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남자
33세 회사원 김정욱 씨는 지난겨울 여자친구로부터 이별을 통보받았다.
결정사를 통해 몇 차례 소개받은 끝에 만난 “외모가 특히 맘에 드는” 여자였다. 그녀를 위해 나름 돈도 많이 쓰고 듣기 싫은 대화소재들도 인내하며 애썼는데, 한 계절만에 문자로 이별 통보라니 납득할 수 없었다.
길었던 외로움만큼이나 심한 미련이 남은 정욱씨는 여친에게 만나서 더 얘기하자고 청했다. 하지만 몇 번의 카톡과 전화 시도 끝에 번호가 차단당했다. 굴욕이었지만 여기서 물러나면 남자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욱씨는 여친이 사는 원룸 근처에 잠복하고 있다가 대화를 요청했다. 몇일만에 마주친 여친은 화들짝 놀라며 휘청였다.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안 쓰던 존댓말까지 쓰며 가달라고 말했다.
정욱씨는 길거리가 좀 민망하기도 하고 둘만 있는 공간에서 설득하고 싶어서 방으로 올라가자며 다가갔다. 여친은 갑자기 소리를 질렀고, 건너편에서 담배를 피우던 덩치 큰 아저씨들이 쳐다보는 걸 보고 단념했다.
나를 왜 거절한단 말인가. 나름 자신이 ‘알파 메일’이라고 생각해 온 터였다. 도대체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갑자기 남자를 싫어하는 귀신이라도 들린 걸까. 그런 생각을 하던 정욱씨의 유튜브에 재회굿을 해준다는 무당들의 영상이 떴다. 무당은 거기 출연한 의뢰인 전 애인들의 프로필을 척척 맞췄다.
정욱씨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그 무당을 찾아갔다. 무당은 떠나간 여자가 아직 너에게 돌아올 가능성이 조금 남아있다며, 더 늦기 전에 재회굿을 하면 효과를 볼 거라고 말했다.
정욱씨는 무당에게 굿값으로 500만 원을 냈다. 무당은 일반인이 굿당에 오면 잡귀에 감길 수 있어서 안 좋다며 정욱씨한테 오지 말라고 했다. 그러더니 재회굿 인증샷을 보내왔다. 바위 위에 (여친이 좋아하는) 코카콜라와 키위, 딸기 같은 과일이 몇 점씩 놓여있는 사진이었다. 무당은 이 바위가 지리산의 영험한 바위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이후에도 여친은 연락이 없었고, 번호를 바꿔서 정욱씨가 거듭 연락하자 스토킹으로 경찰에 신고했다. 정욱씨의 하소연에 무당은 휘—파람을 한번 길게 불더니,
“우리 할머니가 거의 다 됐다고는 하는데... 여자 쪽에 지금 안 좋은 기운이 많아. 터에 음기가 너무 강해. 정욱씨가 사람 살린다 생각하고 굿도 꾸준히 하고 부적도 써야 돼. 이번 고비만 넘기면 결혼까지 쭉 트이니까 기도발 빠지게 의심 같은 거 하지 말구. 내가 우리 용왕 할배 삼신 할매 동자까지 다 불러모을 테니 승부수다 생각하고 1000짜리 큰 판 한번 해보는 거 어때?”
어떤 모녀
여전히 쌀쌀한 바람이 앙상한 나뭇가지를 붙들고 있던 초봄 오후.
머리를 양갈래로 묶고 단정하게 차려입은 예비 초등생 예린이는 엄마 손을 잡고 입시학원에 등록하러 왔다. 이 학원의 넓지 않은 로비에는 아직 부모품에서 떨어지는 걸 불안해하는 앳된 아이들이 가득했다. 뛰어다니며 소리를 지르는 아이, 엄마와 떨어지기 싫어서 우는 아이 등 온통 아수라장이었다.
특이하게도 이 학원의 목적은 성적향상이 아니라 입시 그 자체였다. 입학시험이 극도로 어렵다는 대치동 ‘H 어린이 수학학원’ 입학이 목적이다. 학원 입학을 위한 학원인 셈이다.
엄마는 예린이가 곧 초등학생이 되니 집에서 해온 선행학습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나중에 의대에 가려면, 4학년까지는 중등수학을 떼야하고, 6학년에는 수능 문제를 풀기 시작해야 한다는 게 예린 엄마를 비롯한 이 동네 부모들의 분위기였다.
예린엄마가 이렇게 서두르는 이유가 있었다. 다섯 살 터울의 오빠 예준이 때문이었다. 예준이는 선행이 좀 늦었다. 주변 아이들이 슬슬 의대반에 등록하던 초등학교 4학년 즈음까지 예준이는 중 1~2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조바심에 학원을 늘리고 개인과외까지 시작했고, 주말에는 밤까지 직접 붙들고 앉아서 수학을 가르쳤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예준이는 공부에 집중을 못했다. 밤늦게까지 문제를 풀다가 갑자기 울거나 때로는 시험지를 찢어놓기도 했다. 밤에 잠을 못 잤다고 아침에 눈이 벌게져서 방에서 나오기도 했다.
자연스러운 학업 스트레스라고, 주변 애들보다 뒤처져서 그런 거라고 예준 엄마는 생각했다. “남들보다 앞서가야 공부도 재밌는데... 예린이는 더 피치를 높여야겠어.”
두 남매의 엄마는 만 5세 아이들이 앙앙 울어대는 ‘입시학원’ 로비에서 그렇게 다짐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이것은 최근 있었던 사례들을 약간만 각색해서 써본 이야기입니다. 둘 다 무언가를 팔고 사는 비즈니스에 관한 이야기죠. 앞선 이야기에서 학원은 어린이 고시 상품을 팔고, 뒷 이야기에서 무당은 신굿을 팝니다.
어린이고시와 신굿에는 묘한 공통점이 있습니다. 길을 잃고 불안해하는 사람들에게 확신을 판다는 것입니다.
저성장 시대에 사라지는 일자리, AI 같은 낯선 기술의 급성장, 이에 대응하는 정치적 리더십의 부재 상황은 사람들의 불안감을 키웁니다. 달러 가치가 떨어지면 금값이 오르듯, 불확실한 상황일수록 오래 확실했던 것들 — 학벌과 돈이 더 주목받고 있습니다. 명문대에 가면, 의사가 되면, 일단 굶어 죽지는 않을 거라는 믿음입니다.
그래서 2025년 한국에서는 어린이 고시가 불티나게 팔립니다. 이 고시를 통과하면 학원에 입학할 수 있습니다. 의대나 명문대에 가려면 어릴 때부터 준비해야 한다며, 중고등학교 문제를 어린이들에게 가르치는 학원입니다.
극도로 어려운 문제들은 거의 모든 아이들을 학습 부진아로 둔갑시킵니다. 내 자식이 100점 만점 시험에 20점을 맞아오면 난이도를 떠나서 부모는 사교육에 매달릴 수밖에 없습니다. 한번 들어가면 빠져나가기 힘든 촘촘한 덫입니다.
출생률이 떨어지면서 사교육 업체들은 위기를 맞았습니다. 하지만 전화위복, 이제 불안한 부모들에게 '확신'을 팔아서 큰 돈을 법니다. (학생수가 전년보다 8만 명이나 줄었지만 2024년 사교육비 규모는 29조 원으로 사상 최고치를 기록) 관객이 줄자 15세 관람가였던 영화를 어린이 관람가로 바꿔 가격을 높인 셈입니다.
지난 2월 14일 방영된 KBS <추적 60분>에 따르면, 전국 체인을 거느린 어느 유명 수학학원의 올해 ‘입시’에 응시한 어린이들이 1만 명이 넘었다고 합니다.
이 정도면 대박 상품인데, 그에 못지않게 ‘확실한 위안’을 주는 유망한(요망한) 상품이 또 있습니다.
②편에서 계속...
Q 파일 : 세상의 숨겨진 이면과 우리가 놓친 진실에 대해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