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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보나쓰

마지막 한 줄의 원칙

<9월 5일: 위험한 특종>을 보고 나서 쓰다.

by 재원


<9월 5일 : 위험한 특종>을 보며 들었던 생각을 적어봅니다. 스포일러는 없고요, 한 줌의 영화 얘기에 산더미 같은 제 얘기입니다.




1972년 독일 뮌헨에서 올림픽이 열립니다. 이 시기는 서독과 동독이 나뉘어 있었고, 미국과 소련 사이 냉전의 기세가 서늘했습니다. 베트남 전쟁도 한창이었고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갈등도 격렬했지요. 평화가 낯설었던 때랄까요.


이런 상황에서 열린 평화와 화합의 축제, 올림픽입니다. 주최국 서독 입장에서는 나치의 오명도 씻어내고 동독에 화해의 손길을 내미는 등 여러 정치적 의미가 있었습니다. 전 세계가 잠시나마 냉전의 한기에서 벗어나는 시간이었던 셈입니다.



당시에는 민간인을 대상으로 하는 초국가적 테러가 드물었습니다. 게다가 서독은 내심 전 세계에 컬러 TV로 중계되는 자국의 모습에서 나치를 연상시키는 무장 경찰을 보여주길 꺼렸습니다. 그러다 보니 경비가 취약해졌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팔레스타인의 검은 9월단 테러리스트들이 나타납니다. 이들은 선수로 위장해 스포츠 가방에 총을 숨기고 손쉽게 올림픽 선수촌의 이스라엘 숙소에 침투합니다. 그리고 몸싸움 끝에 탕, 총이 한 발 발사됩니다.


이 영화는 총성과 함께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당시 촬영된 실제 <검은 9월단> 테러리스트의 모습


올림픽에서 발생한 초유의 인질극은 뉴스 가치가 매우 높습니다. 제작진들은 휴식도 반납한 채 현장을 주시합니다.


하지만 경찰의 움직임까지 생중계하자 테러리스트들이 TV로 이를 보고 전략을 바꿉니다. 미디어가 테러리스트들을 도운 셈입니다. 급히 카메라를 끄고 수습에 나서는데, 잠시 후에는 '인질 전원 구출'이라는 소식이 들려옵니다. 정보의 진위가 의심스러운 상황. 하지만 사실이라면 세계가 기다리는 특종이니 지체할 틈이 없습니다.


모든 것이 순간의 판단을 요구합니다. 언론의 신중함과 미디어의 흥행 사이에서 초 단위로 결정을 내려야만 합니다.


영화 <9월 5일: 위험한 특종>의 장면


저는 저널리스트들의 고민이나 미디어의 속내를 소재로 하는 영화나 드라마를 거의 빼놓지 않고 봅니다. 영화의 소재가 될만한 멋진 저널리스트들로부터 영감을 받거나 힘을 얻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이 영화 속 인물들을 보면서는 저 자신을 돌아보게 됐습니다. 사건을 다루는 기자나 피디라면 누구나 비슷한 고민을 해보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끔찍한 특종


2023년 부산에 정유정이라는 23세 여성이 또래 여성을 잔혹하게 살해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살인자의 전형에서 벗어난 곱상한 20대 여성 살인자의 등장에 미디어는 열광했습니다. 애도..는 확실히 아니었지요. 그 보도 경쟁은 열광이라고 밖에는 표현할 수 없겠네요.


사건 당일 정유정의 모습 (CCTV)


저도 그 대열에 뛰어들었습니다.


뮌헨 올림픽 현장에서 테러리스트들을 향해 라이브 카메라를 돌리는 제작진들과 비슷한 상황이었지요. 특이한 사건이므로 뉴스가치가 높았으니까요. (흔히 하는 말로, 개가 사람을 물면 뉴스가 안되지만, 사람이 개를 물면 뉴스가 된다고 합니다.)


저는 사회의 부조리함이나 제도적 허점을 드러내는 범죄가 아니면 굳이 살인을 방송에서 다루고 싶지 않습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방송일은 다가오는데 제가 원래 기획했던 아이템들은 모두 위에서 킬을 당한 상황... 사면초가에 몰려 이 사건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일선 기자들은 현장을 빠르게 취재해야 하지만, 탐사보도 프로그램의 피디인 저는 사건을 더 깊이 오래 들여다볼 수 있는 여력이 있었습니다. 현장에 파견되어 고생하는 기자들이 보통 초년차인데 비해, 저는 이 일을 오래해 온 사람으로서 갖고 있는 노하우도 있겠고요.


그렇게 취재하다 알게 된 몇 가지 끔찍한 사실들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 모든 언론들이 눈에 불을 켜고 찾고 있었던 — 정유정이 얼마나 잔인한 범행을 저질렀는지에 관한 특종이었습니다.



지금도 구체적인 내용을 적고 싶지는 않습니다. 몇 사람 보지 않는 저의 이런 일기 같은 글조차도 고인의 유가족이나 친구들이 볼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딸이 잔인한 범죄에 희생되어 갑자기 세상을 떠났는데, 그 범인이 ‘얼마나 자신의 딸을 잔인하게 난도질했는지’ 온 세상이 매일 같이 떠든다면 부모의 마음은 얼마나 참담할까요. 그 고통은 불에 덴 자국처럼 평생 깊이 남을 겁니다.


보통 더 강력한 징벌 효과를 위해 피해자 유가족이 가해자의 신상 공개를 먼저 경찰에 요청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당시 피해자의 부모님은 정유정의 신상공개를 제발 하지 말아 달라고 부산경찰청에 요청했습니다.


신상을 공개하는 즉시, 자신의 딸이 살해당한 사건으로 온 세상이 도배될 것을 아셨기 때문이겠지요. 하지만 경찰은 정유정의 신상을 공개했습니다.



그렇게 정유정의 얼굴과 이름이 세상에 알려지고, 모두가 그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을 때입니다. 방영일을 앞두고 끝까지 고민이 되었습니다. 저만 알고 있는 ‘그것’들을 방송에 담을지 말지를 거듭 생각하게 되더군요.


우리 사회에 최초로 등장한 ‘20대 여성 살인마’에 대해 다시 한번 세게 물어뜯을 소재가 될 바로 그 이야기. 얼마나 그녀가 끔찍하고 악마 같은 인간인지 비명이 터져 나오게 해 줄 바로 그런 특종이었습니다.


윤리적으로는 결코 담아서 안되지만, 상업적으로나 방송의 시청률로나 담는 것이 무조건 좋은, 그런 선택의 기로였습니다.



저는 그 내용을 결국 담지 않았습니다. 제가 일했던 팀은 분명하게 이런 선택을 지지하는 분위기였습니다. 대신 제가 의미 있다고 생각하는 다른 부분을 알리려고 노력했습니다.


당시 정유정이 은둔형 외톨이라는 것이 거의 사실인 것처럼 보도되고 있었습니다. 사건만 터졌다 하면 여기저기 나와서 말을 보태는 소위 전문가들이 그런 이야기를 퍼뜨렸습니다.


저는 정유정은 은둔형 외톨이가 아니라는 분석에 오히려 공을 들였습니다.


남이 아니라 자신을 괴롭히며 조용히 살고 있는 은둔형 외톨이들이 정유정 같은 ‘잠재적 살인자’로 비치는 것을 막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저렇게 '집에만 있다가 어느 날 갑자기 마음이 뒤틀려서 누군가를 죽이러 가는 것'이 결코 아님을, 은둔형 외톨이와 정유정은 분노와 감정의 방향이 정 반대라는 점을 알리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생각거리들은 ‘전형적인 악녀 서사’에 부합하는 것이 아니어서인지 그다지 회자되지는 못했습니다.



몇 달 후,


정유정이 재판정에 서게 되었습니다. 이곳에는 많은 자료들이 제출되었겠지요. 아마 경찰과 검찰 단계에서 수집된 많은 자료들 속에는 제가 함구했던 정보를 포함해 많은 이야기들이 있었을 겁니다.


어느 날 모 방송사의 뉴스를 보는데, 커다란 자막으로 제가 함구했던 그 내용들이 적혀있었습니다. 정유정이 검거된 지 몇 달이 지났는데 갑작스럽게 정유정 특집처럼 꾸민 뉴스였습니다. 앵커는 정유정을 꾸짖는 듯한 준엄한 얼굴로 자극적인 소식을 전달하고 있었습니다.


그 방송사에서는 동시에 ‘여성 살인자들의 악마성’을 보여주는 연작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세상에 내놓았습니다. 촬영으로 꾸며낸 그림을 실제 영상처럼 연출하고, 범죄를 최대한 드라마틱하게 보이게 하려 애쓴 흔적이 느껴졌습니다.


가느다란 선


저는 이 프로그램을 만든 사람들이 우리가 언론으로서 지켜야 할 선 하나를 부숴버렸다고 생각합니다. 범죄 피해자 가족들의 마음을 헤아리는 태도, 사회적 차별과 혐오를 자극하는 소재를 가능한 피한다는 원칙, 그리고 사실을 다루는 프로그램에서 사실이 아닌 영상을 만들어 쓸 때 지켜야 할 최소한의 윤리적 원칙 말입니다.


이것들을 무시하고 최고의 자극성을 추구한 끝에 그 프로그램은 화제가 되었습니다.



잘 보이지 않고 티도 안나는 어떤 품격이나 원칙에 관한 선. 누군가 이런 선을 지키는 것은 그 사람만의 특출난 도덕성 때문은 아닐 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주변 사람들이 다 그 선 안에 머물고 있기 때문이며, 선을 넘어서까지 사익을 추구하는 사람들을 동료들이 존중하지 않는 분위기가 있기 때문일 겁니다. ‘그래도 우리가 언론인인데’ 같은 희미한 연기 같은 자부심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누군가 가볍게 그 선을 짓밟고 나선 뒤 성공했다고 인정받으면 선을 지키는 사람이 바보가 됩니다.


인질범에게 접근하는 경찰의 모습을 ‘나만 찍어서 내보낼 수 있는 특종’이라는 이유로 전 세계에 송출해서 테러를 돕고, 확인되지도 않은 ‘전원구조’ 소식을 특종이라며 띄워서 당국의 구조 작업을 늦추고, 비행기가 폭발해 179명이 사망하는 순간을 버젓이 뉴스 화면에 내보내는 잔혹한 일들이...


마지막 선이 희미해진 분위기에서는 얼마든 일어납니다.



현장의 기자와 PD들은 급박한 상황에서 순간적인 판단을 내려야 할 때가 많습니다. 이때 먼저 작용하는 것은 개인의 높은 윤리의식이 아닙니다. 자신이 속한 조직과 주변의 동료들이 어떤 원칙을 지키는 사람들인지에 대한 감각이 그 순간의 판단을 좌우합니다.


저는 여전히 우리가 각자의 현장에서 ‘마지막 한 줄의 원칙’을 지키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미디어 종사자뿐 아니라 누군가의 삶에 영향을 주는 일을 하는 사람이라면, 이 영화를 보며 나는 어느 선에 서 있는지 한 번쯤 돌아보았으면 좋겠습니다. ☀︎



보나쓰 : 주말쯤 좋은 것들을 보고 나서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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