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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보나쓰

달리는 파자마 혁명가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를 보고 나서 쓰다.

by 재원


연휴가 길었습니다. 폴 토마스 앤더슨(PTA)이나 박찬욱처럼 거장으로 손꼽히는 감독들의 영화가 상영관에 있어서 긴 영화들을 연이어 보았습니다.


둘 중에 훨씬 강렬한 느낌으로 다가왔던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에 대한 생각을 먼저 적어봅니다.




제목은 전쟁 후의 또 다른 전쟁, 계속되는 수많은 전쟁.. 정도로 해석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제목처럼 이 영화는 주인공들이 겪는 끝없는 전쟁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프렌치 75라는 급진적 좌파 혁명조직에 속한 폭파 전문가입니다. 감금된 이민자들을 해방시키고 공공기관에 테러를 일으키던 밥은, 혁명 동지인 퍼피디아(테야나 테일러)와 사랑에 빠지고 딸 윌라를 얻습니다.


R_18.jpg 위장하고 공공기관에 잠입하는 퍼피디아와 밥
R_08.jpg 만삭의 몸으로 총기 훈련을 하는 퍼피디아, 이 영화에서 가장 강렬한 이미지였다.


누구보다 열의에 불타던 퍼피디아는 자신이 위기에 몰리자 조직을 배신하고 가족도 버립니다. 남겨진 밥은 딸을 키우면서 자연스레 조직과 멀어지고 혁명에 대한 열의도 식습니다.


그렇게 16년이 흐르고, 밥은 술과 마약에 찌든 배 나온 중년이 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떤 사건 때문에 딸 윌라가 사라지고 밥은 좌충우돌하며 딸을 찾아 떠납니다. 여기서부터 블랙코미디 같으면서도 속도감 있는 추적극이 시작됩니다.



희화화의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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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게 이 영화가 흥미로웠던 건, 혁명을 꿈꾼다는 사람들의 과격하기만하고 초라하기 그지없는 모습 때문이었습니다. 영화 속 프렌치 75는 말썽쟁이 악동 같은 모습입니다.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은 자본주의의 어두운 측면이나 사회적 불평등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를 꾸준히 만들어왔습니다. 이런 감독이 왜 자본주의와 싸우는 조직을 희화화해서 그렸을까? 이 영화를 보고 생각해 본 질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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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뿐 아니라 유럽, 우리나라나 일본 등에도 한때 급진적인 폭력 혁명을 꿈꿨던 좌파 그룹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인류 역사를 계급투쟁의 과정으로 바라보는 마르크시즘 역사관에서 영향을 받아 폭력 혁명을 꿈꿨습니다.


당시 급진 좌파들은 자본가 계급이 노동자를 끝없이 쥐어짜 자신들의 배를 불리는 악마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국가는 노동자들의 시위나 항의를 군경을 이용해 짓누르고 자본가를 제도적으로 보호하는, 지배계급의 착취 기구라고 이들은 바라봤습니다.


R_13.jpg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신문 만평 (1883, 미국 의회도서관)


이런 생각을 가진 급진 좌파들 입장에서는 폭력 혁명이 불가피했습니다. 자본가나 정치 엘리트들한테 좋게 말한다고 해서 그들이 순순히 부와 권력을 내놓을 가능성은 없으니까요.


그래서 테러가 시작됩니다. 자유와 해방의 명분으로 정치인을 암살하거나 공공기관과 은행을 폭파하죠. 이를 통해 국가 시스템을 무너뜨리고 엘리트가 독점한 사회에 혼란을 일으킨다는 전략입니다. 영화 속 '프렌치 75'가 벌이는 각종 테러가 이런 맥락입니다.


R_19.jpg 프렌치 75가 은행을 폭파하는 모습


이런 전략은 지금 보면 다소 황당합니다. 하지만 테러리즘까지는 아니어도 어떻게든 사회 구조를 전복해야 한다는 생각에 당시 많은 사람들이 공감했습니다. 평범한 사람들의 삶은 너무 비참한데 권력과 부를 가진 이들의 욕심은 끝이 없어 보였으니까요.


게다가 미국이 냉전 시기 세계 곳곳에 친미 독재정권을 세우고 정치적 자유를 박탈한 상황은 각국에 민족주의적 분노를 일으켰습니다. 우리나라에서 박정희나 전두환이 그러했듯 불의한 권력에 저항하는 사람들을 죽이거나 가두는 상황은 좌우를 떠나 많은 이들에게 깊은 울분을 일으키기도 했죠.


그렇게 각성한 대중이 대규모 항쟁을 일으킨 한국에서는 인권과 민주주의 수준이 비약적으로 높아졌습니다. 하지만 체제 내에서의 진보가 아니라 자본주의 자체를 전복해야 한다고 믿는 '프렌치 75'같은 사람들도 일정 비율로 대부분의 국가에 있었습니다.



제가 얼마 전 <9월 5일: 위험한 특종>이라는 영화를 소개했었습니다. 그 배경이 1972년 뮌헨 올림픽 테러입니다. 이스라엘 선수단을 살해한 검은 9월단은 독일의 급진 좌파인 바더 마인호프 그룹과 깊이 이어져 있었습니다. 선수들을 인질로 잡고 경찰과 대치하던 '검은 9월단'은 수감 중이던 바더 마인호프 그룹의 리더 두 명을 석방할 것을 요구하기도 했죠.


이들과 비슷한 일본의 적군파는 국제공항에서 총기를 난사하거나 여객기를 납치하는 테러를 일으켜서 수많은 사람들을 죽였습니다. 1972년에는 내부 사상검증을 이유로 조직원들이 서로를 고문하거나 때려서 12명을 살해하는 충격적인 사건을 일으키기도 했죠.


중국은 공산주의 국가여서 다소 맥락이 다르지만, 자본주의에 물든 반혁명분자를 색출한다는 명분으로 교수, 교사, 기업인, 관료 등을 고문하거나 공개처형 했습니다. 문화대혁명이라는 번듯한 이름으로 10년여간 벌어진 참극에서 사망자는 적게는 150만 명, 최대 2천만 명 이상으로 추정됩니다.


R_25.jpg 문화대혁명 당시 관료가 공개 비투(批鬪)를 당하는 모습 (1966)


휴고상 수상작이자 넷플릭스 시리즈로도 만들어진 류츠신의 소설 <삼체>의 배경이 바로 1970년대 중국의 문화대혁명입니다. 주인공이 삼체 세계에 지구의 좌표를 노출시켜 인류를 몰살 위기에 처하게 만드는 이유가 바로 문화대혁명 과정에서 느낀 인류에 대한 깊은 절망감이었습니다.


급진 좌파가 일으킨 사건들이 전 세계 현대사에서 워낙 충격적이었기 때문에, 여기서 파생되는 인상들이 지금까지도 여러 창작자를 통해 이야기로 태어나는 셈입니다.


R_28.jpg <삼체>에서 외계인에게 지구 좌표를 송신하는 안테나



망상의 씨앗


인간을 위해 좀 더 나은 사회를 만들려는 사상을 고민하고 실천했던 사람들이, 어느 시점부터는 인간을 죽여서라도 자신들의 생각이 옳음을 입증하겠다고 마음먹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저는 그알 같은 시사 프로그램을 만들면서 인간의 이상한 행동 끝에 벌어진 기이한 사건들을 여러 차례 접해왔습니다.


왜 그랬을까?라는 질문을 수없이 던지다가 그 끝에서 소속감이라는 말로 많은 현상을 설명할 수 있었습니다. 같은 소속의 사람들에게 인정받기 위해서, 커다란 손해를 감수하거나 심지어 사람을 죽이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모든 인간은 다양한 결핍이 있고 남들과 자신을 비교하며 소외감과 외로움을 느낍니다. 이때 작게는 가족이나 회사, 스포츠팀, 온라인 커뮤니티, 넓게는 정당이나 출신 지역, 국가 등 소속감을 주는 정체성을 가지면 사람들은 자신이 채워지고 고양되는 느낌을 받습니다. 소속을 통해 분리불안을 해소하는 겁니다.


R_27.jpg 넷플릭스 <삼체>에서 문화대혁명 당시 주인공의 아버지를 숙청하는 장면


저는 사회의 전복을 꿈꾸었던 급진적 좌파들도 이와 비슷한 심리적 충동으로 움직였다고 생각합니다.


한때는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사회적 약자들을 생각하는 마음으로 위험을 감수하고 불의한 권력에 맞섰겠지만, 계속 실패하고 고립되면서 자신들 조직 내부의 인정만이 그들을 움직이는 동력이 됐을 겁니다.


자기들끼리만 폐쇄적으로 교류하다 보니 정보가 왜곡되고 판단 기준이 망가집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어느 조직의 일원이라는 점이 정체성의 전부가 되고, 그 안에서 인정받고자 점점 과격한 행동을 벌이는 나선효과가 일어납니다.



소속감이 정체성으로


이렇게 한번 소속감이 정체성을 대체하면 벗어나기 힘듭니다.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에서 밥은 혁명 조직을 떠나고 16년 후에도 흑백 혁명 영화를 돌려보며 자신의 소속감을 확인하죠. 해진 체크무늬 파자마를 입고 연신 술을 들이켜면서요. 그렇게라도 고립된 자신을 세상과 연결하고, 의미있게 추구할 가치가 사라진 삶을 위안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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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은 끝내 딸 윌라를 찾아냅니다. 밥이 윌라를 구해내는 것이 아닙니다. 윌라는 기지를 발휘해 스스로 위기에서 벗어납니다. KKK단이나 요즘 미국의 극우 인종주의자들을 연상케 하는 '크리스마스 모험가 클럽'의 추적을 통쾌하게 따돌리죠.


밥은 자신이 가장 증오하던 자의 핏줄인 윌라를 수용하고 윌라도 친부가 아니었던 밥을 받아들입니다. 자신의 정체성과 다르더라도 서로를 사랑으로 받아들이는 겁니다. 이런 과정은 정치적 대립이 극심한 시대의 스트레스를 어떻게 해소해야하는가?에 관한 감독의 답으로 여겨졌습니다.


R_12.jpg 딸 윌라가 태어났던 순간
R_10.jpg 혁명가들, 그리고 극우 인종주의자들의 다음 세대인 윌라


저는 이 영화가 소속감이라는 심리적 감옥에 갇힌 밥이 딸의 실종을 계기로 문을 열고 나오는 이야기로 생각됐습니다. 그렇게 세상에 나와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며 스스로 성장하는 과정인 거죠. 밥의 경로를 따라 각자가 자신의 정체성에서 조금씩 벗어나기를 바라는 감독의 마음이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자신의 정체성을 극단적으로 고집하는 사람들이 충돌하며 사회 곳곳이 불안해지고 있습니다. 이 영화를 보며 각자가 갇힌 정체성의 감옥은 무엇인지 돌아보았으면 합니다. ☀︎




보나쓰 : 주말쯤 좋은 것들을 보고 나서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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