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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보나쓰

부활하고 사라지는 심청

국립창극단 <심청>을 보고 나서 쓰다

by 재원


국립창극단의 창극 <심청>을 9월 초에 세희 덕분에 함께 봤다. 늦더라도 이때 느낀 바를 꼭 기록해두고 싶어서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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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작품을 영화관에서 볼 때와 집에서 OTT로 볼 때, 같은 걸 봤다고 말할 수 있을까?


어떤 콘텐츠를 소비했다는 관점으로 보면 틀림없이 같은 걸 본 셈이다. 그러나 예술작품을 관객이 해석하고 받아들이는 과정 자체가, 그 관객의 세계 안에 새로운 작품을 창작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해 본다면? 양쪽의 관람자에게 남은 작품은 완전히 다른 것이 될 수도 있다.


즉 예술 작품이 마트 매대에 놓인 먹거리처럼 먹고 소화하고 끝나는 콘텐츠가 아니라, 사람들 각자의 시선으로 재해석되며 각각의 세계에서 완성되는 일종의 건축물이라면, 예술 작품은 보는 태도에 따라 수천수만 개의 형태로 다시 세워질 것이다.


지금까지는 이론적으로만 이런 생각을 해왔던 것 같다. 하지만 국립창극단의 <심청>을 보고 나서는 가장 뻔하다고 생각했던 고전조차도 해석 과정에서 완전히 다른 작품이 될 수 있음을 느꼈다.


국립창극단 <심청>의 한 장면
국립창극단 <심청>의 한 장면, 다양한 세대의 심청이 등장한다.


우리가 아는 효녀 심청의 이야기는 이렇다. 심청은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려고 자신의 몸을 바쳐 공양미 300석을 시주하고, 그 효심에 감복한 용왕이 심청이를 왕후로 환생시켜 다시 아버지를 만나게 했다. 이 이야기 속 심청은 부모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아낌없이 버리는 효의 화신이고, 그녀는 가부장을 위해 몸을 팔고 남성 권력자(용왕, 국왕)의 힘을 빌어 효를 완성한다.


어릴 때나 국어책에서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는 별 감흥이 없었다. 하지만 조금 삐딱하게 바라보면, 미성년 소녀가 몸을 바치는 행위에 눈감고 이득을 취하는 남성(심봉사나 장사치들, 주변 어른들)을 비롯해 부끄러움을 모르는 세상 사람들에 대한 매서운 비판일 수도 있었다.


독일에서 활동하는 창작자 요나김은 한국의 주요 창극을 재해석하는 작업을 근 몇 년간 해왔다. 그러다 첫 작품으로 선택한 심청을 거듭해서 읽는 과정에서 이와 같은 재해석의 가능성을 찾아냈다.


요나김 또한 한 명의 독자로서, 그의 세계에서 심청이 재건축된 것이다.


R_04.jpg 국립창극단 <심청>의 한 장면, 대형 스크린으로 배우들의 근접샷을 보여준다.


심청을 재창조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것은 환생 부분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였다.


지금 고전 심청전을 읽으면 환생 부분이 가장 애매하다. 가부장을 위해 몸을 판 딸이 끝내 가부장 끝판왕(용왕, 국왕)의 도움으로 가부장에 대한 충성을 완성하는 장치가 환생이다. 요즘 같으면 드라마든 웹툰이든 이런 스토리를 썼다가는 눈이 높아진 관객들의 뭇매에 조기 종영을 당하리라.


요나김은 이 문제를 어떻게 풀었을까? 그가 재창조한 창극 <심청>에서는 환생이 제거됐다. 심청은 극 속에서 환생하지 않고 놀랍게도 극 밖으로 뛰쳐나간다. 고결한 희생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부끄러움을 일깨운 후에, 아예 무대 밖으로 탈출하는 것이다.



다소 충격일 수 있는 이런 전개는 마치 —


여러분, 딸(혹은 딸이 상징하는 세상의 박해받는 사람)들을 죽이는 악인들이 벌 받은 뒤 막이 내리고 여러분은 안전하게 현실로 돌아가려 하셨나요? 천만해요, 너무 쉽게 위안을 얻고 부끄러움을 잊으시면 안 되죠. 극장 밖에서 변한 건 아무것도 없어요. 정신 똑바로 차리세요 —


라고 극 속의 누군가가 소리치는 것 같았다. <심청>을 2025년에 재해석한 연출가의 의도가 이것 아닐까.


R_06.jpg 국립창극단 <심청>의 한 장면


우리 모두가 어릴 때부터 들어온 심청, 모두가 다 아는 뻔하고 익숙한 효 스토리가 전복될 때 느껴지는 낯섦과 충격은 강렬했다. 9월 밤 국립극장에서 창극을 본 관객들은 각자의 가슴속에 전혀 새로운 심청전을 지어내서 가져갔으리라.


또한 그런 영감들이 시대 변화와 연결되며 또 다른 예술 작품으로 탄생할 것이다. 이렇게 생물처럼 움직이며 새로운 형태로 만들어지는 예술의 창작과정에 참여하는 것은, 넷플릭스에서 어떤 스펙터클한 시리즈를 보는 것보다 값진 체험이었다.


국립창극단에서 이 공연을 며칠 안 했지만 반응은 매우 뜨거웠다. 상업 뮤지컬처럼 내년 중 장기 공연을 기대하며 글을 남긴다. 이 시대에 너무나 적합한 <심청>이기에 그렇다.




보나쓰 : 주말쯤 좋은 것들을 보고 나서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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