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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Q 파일

'22분' 이후의 시간

by 재원


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나?


윤석열이 파면됐습니다. 상식적인 결과지만 당일에는 여러 걱정이 있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전광훈이나 손현보, 전한길 등 극우 선동가들이 폭력을 부추겨왔기 때문입니다. 서부지법 폭동보다 더한 일이 헌재 앞에서 일어날 거라는 우려가 컸습니다.


하지만 결국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헌재의 결론을 국민 대다수가 받아들였고 폭동은 없었습니다. 이런 잠잠한 전개가 오히려 뜻밖이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서부지법 난동 사태의 충격이 워낙 컸기 때문일 겁니다.


폭동이 휩쓸고 간 서울 서부지방법원


여기에 대해 곰곰 생각해 봤습니다. 저는 그것이 파면 당일 우리가 같은 것을 보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갈라져 싸울 때 사람들은 전혀 다른 것을 보았습니다. 극우 집회에 모인 사람들, 윤석열을 결사 호위하겠다는 사람들의 유튜브에는 각종 음모론이 들끓었습니다.


그중 핵심은 중국군 선관위 침투설이었습니다. <스카이 데일리>라는 극우 미디어에서 시작된 이 음모론은 구체적인 스토리를 담고 있었습니다. 중국 간첩들이 선관위에 머물며 선거를 조작했고, 이들이 체포된 후 평택항을 거쳐 오키나와 주일미군 기지로 압송됐다는 세부 동선까지 짚었습니다.


전부 거짓이었습니다. 이 모든 소설은 미군 관계자라고 주장하는 인물의 제보로 시작됐습니다. 하지만 KBS <추적 60분>이 지난 3월 7일 방송에서 밝혔듯이, 그 '미군 관계자'는 안병희라는 거짓말쟁이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입으로 우파를 위해 가짜 미군 행세를 했다고 고백했습니다.



국민 대다수는 안병희라는 인물의 정체를 알기 전에도 '중국군 선관위 침투설'을 믿지 않았습니다. 사회 경험과 상식에 비추어 선거 조작이 불가능한 일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국민 10명 중 2~3명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그들의 유튜브에는 중국군이 선거를 조작했다는 주장이 가득했습니다. 이런 유튜브를 본 사람들은 기존 매체들이 진실을 숨기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탄핵 선고가 있었던 순간은 달랐습니다. 모두 같은 것을 보았습니다. 문형배 헌법재판관이 읽는 판결문이었습니다. 윤석열의 거짓말을 정확한 언어로 논파한 22분간의 낭독 장면은 모든 국민에게 동시에 전달됐습니다.


"대통령 윤석열을 파면한다"는 말 이후 느끼는 감정이 탄식인지, 환호인지, 안도인지는 사람마다 달랐겠지만, 파면이라는 결론에 이르는 팩트와 논리는 모두 같은 내용을 접했습니다. 계엄이라는 사건을 두고 전혀 다른 논리가 퍼져나갔던 그간의 유튜브는 달랐습니다.

판결의 논리가 치밀하고 설득력 있게 작성된 것도 중요했지만, 그보다 저는 같은 팩트가 전달됐다는 측면이 이후의 수용에 더 중요했다고 생각합니다.


© 연합뉴스


11시 22분 이후


이제 끝난 걸까요? 저는 가장 중요한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거짓말을 퍼뜨리는 극우도, 알코올과 유튜브에 중독된 윤석열도, 무속에 집착하는 김건희도 아닌, 이들보다 훨씬 치밀하며 세련된 이들이 만든 문제입니다. 거짓 정보가 퍼져나가는 알고리즘을 설계하고 그걸 통해 막대한 이익을 얻는 미국 빅테크 기업들의 문제입니다.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소셜 딜레마>에는 구글, 인스타그램 등의 전직 임원이나 연구자들이 등장해 이 기업들의 실체를 폭로합니다. 의식을 낚아채고 체류시간을 늘려 그 사이에 광고를 끼워 넣고 매출을 올리기 위해 얼마나 치밀한 연구가 이뤄지고 있는지 말입니다. 그 이면이 섬뜩해서 다큐를 본 후 SNS 앱을 지웠다는 이들도 많았습니다.


시사인 기사에 따르면, 계정을 새로 만들어 하루이틀 극우 키워드를 검색하니 금세 온 타임라인이 가짜 뉴스로 채워졌다고 합니다. 근거가 없든 개소리든 음모론이든 상관없습니다. 알고리즘은 특정 검색어를 입력하거나 채널을 구독하는 사람들에게 감정적 자극을 줄 가능성이 높은 콘텐츠를 우선 보여줍니다.


<소셜 딜레마>의 한 장면 © 넷플릭스


인간은 감정적 동물입니다. 그 어떤 이성적 접근도 감정에 승리하기 어렵습니다. 이것이 알고리즘 설계의 원칙입니다.


음모론은 알고리즘이 인간을 낚기 위해 즐겨 사용하는 미끼입니다. 사회가 반으로 갈라진 상황에서 음모론은 일종의 진통제 역할을 합니다. 상대를 악마라고 믿고 있는데 그쪽 편에서 나라를 쥐락펴락하면, 어떤 사람들은 숨 쉬는 것조차 고통스러운 느낌을 받습니다. 그럴 때 알고리즘은 "중국군이 들어와 개표 조작을 했다"는 음모론을 내밉니다. 이것은 내가 틀렸다는 고통을 잠시 잊게 해줍니다.


사람들은 정확하거나 올바른 것보다 확실한 것을 좋아합니다. 누군가 진지한 표정으로 목소리를 높이기만 하면 어떤 사람들은 그 확신의 감각에 기댑니다. 알고리즘은 이런 인간의 취약성을 이용해 관객을 유치하고, 극단주의자들은 목소리를 높일수록 주목받으며 슈퍼챗으로 돈을 법니다.



그런 빅테크들은 이미 초국가적 서비스를 제공하며 단일 국가 정부나 기관, NGO 등의 협조 요청은 거들떠보지도 않습니다. 사회를 분열시킬 뿐 아니라 청소년들의 자존감을 떨어뜨리고 전 세계 아동 자살률을 높이는 주범으로 지목되면서도 거의 아무런 제재를 받지 않습니다.


이들에 비하면 윤석열은 그저 어설픈 악동이었습니다. 본인 때문에 총선에서 참패했다는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듣기 편한 말만 해주는 극우 유튜브만 골라 보다가 판단력을 잃고 음모론의 신봉자가 된 것입니다. 윤석열은 알고리즘이라는 거대한 괴물이 배출한 작은 배설물에 불과합니다. 빅테크 알고리즘은 그와 같은 인물들을 거듭 낳을 것입니다.


탄핵이라는 결론에 이르기까지 빅테크의 알고리즘이 작용하지 않았던 유일한 순간은 22분간의 선고문 낭독 시간이었습니다. 우리는 같은 것을 보았고 경합을 거쳐 선별된 양질의 팩트를 전달받았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분열하지 않았고 대체로 같은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22분 이후는 다시 알고리즘의 시간입니다. 이것이 역설적으로 폭력과 분열의 세계를 예고합니다. 그 세계로 돌아가지 않을 방법을 찾아내야 합니다. 저는 이것이 새 대통령이 누구인지보다 더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




Q 파일 : 세상의 숨겨진 이면과 우리가 놓친 진실에 대해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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