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죄와 불신의 악순환
최근 텔레그램 성범죄자 김녹완(일명 ‘목사’)이 검거된 사건을 보면서 들었던 생각이다.
고통은 전염성을 갖는다. 누군가의 극심한 고통을 오래 들여다보면 내 정신도 조금은 무너진다. 젓가락이 잠시 휘었다가 돌아오듯 대부분은 일을 끝내면 회복되지만, 정신적인 피폐함이 오래 이어져서 헤어 나오기 힘들었던 경험도 있다. 5년여 전에 취재했던 텔레그램 n번방 사건이 그랬다.
텔레그램의 완벽한 익명성 뒤에 비열하게 숨은 박사나 갓갓 일당들은 어린 여성들의 약점을 캐내 협박했다. 그들의 요구에 따라 피해자들은 나체의 기괴한 모습으로 영상을 촬영해 상납하거나 성폭행을 당했다.
n번방 혹은 박사방의 남성들과 성착취물을 돌려보는 방의 인파들은 더 많은 노예 영상을 달라고 박사나 갓갓에게 구걸했다. 자신들의 성욕을 채우기 위해 세상에서 제일 취약한 사람들을 짓밟은 것이다.
피해자
그 취재를 할 때 마주친 모든 인간이 바닥을 보여주었다. 트위터에서 제보자라고 다가온 남성은 처음에는 실제로 여러 방들에 관한 정보를 주었지만, 얼마 후에는 내가 자신을 이용했다며 협박 전화를 하고 몸을 칼로 긋고 피칠갑이 된 사진을 보내오곤 했다.
참회한다며 협조하겠다는 어느 방 운영자는 나와 나눈 대화를 악의적으로 캡처해 유포하거나 내 명함을 도용해 나인 것처럼 위장해서 또 다른 피해자들에게 접근했다.
내가 트위터의 여성들이 아우성하는 소리를 듣고 뒤늦게 텔레그램 성착취 범죄에 관심을 가졌던 2019년 가을, 박사는 최소 수만 명가량의 관전자들에게 절대악으로 숭배받고 있었다.
내가 박사와 대화를 원한다고 여러 차례 알리자 얼마 후 그는 스믈스믈 기어 나와 내게 직접 말을 걸어왔다. 캄보디아에서 마약 장사를 한다던 박사는 자신의 행위는 예술이라며 자기를 ‘아티스트 박’이라고 불러달라고 말했다. 추잡한 나르시스트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를 잡아야 했기에 인내하고 대화를 나눴다.
내가 그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한 유도 질문을 마치고 공세적인 질문을 던지자, 박사는 기분이 상했다며 SBS 옥상에서 한 여성을 투신 자살시키겠다고 말했다. 그는 이런 협박을 할 수 있는 스스로를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 같았다. 나와의 대화 내용을 캡처해 박사방의 관전자들에게 전시했다. ‘SBS 피디는 이 사실을 분명히 인지했다. 여자가 자살하면 그것은 피디의 책임이다’라는 선언과 함께.
그리고 곧 한 여성의 영상이 방에 올라왔다. 가슴께의 살에 ‘SBS 피해자’라고 쓴 여성은 방송이 나가면 자살할 거라고 자신의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누구에게도 내색하지 못했지만 일이 이렇게까지 되자 두려웠다. 이 끔찍한 일들을 알리지 않으면 박사의 피해자가 계속 생겨날 거라는 의무감과, 방송을 냈다가 실제로 이 여성이 사망할 가능성 사이에서 갈등할 수밖에 없었다.
고민 끝에 방송을 냈다. 이 일을 경찰에게 알렸고 경찰은 유능하고 신속하게 여성을 추적했다. 영상 속에 여성의 신원을 파악할 수 있는 아주 작은 단서가 있었다. 경찰은 일주일 후 여성을 발견했고 다행히 살아있었다.
이 여성의 존재는 박사를 추적하는 핵심적인 단서가 되었다. 여성이 박사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여성은 박사의 피해자일 뿐 아니라 하수인 노릇까지 하고 있었다. 완전히 심리적으로 무너져서 박사의 마리오네트가 된 상태였다.
경찰은 텔레그램의 협조를 전혀 받지 않고도 여기서 시작해서 결국 박사를 잡았다. 텔레그램 뒤에 숨어서 경찰을 따돌리던 박사는, 결국 자신을 취재하던 피디를 협박하려다 덜미를 잡힌 것이다. (이 과정은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영화 <사이버 지옥 : n번방을 무너뜨려라>에 자세하게 담겨있다.)
통제
범죄자의 심리적 동기를 이해하는 것은 중요하다. 안갯속으로 사라지는 범인을 잡으려면 결국 연기 같은 흔적들 속에서 다음 행동을 예측하는 단서를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박사의 범행 패턴은 통제에 대한 욕구로 설명할 수 있었다. 그는 수많은 여성들을 협박하고 행동을 통제해서 ‘노예’로 만들며 쾌락을 느꼈다.
박사는 나와의 관계에서도 거듭 통제를 시도했다. 그는 자신이 주민센터 정부 전산망에서 개인의 정보를 열람할 수 있다는 사실을 실제로 보여주면서 나를 협박했다. 언제든 나와 우리 가족이 사는 집에 ‘누군가’를 보낼 수 있다는 의미였다.
‘SBS 피해자’ 여성의 자살 협박 또한 나를 자기 뜻대로 통제하려는 시도였다. 자신이 손석희를 비롯한 수많은 한국 사회의 중요 인물들을 통제하고 있다고 허풍을 떨었던 것 또한 마찬가지였다.
현실에서 박사는 초라한 외톨이였다.
이렇게 타인과 안정적인 애착 관계를 만들지 못하는 인간은, 오로지 타인을 지배하고 통제하는 방식으로만 고립에서 탈출한다. 일종의 관계 불능 상태다. 그들에게는 어떤 약자를 정복하는 순간이 매우 황홀할 것이다. 그때까지 지독한 외로움과 멸시에 시달렸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을 지배하는데서 쾌락을 느낀다는 것. 바꿔 말하면 자신의 쾌락을 위해 타인을 모종의 자위도구처럼 얼마든 사용할 수 있는 인간들이라는 뜻이다. 이들은 살인을 하지 않았을 뿐 정남규나 유영철 등 쾌락 살인마가 인간을 대하는 것과 비슷한 태도를 보인다.
인간의 도구화, 결국 악의 본질은 통한다.
벌레
이런 인격을 가진 존재들은 언제나 발생한다. 그것은 옷장 속의 좀벌레 같은 것이다. 빈곤이나 사회적 단절이 심할수록 세상에 대한 분노를 양분 삼아 악한 부류들이 번성한다.
최근 김녹완의 ‘목사방’ 사건(자세한 내용은 그것이 알고싶다 1433회 참고)을 보면서 다시 한번 두려움이 밀려왔다. 박사나 갓갓의 경우 피해자들의 실제 사진이나 조건만남 시도 등을 약점으로 잡아 협박을 했다. 하지만 김녹완은 대부분 실제 피해자들과 무관한 딥페이크 합성으로 협박을 했다.
딥페이크는 단순한 가짜 영상에서 그치지 않고 피해자의 사회적 평판을 더럽히는 구체적 스토리와 뒤섞여 강력한 공격 효과를 일으킨다.
누군가 자기 주변 여성의 SNS 사진을 지인능욕방에 올리면 누군가가 (혹은 bot이) 얼굴을 나체와 합성해 딥페이크 사진을 만든다. 이미지가 만들어지면 “이 여자가 마약을 샀는데 돈을 안내서 이런 나체사진이 찍혔다, 대전 사는 김OO, 전화번호는 010-xxxx-” 이런 식으로 거짓 스토리까지 덧입힌 뒤 신상을 박제한다.
평범하게 살아가던 피해자들은 어느 날 갑자기 모욕이나 협박을 당하는데, 그것이 아무리 조작된 현실이라 해도 자신의 지인이나 부모에게 알려질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에 결국 통제에 응하게 된다.
암흑의 숲에 숨어있는 누군가 완전히 정보를 조작해 나를 공격할 수 있다는 것. 평판을 무너뜨리는 수준을 넘어 나를 세상에서 가장 더러운 존재로 만들어 공표한다는 것. 이것은 차원이 다른 공포다. 김녹완 같은 인물이 박사나 갓갓 때보다 훨씬 더 많은 피해자를 통제할 수 있었던 이유다.
여기서 좀 더 근본적인 문제를 생각해보자.
약한 타인을 지배하고 쾌락의 도구로 삼는 암세포 같은 존재들은 언제든 있었다. 그알 같은 프로그램에서 숱하게 고발하고 수사기관이 달려든 적도 여러 번이었다. 그럼에도 상황이 점점 나빠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불신
나는 그것이 불신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박사(조주빈), 목사(김녹완), 갓갓(문형욱)의 미성년자 피해자 모두 수년간 성착취를 당하면서 그 사실을 부모에게 말하지 못했다. 심지어 목사방 피해자는 그런 사진들이 페이크이고 덧붙여진 말들이 거짓인데도 부모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 없었다. 부모가 자신의 말을 믿을지, 김녹완의 말을 믿을지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경찰에 도움을 청했을 때는 ‘텔레그램이라 잡지 못한다’는 답을 들었다. 학교 선생님은? 학폭 피해자가 선생님을 구원 대상으로 여기지 않듯이 성착취 피해자들도 대부분 학교 측에 도움을 청하지 않았다.
그러니 결국 피해자들이 의지할 것은 범죄자들의 약속뿐이었다. 노예짓 열심히 하면 곧 풀어주겠다는 약속. 물론 박사, 목사, 갓갓 모두 인간이 아닌 벌레들이었고 약속은 거짓이었다.
든든한 사회적 관계가 없을 때, 우리는 누군가의 공격에 쉽게 흔들리고 근거 없는 협박에도 오판하게 되며, 심리적 통제에 취약해진다. 어둠 속에서 빛을 열망하던 벌레들은 이 점을 꿰뚫어 보았다. 나는 이 부분이 무엇보다 서늘하게 느껴진다.
어른들의 거짓말이 너무 흔한 세상이다.
이웃을 사랑하라고 말하는 교회는 혐오와 증오를 전파하고, 의원을 끌어내라고 지시한 대통령은 요원이라고 말했다며 하찮은 거짓말을 늘어놓고, 앞으로는 공정과 정의를 외치지만 뒤로는 불평등과 특권을 옹호하는 어른들이 가득하다. 요즘 어린 아이들은 '7세 고시'라는 것에 내몰린다는데, '이게 다 너를 위한 거'라는 부모의 약속을 아이들은 진심으로 받아들일까?
그럼에도 어른들은 자신을 믿으라고 말한다. 딥페이크나 성착취 협박을 받으면 가장 먼저 부모님께 말하고, 학교 폭력은 선생님께 신고하라고 말이다. 피해자들이 늘 이런 말을 들으면서도 범죄자들의 약속을 믿을 수밖에 없는 이유를, 그 어른들은 이해하고 있을까. ☀
Q 파일 : 세상의 숨겨진 이면과 우리가 놓친 진실에 대해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