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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보나쓰

너를 삼켰다

<투게더>를 보고 나서 쓰다.

by 재원


올해 선댄스 영화제에서 큰 화제를 모은, 마이클 생크스 감독의 영화 <투게더>를 보았습니다. 메시지는 다르지만 <서브스턴스>를 생각나게 하는 바디 호러물이었습니다.


저는 질문이 있는 작품을 좋아합니다. 창작자가 그 작품을 구상하게 만든 어떤 질문이 제 안에서 오래 공명하는 느낌을 좋아합니다. 의미 있는 질문이 실린 이야기가 폭주 기관차처럼 달리는 작품에서는 눈을 뗄 수 없죠. 게다가 사랑에 관한 질문이라면? 이런 매력적인 영화는 피할 수 없습니다.


R_01.jpg 영화 <투게더>의 주연 앨리슨 브리, 데이브 프랭코


누군가를 사랑하면 그 사람이 알고 싶어집니다. 가능한 많은 시간을 함께하며 그의 모든 면을 살펴보고 싶어집니다. 결혼을 비롯한 진지한 미래를 고민할수록 더욱 그렇습니다.


하지만 타인을 완전히 안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아무리 오래 만나더라도, 낭만적인 이상을 품고 결혼에 도달하더라도 여전히 상대방은 변수입니다.


화분 속의 꽃이나 들판의 얼룩말을 사랑한다면, 어쩌면 그 대상을 완전히 인식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인간은 자의식이 있고 주변의 영향을 받으며 계속 변합니다. 계속 변하는 존재를 완전히 인식한다는 것은 점술가의 영역인데, 우리 대부분에겐 안타깝게도 예지력이 없습니다. 사랑에 있어 불안은 상수입니다.


R_02.jpg "우리는 뛰어들었다(We took the plunge)"... 이후는?


내가 아닌 것, 내가 예측할 수 없는 어떤 이질적인 것 - 즉 타자성에 대한 불안감은 인간의 본능이며, 인간의 이런 특징은 여러 사회현상으로도 나타납니다.


전 세계에서 성소수자나 난민이 혐오의 대상이 되고, 일본에서는 재일조선인을 배척하고, 한국에서는 대림동의 조선족을 두려워하는 것도 비슷한 맥락입니다. 내게 익숙지 않은 것, 내가 모르는 것이 불안을 자극하는 겁니다.


불안이 커지면 외부자들의 범죄율이 내국인에 비해 낮다는 ‘팩트’를 아무리 제시해도 무용지물입니다. 한 건의 가짜뉴스나 우발적 사고만으로도 두려움은 시한폭탄처럼 점화되죠. 타자성은 무의식에 잠재된 두려움의 촉수를 쉽게 자극합니다.


R_03.jpg 영화 <투게더>


멀리 있는 대상이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사람, 같이 미래를 꿈꾸는 사람이라면 타자성은 더 큰 불안요소가 될 수 있습니다. 그가 내 인생에 미치는 영향이 매우 클 테니까요.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사랑하는 상대를 완전히 안전하게, 예측 가능하게, 내가 완전히 통제 가능하도록 만드는 방법은 없을까요?


영화 <투게더>는 한 가지 확실한 방법을 제시합니다. 상대를 나 자신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섹스할 때 잠시 한 몸으로 뒤엉키는 정도가 아니라, 말 그대로 상대를 내 바디와 내 정신으로 삼키는 거죠.


R_04.jpg 영화 <투게더>


영화 <투게더>에는 이런 신념을 가진 집단이 등장합니다. 미국의 어느 음산한 마을, 의문의 숲속을 헤치고 들어가면 식물들이 특이하게 뒤엉켜있는 굴이 있습니다. 거기서 떨어지는 수액을 흡수하면 동물이든 식물이든 서로 강렬하게 끌리다가 몸이 섞이기 시작합니다. 이것을 발견한 사람들은 여기에 사랑의 이상과 불안을 투영합니다.


그들은 약속합니다. 누군가를 사랑하고 평생을 함께하고자 약속할 때, 이 수액을 마시고 한 몸이 되기로... 그래서 서로의 모든 타자성을 제거하고, 하나의 몸과 하나의 정신이 됨으로써 근원적인 불안을 제거하기로 말입니다.


놀라운 전개를 거듭하는 영화는 결국 마지막 장면에서 주인공 커플이 하나가 된 어떤 괴이한 형태를 보여줍니다. 사랑하는 이들이 속삭이는 간지러운 글귀로서의 ‘하나’가 아니라 말 그대로 나와 동일한 존재가 된 모습이죠. (저는 여러 차례 시각적인 충격이 있었는데 직접 보시고 확인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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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고 이런 질문이 떠올랐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와 동일한 존재가 된 것, 완전히 통제 가능한 존재가 된 것을 사랑의 완성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하지만 이것은 사랑이라기보다는 자기애라고 표현하는 것이 맞을 것 같습니다. 타인과 연결되지 못하고 결국 자신과 동일한 것을 사랑할 뿐이라면 외로울 수밖에 없겠지요. 마지막 장면이 유독 쓸쓸하게 느껴졌던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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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타인을 사랑하는 모험에 나섭니다. 타인과 관계 맺음으로써 외로움을 해소하고 성장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또한 본능이기에 사람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누군가의 타자성을 끌어안습니다.


알랭 드 보통의 말대로 그것은 어느 정도 도박과 비슷합니다. 거의 모든 패를 모르는 상태에서 인생의 가장 중요한 결정을 해야 한다는 사실에 삶의 아이러니와 즐거움이 있지 않은가 생각해 봅니다.


"결혼 : 자신이 누구인지 또는 상대방이 누구인지를 아직 모르는 두 사람이 상상할 수 없고 조사하기를 애써 생략해 버린 미래에 자신을 결박하고서 기대에 부풀어 벌이는 관대하고 무한히 친절한 도박."

(알랭 드 보통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 65p)








보나쓰 : 주말쯤 좋은 것들을 보고 나서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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