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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보나쓰

몸으로 빚은 아름다움, 삶으로 치른 대가

<국보>를 보고 나서 쓰다.

by 재원


이상일 감독의 영화 <국보>를 봤습니다. 일본 박스오피스에서 실사영화 역사상 최고의 흥행 기록을 세우고 있는 작품입니다. 러닝타임이 길어서 지루하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제 감상으로는 비슷한 시기 개봉한 대작 위키드보다 좋았습니다. 영화를 보고 들었던 생각을 적어봅니다.



기쿠오와 슌스케의 이야기


1964년, 나가사키의 야쿠자 집안에서 태어난 소년 기쿠오는 라이벌 조직의 습격 사건으로 아버지를 잃습니다. 갈 곳 없는 그를 거둬준 사람은 가부키(일본의 전통극, 여성 배역을 남자가 맡음) 명문가의 수장 하나이 한지로였습니다. 기쿠오에게 재능이 있음을 알아본 겁니다.


가부키 세계에 발을 들인 기쿠오는 그곳에서 가문의 정통 후계자이자 동갑내기인 슌스케와 운명적으로 조우합니다. 아무 배경도 없는 이방인 기쿠오와 혈통과 환경 등 모든 것을 가진 엘리트 슌스케, 두 소년은 형제처럼 자라나지만 무대 위에서는 피할 수 없는 경쟁자가 됩니다.


기쿠오(위)와 슌스케의 어린 시절


기쿠오는 천부적인 재능과 사람을 홀리는 요염한 매력으로 온나가타(가부키의 여성 배역)로서 두각을 나타내며 빠르게 관객을 사로잡습니다. 반면, 슌스케는 피나는 노력으로 탄탄한 기량을 쌓아가지만, 기쿠오가 뿜어내는 압도적인 천재성과 아우라에 가려져 뼈아픈 열등감에 시달립니다.


영화는 고도성장기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5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펼쳐지는 두 남자의 엇갈린 운명을 파노라마처럼 펼쳐 보입니다.


R_0020.jpg 가부키 무대에 선 기쿠오와 슌스케


기쿠오의 삶은 파란만장 그 자체입니다. 야쿠자의 핏줄이라는 꼬리표, 끊임없는 스캔들, 그리고 무대 위에서 쏟아부은 열정으로 망가져 가는 육체를 짊어지고 그는 오직 완벽한 아름다움을 위해 삶을 불사릅니다. 슌스케 또한 가문의 무게를 감당하며 기쿠오라는 거대한 벽을 넘어서기 위해 몸부림칩니다.


영화는 환희와 절망이 교차하는 이들의 삶을 따라갑니다. 절대적 아름다움의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 인간이 치러야 하는 고독과 희생의 숭고함을 묵직하게 그려냅니다.


09.jpeg 영화 <국보>의 기쿠오(요지자와 료)



왜 인간은
아름다움을 추구하는가?


일상에 없는 절대적인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기회는 대부분 예술을 통해서입니다. 그런 아름다움을 자기 몸으로 실현해내는 예술가는 기약없는 훈련의 시간을 감수해야 합니다. 엄청난 희생을 감수한 후에 영화 속 만기쿠 할아버지처럼 인간 국보가 될수도 있겠지만, 그 예술의 성취과정에서 경제적 안정, 일상의 즐거움이나 인간관계를 잃게 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인간은 아름다움을 추구합니다. 쪽방에 살면서 생계가 불가능한 수준의 돈을 벌면서, 무명의 예술가로 냉랭한 시선을 감수하며 자신의 낭만을 추구합니다. 모두가 불로소득을 추구하는 시대에 이렇게 돈도 안되는 일에 몰입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이 제겐 특이하게 느껴집니다. 왜 예술은 인간을 무모하게 만들까. 왜 인간은 아름다움을 추구할까.


<국보>는 그런 무모한 예술가들의 자기 완성에 관한 영화입니다. 집에 오는 길에 세희가 영화가 어땠냐고 물어보는데 한두마디 말로 설명할 수가 없어서 한참을 망설이다가 답했습니다. 단순히 '재밌다'라는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많은 먹먹한 감정들로 가득찬 느낌이라고요.


R_0029.jpg 영화 <국보>의 기쿠오


왜 인간은 자신을 괴롭히면서까지 아름다움을 추구할까?


이미 여러 설명이 있습니다. 진화생물학적으로 보면, 아름다움은 생존에 유리한 시그널입니다. 우리가 아름답다고 느끼는 대상에는 대칭이나 균형, 반복적인 질서가 숨어있습니다. 그런 요소들이 무질서하거나 예측 불가능한 것들보다 진화와 생존에 유리하기 때문에 인간은 좋은 감정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즉, 아름답다는 느낌의 실체는 호르몬이라는 거죠.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예술가의 입장에서 보면, 무질서한 자신의 몸, 붓과 색채들, 여기저기 흩어진 음표들, 벽돌이나 나무 같은 자연 상태의 재료들을 고도의 다듬질(혹은 훈련)을 통해 질서 있게 세워내는 과정이 아름다움의 구축이라는 해석이 가능합니다. 그렇게 다듬어진 아름다움에 관객들은 본능적으로 끌리는 것이고요. (우리가 늘어지고 퍼진 사람보다는 정돈되고 다듬어진 육체를 가진 사람을 더 선호하는 이유도 비슷할 겁니다.)


14.jpeg 영화 <국보>의 기쿠오


그렇더라도 <국보>의 주인공들처럼, 자기파괴적으로까지 자신을 몰아붙이면서 완성을 추구하는 예술가는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심리학적인 설명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국보>의 두 주인공들처럼 어릴 때부터 고도의 훈련을 받다보면 예술 외에 삶의 다른 즐거움이나 관계가 적어질 겁니다. 이런 이들에게 예술은 곧 삶 자체이고, 아름다움의 성취와 인정은 자기 존재의 구원이 됩니다. 통제 불가능하고 불안한 세상에서 자신이 만드는 작품만큼은 완벽히 통제하고 있다는 느낌이 위안을 줄 수도 있습니다.


15.jpeg 영화 <국보>의 기쿠오


이런 설명은 주인공 기쿠오에게 적합해 보입니다. 그가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모습은 극단적입니다. 인정의 결핍 혹은 혈통에 대한 열등감, 그로 인해 자신이 살아있음을 증명하기 위해 절박하게 추구하는 병리적 아름다움인 것 같기도 합니다. 집착적인 완벽주의의 해로움이 그의 삶을 갉아먹었다는 생각도 듭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관객들이 그가 달성한 아름다움에 경탄하고 삶을 초월하는 어떤 지평을 엿보게 되었다면, 사람들의 흔한 이기적인 완벽주의와 달리 그 예술적 완벽주의는 충분히 이타적이지 않은가,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기쿠오뿐 아니라 모든 예술가들의 완벽주의가 그렇습니다.


16.jpeg 기쿠오에게 분장을 해주는 슌스케



이타적 완벽주의


이 영화의 후반부, 늙은 기쿠오의 딸은 뜻밖의 순간 아버지를 찾아옵니다. 자신을 버린 아버지는 완벽함을 추구한 끝에 절대적 경지에 오른 후였습니다.


그런 아버지에게 딸은 고백합니다. 아버지가 원망스럽지만, 아버지의 무대를 볼 때 자신은 새로운 세상을 만난듯 행복하다고요. 그 말에 기쿠오는 할 말을 잃은 듯 침묵을 지킵니다.


얻은 만큼 명확하게 잃었고, 성취한 만큼 고통스러웠던 인생사를 선회한 끝에 도달한 어떤 완성의 경지. 그 아이러니가 오래 제 마음을 붙잡고 흔들었습니다. ☀︎





보나쓰 : 주말쯤 좋은 것들을 보고 나서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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