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임 스틸 히어>를 보고 나서 쓰다.
인천의 독립영화관 영화공간주안에서 <아임 스틸 히어>를 보았습니다. 올해 미국 아카데미 국제장편영화상을 비롯해 다수의 영화제에서 수상하며 명작의 반열에 오르고 있는 작품입니다. (소개 기사)
영화를 보고 난 뒤, 제목이 <아임 스틸 히어(I’m Still Here)>가 아니라 <파이바 가족의 행복했던 한 때>여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감독(바우테르 살리스)은 한 가족의 일상을 마치 오래된 사진첩을 펼치듯 정성껏 들여다봅니다. 집에서 바로 이어지는 모래사장과 바다, 해변을 가득 채우는 친구들의 웃음소리, 이웃이 아무렇지 않게 드나드는 문턱 없는 집의 모습 등.
모든 것이 이 영화에서는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온전한 기쁨으로 빛납니다. 이 장면들을 보면 천국이라는 것이 저토록 소박한 공동체의 풍경 속에 숨어 있는 게 아닐까 싶어집니다.
그런데 가족의 구심이었던 아버지의 실종으로 그 천국이 산산이 무너져 내립니다.
사람들은 흔히 불행을 절대적 결핍에서 찾지만, 사실 진짜 고통은 상대적 상실에서 더 강하게 오기 마련입니다. 어제는 있던 것이 오늘은 사라지고, 한때는 함께였던 사람이 이제는 어디에도 없다는 사실 — 그 부재가 불행을 더 깊고 선명하게 각인시킵니다.
이 영화가 그려낸 것은 바로 그 전과 후의 차이, 아버지가 있었던 풍경과 아버지가 사라진 풍경 사이에 놓인 돌이킬 수 없는 간극입니다. 그 간극이야말로 이 영화의 주제의식이며, 역사적 아픔을 관객에게 선명히 전달하는 장치입니다.
대부분의 역사적 비극을 다룬 영화들은 악의 얼굴을 드러내는 데 힘을 쏟습니다. 가해자를 나열하고 그들이 저지른 폭력을 강조함으로써 관객의 분노와 카타르시스를 부추깁니다.
그러나 이 영화는 다른 길을 택합니다. 가해자의 프로필은 희미하고 악행의 동기는 구태여 설명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감독은 철저히 피해자의 일상, 즉 남겨진 사람들의 삶에 초점을 맞춥니다. 관객이 마주하는 것은 잔혹한 폭력의 현장이 아니라 폭력으로 인해 사라져버린 평범한 시간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영화는 죽음보다도 더 고통스러운 실종의 시간을 포착합니다. 확인되지 않은 죽음, 이름 붙일 수 없는 부재, 그 끝없는 기다림이 한 가족을 어떻게 변모시키는지를 수십 년의 세월에 걸쳐 집요하게 따라갑니다.
그러나 영화가 그리는 것은 단지 상실의 그림자가 아닙니다.
실존 인물인 주인공 유니스 파이바는 남편의 실종 이후 절망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마흔아홉에 법학을 공부해 변호사가 되었고, 이후 브라질 사회의 약자들을 위해 싸우는 법정의 목소리가 되었습니다.
그녀의 아들 마르셀로는 작가가 되어 아버지의 부재를 기록했고, 그 기록은 책이 되어 세상에 증언으로 남았습니다. 그리고 마르셀로의 친구이자 세계적 감독인 바우테르 살리스가 그 책을 영화로 만든 것이 <아임 스틸 히어>입니다.
군부 독재로 파괴된 한 가정의 역사가 문화와 예술 속에서 되살아난 셈입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보고 여러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족과 함께 행복했던 인생의 절반, 이후 남편의 실종과 사망, 법을 공부하고 인권 변호사로 사회적 약자의 편에 서온 삶... 그리고 그 끝에서 유니스는 치매에 걸려 점차 기억을 잃어갑니다.
남편의 이름을 끝내 지워버린 국가처럼, 병은 그녀 안의 역사를 조금씩 지워나갑니다. 그러나 삶이란 무엇을 기억했는가가 아니라, 무엇을 남겼는가로 평가되기 마련입니다.
유니스는 피해자의 자리에 머무르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남편을 납치하고 살해한 권력에 맞서 증언과 기록을 남겼으며, 무엇보다 자신이 보호한 수많은 국가폭력 피해자들의 삶 안에 치유의 흔적을 남겼습니다.
아임 스틸 히어(I’m Still Here)라는 제목은 결국 그 모든 여정을 압축합니다. 사라졌으나 남아 있고, 잊혀지나 여전히 존재하는 것들. 이 영화가 오래도록 마음에 남는 이유가 바로 그 역설 속에 있습니다. ☀︎
보나쓰 : 주말쯤 좋은 것들을 보고 나서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