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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보나쓰

울지 말고 스탠드업!

<꽤 낙천적인 아이>를 보고 나서 쓰다.

by 재원


사람들이 많이 모르지만, SBS 라디오에서 무려 일요일 새벽 6시에 하는 책 방송이 있습니다. 김선재 아나운서가 진행하는 <책하고 놀자>라는 한 시간짜리 프로그램인데요. 사장님이 들으면 서운하시겠지만 우리 회사에서 만드는 프로그램 중에 빠짐없이 챙겨 듣는 (거의 유일한) 프로그램입니다. 아 물론, 일요일 새벽에 일어나서 듣지는 않아요. 여기 페이지에 들어가면 팟캐스트처럼 들을 수 있습니다. 맞아요. 영업하는 겁니다.


이 방송에 작가가 직접 출연해서 자신이 쓴 책을 소개하는 <내 책 어때요>라는 코너가 있습니다. 자기 책을 써서 출판까지 해낸 사람들은 뭔가 대단한 점이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 흥미로운 사람들이 직접 나와서 김선재 아나운서와 이런저런 얘기를 급하게 (왜냐면 방송분량이 짧아서) 주고받는 걸 듣고 있자면 매우 재밌으면서도 조금 슬퍼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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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 입장에서 책 방송은 돈이 안된다며 거의 아무도 라디오를 듣지 않는 주말 아침 시간대에 고작 한 시간 편성해 놓은 상황과, 그럼에도 매주 알찬 책들을 꼬박꼬박 읽고 밀도 있게 소개하는 제작진+진행자의 정성과, 누가 많이 듣지 않아도 방송에 나와 자신이 쓴 책을 구구절절 소개하는 작가들의 멋짐이 마음속에 복잡한 감상을 불러일으킵니다. 그 아이러니가 제가 이 프로그램을 좋아하는 이유인 것 같습니다.


그러다가 최근에 <꽤 낙천적인 아이>라는 책을 낸 원소윤 작가가 나온 방송을 들었습니다. 이미 나름 화제에 오른 책이라는데 (역시나 시중의 관심사와 거리가 먼 저는) 몰랐어요. 원소윤 작가와 김선재 아나운서가 이야기하는 걸 듣고 있자니 작가와 책에 대한 궁금증이 생겼습니다.


R_02.jpg <내 책 어때요> 방송을 마친 원소윤 작가, 김선재 아나운서


보통 자기 책씩이나 낸 사람들은 본인의 세계와 책 내용에 대한 벅찬 확신으로 가득 차있을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근데 2주 만에 3쇄라는 (요즘 출판시장 감안하면) 화려한 질주?를 하고 있는 원소윤 작가는 그런 자기 확신형 캐릭터와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뭔가 조용히 구시렁구시렁하면서도 한 번씩 웃긴, 평범하고 조용한데 친해지면 재밌는 친구 느낌이었어요.


듣다 보니 무려 이분 직업이 스탠드업 코미디언이라고 하더군요. 찾아보니 서울대 종교학과를 졸업하고 (이걸 밝히는 이유는 그의 개그 소재로 자주 쓰이기 때문입니다) 어찌어찌하다가 스탠드업 코미디를 시작하고 무대에서 관객들을 쥐락펴락 하는 쇼를 하신다네요. 사람들과 떠들썩하게 어울리는 것을 싫어하는 내향인의 직업이 스탠드업 코미디언이라, 흥미로웠습니다.


인물이 궁금하면 그의 글이나 말을 찾아보게 됩니다. 그래서 <꽤 낙천적인 아이>라는 책을 찾아서 읽어보았고, 원소윤 작가가 나오는 쇼츠나 유튜브 영상도 찾아봤습니다. 다 재밌었어요. 무엇보다 이분이 쓴 글이나 코미디를 보고 나니 한 가지 질문이 떠오르더군요. 유머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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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과 대화하다 보면 뭔가 웃긴데 불쾌한 순간들이 있습니다. 주로 누군가를 비하하거나 그 자리에 없는 사람을 조롱하는 경우죠. 때로는 별로 웃기지 않은데 상대가 웃기려 했다는 의도를 읽고 몇 번 허허해주기도 합니다. 이러고 나면 웃느라 애를 써서 힘이 빠집니다.


<꽤 낙천적인 아이>는 조금 다릅니다. 이 소설은 작가의 자전적인 이야기인데요. 읽다 보면 자주 웃게 되고 힘을 얻는 느낌이 납니다. 아끼는 가족을 잃거나 죽음에 가까운 위기를 겪으면서도 그런 고통이 자신을 잠식하는 걸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 결연하게, 피식, 허를 찌르는 웃기는 말을 내뱉는 주인공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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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들면 심각해지고 더 힘들면 와장창 무너지는 게 자연스러운 전개인데 이 순간에 웃는다고? 오히려 여기에서 진정한 강함이나 위안이 느껴졌습니다. 문학평론가 박혜진의 멋진 문장을 빌려오자면 "이 소설의 바닥에는 가족을 드리운 죽음의 그림자가 있고 그림자에서 빛을 학습하는 아이의 성장이 있다"는 것이죠.


책을 내고 인기를 얻어서 단독 스탠드업 코미디쇼 전석 매진을 하는 게 꿈이었다던 원소윤 작가님은 얼마 전 그 꿈을 이루었다고 하네요. 이삼십 대 여성이 겪어온 한국 사회의 차별과 혐오를 정교하게 이해하면서도 날카롭기보다는 웃기는 언어로 사람들의 막힌 속을 뚫어주는 현실 속 원소윤 작가님. 그의 스탠드업 코미디쇼도 곧 가보려고 합니다. 다녀오면 후기를 남길게요. ☀︎




보나쓰 : 주말쯤 좋은 것들을 보고 나서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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