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부산국제영화제와 서울독립영화제의 상을 휩쓸었다는 소식을 들어왔던 데다 하윤경 배우의 팬이기도 해서 개봉 후 극장에서 꼭 보고 싶었다.
다만 바빠서 타이밍을 못 잡고 있었는데, 독립영화를 같이 찾아보고 다니는 친구들에게 이 영화 얘길 꺼냈더니 9월 29일에 아트하우스 모모에서 (무려) 감독님과 원작 소설 김혜진 작가님까지 오는 GV가 있다는 소식을 찾아왔다. 이런 기회를 놓칠 수 없다! 만사를 제쳐두고 가서 봤다. 결론은...!
예상만큼이나 너무 좋은 영화였다. 올해 본 영화 중에 제일 좋았다.
재밌네
세상에 대한 진정한 관심이 있는 사람들과 이 영화를 본다면 할 얘기가 아주 많아질 수밖에 없다. 퀴어 커플의 경제활동과 주거권에 대해, 값싸게 다뤄지는 요양보호사의 돌봄노동에 대해, 한국에서 치매노인이 되는 공포에 대해, 비정규직 강사의 위태로운 삶에 대해....
영화를 보고 나와서 친구들과 위 주제들로도 이야기를 나눴지만 무엇보다 첫마디는 “재밌네”였다.
상업적 성공을 위해 원작을 마사지하거나 억지 카타르시스를 넣지 않는 독립예술영화가, 위와 같은 온갖 문제를 겪는 주인공들을 내세우고도 재미있을 수가 있을까? 거의 불가능한 미션 같은데..
하지만 재미있었다.
독립영화를 즐기는 나 같은 사람도 <존 오브 인터레스트> 같은, 서사를 소홀히 하는 영화를 보면 앞에 10분은 졸게 된다. (실은 20분 정도 졸았다..)
하지만 <딸에 대하여>는 ‘나 예술영화야!’라는 자의식 과잉이 없다. 감독의 문제의식을 전시하는데 과히 에너지를 쏟지 않는다. 문제들은 배경에서 자연스레 흘러가고, 배우들의 섬세한 연기 속에서 생생하게 솟아오르는 인물들이 예측불가한 이야기와 함께 106분을 꽉 채운다.
레즈비언 커플 레인(하윤경)과 그린(임세미)
세상에서 제일 싼 상품
이 영화를 보고 나니 돌봄에 대해서 간단히 쓰고 싶었다.
돌봄이라는 말에서는 온기가 느껴진다.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이 따뜻한 행위가 세상 값싸고 흔한 상품으로 여겨지고 있다.
엄마들이 가족한테 하는 공짜 노동으로, 장노년층 여성들이 주로 종사하는 저임금 요양보호사나 장애인 활동지원사 등... 싸게 살 수 있거나 공짜로 얻을 수 있다고 평가절하되는 것이 지금 시대의 ‘돌봄’이다.
‘돌봄’이 이렇게 하찮은데, 만약 누군가 인간성을 발휘해서 어떤 약한 인간(혹은 살아있는 모든 것들)을 돌보기 위해 많은 시간이나 돈을 쓰거나 손해를 감수할 정도로 노력하면, 왜 그런 쓸데없는 짓을 하냐고 주위에서 비난당하기 쉽다.
이 영화에서 스스로 치매 노인을 돌보는 당사자이자 앞으로 자식의 돌봄을 받아야 하는 엄마 주희조차도 “너희들이 하는 건 그냥 애들 소꿉장난 같은 거”라고 무심히 내뱉을 정도로 여러 모습의 돌봄들은 쉬운 취급을 받는다.
엄마 주희 역할의 오민애 배우
치매로 기억을 잃어가는 노인, 직장에서 쫓겨나고 집세도 못 내게 되어 살 곳이 없어진 퀴어 커플, 미래가 보이지 않는 저임금 요양보호사로 일하는 엄마... 돌봄이 절실하나 서로 돌볼 수 없는 냉담한 현실에 영화의 이야기와 인물들이 세워져 있다.
당연히 인물들의 처지는 팍팍하고 감정은 날카롭다. 이것이 가상이 아니라 우리의 현실이며 해결책도 보이지 않음을 나는 아는데, 그래 이게 리얼리티라며 암담하게 끝난다면 영화가 아니라 시사고발 프로그램 아닌가? 그게 아니라면 이 영화는 관객에게 좋은 이야기를 전하기 위해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
영화 초반 나는 이런 질문을 안고 영화를 관찰했다. 어떤 대작 영화보다 난이도가 높은 서사적 과제를 어떻게 돌파하고 해소해 갈지가 몹시 궁금했다.
결론적으로 이 영화는 어려운 과제를 풀고 관객에게 희망을 주는 데 매끄럽게 성공한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는지는 보면 알 수 있다.
봄날의 햇살
영화를 보고 나니 레인의 모습을 닮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레인은 그린의 엄마로부터 "내 집에서 나가라"는 말을 거듭 듣는다. 그러면서도상대가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믿기에묵묵히 밥상을 차리고 앓아누운 그녀를 위해 죽을 끓여 내놓는다.
지친 내 삶에 다른 생명의 연약함과 직면하는 피로가 더해지더라도 냉담해지지 않는 것... 어렵지만 그런 돌봄의 마음을 갖기 위해 애쓰는 것... 이것이 한 개인의 선에서 도달 가능한 최선의 선의가 아닐까.
GV에서 감독님의 말을 들어보니, 원작보다 레인의 캐릭터가 따뜻하게 표현된 것은 온전히 ‘봄날의 햇살’ 배우 하윤경 때문이었다고 한다. 한 사람의 퍼스널리티가 배역을 만나자 원작과는 다른 표현이 가능해진 것이다. 그렇다면 정말로 좋은 캐스팅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가 성공한 뒤 ‘혹시 더 이상 독립영화 캐스팅이 안 들어오면 어떡하지?’라고 걱정했다는, 레인만큼이나 사려 깊은 배우 하윤경의 앞날을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