵야 쏠까 말까 하다보니, 맛있게 먹는 것만도 고맙고 얼마나 배가 고프면 저렇게 후룩 해치울까 싶어, 옜다 까짓 거 너도 내가 발라주마 하고 얼마 없는 게살을 긁고 긁어 남편 국그릇에 놔주었다.

갑각류로 느끼는 애정의 크기라니... 연애 시절 토마토 해물스파게티를 먹을 때마다 나한테 새우를 까서 놔주던 구남친(좀전에 쏠까 말까 했던 사람)의 모습이 떠올랐다. 너도 나를 많이 좋아했구나. 그래... 좋은 연애였다. 물론 지금도 조 조ㅗ 조 조 ㅎ 좋은 인생이다. 너 먹어 너 먹어, 엄마도 좀 먹어야지, 라고 해주니 좋은 인생 맞지. 나는 막 희생의 아이콘 어머니상은 아니지만, 게살과 포만감엔 딱히 욕심이 없으니 너네들이 맛있게만 먹어준다면 충분해.



하루가 지났는데 손가락에서 꽃게 냄새가 사라지지 않는다. 애정이니 사랑이니 뭐니 하고 있지만 사실 또 꽃게살 발라줄 생각을 하니 어쩐지 생각만으로도 이미 귀찮아져서 제철이니 안제철이니 당분간은 안 하고 싶은 요리다. 그래도 멸치와 보리새우와 황태만으로는 안 되는, 꽃게 오직 너만이 낼 수 있는 맛이 있어서 귀찮음을 감수하고 한 번은 끓여먹게 될지도 모르겠다. 가성비 안 좋은 갑각류... 너 큰 살 한 점 더 주려고, 내가 조금 번거로워질 수밖에 없는 갑각류.

사랑은 꽃게를 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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