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노라>를 보고 나서 쓰다.
<아노라>를 보며 들었던 생각을 적어봅니다.
<아노라>는 칸, 아카데미 등 여러 영화제에서 상을 휩쓸고 있는 수작입니다. 개봉한 지 네 달이 지났는데요, 드물지만 아직 상영 중인 영화관들이 있어서 다행이었습니다.
스물세 살 아노라(배우 마이키 메디슨)는 재벌가의 철부지 아들과 우발적인 결혼으로 순식간에 신분 상승을 이룹니다. 하지만 영화는 상승보다는 그 이후의 급격한 추락을 흥미진진하게 다룹니다. 신데렐라 스토리를 현대 자본주의 버전으로 비틀어 만든 우화 같은 영화였습니다.
영화에 등장하는 용어로 말하자면 아노라는 매춘부입니다. 창녀라고도 부르고 누군가는 성노동자로 지칭합니다. 존중의 정도가 다른 여러 명칭만큼이나 논쟁적인 직업이지요.
보통 (특히나 관습적인 한국 상업영화에서) 성매매 여성의 일터는 어둡고 폭력적인 공간으로 묘사됩니다. 덩치 큰 남성들이 여자들을 겁박하고 주로 살인이나 폭력, 마약과 얽힌 사건이 일어나곤 합니다. 성매매 여성들도 인생에 희망이라곤 없는 처량한 회색빛 존재들로 묘사되고요.
하지만 이 영화에서 아노라가 일하는 ‘업소’는 조금 다른 풍경입니다. 노골적인 성적 행위가 이뤄지지만 사람 관계는 여느 직장과 다르지 않습니다. 다수의 동료들과 우정을 나누고 개중에는 내 ‘능력’을 질투하는 (어디에나 있는) 동료도 있습니다.
성을 팔고사는 ‘업소’여서 특별히 폭력적이거나 막장 같은 분위기는 없습니다. 오히려 사장과 종업원들 간의 관계조차 웬만한 직장보다 평등하고 서로 존중하는 분위기입니다.
<아노라>의 감독 숀 베이커는 성매매 여성을 ‘성노동자’로 바라보고, 그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작품들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어왔습니다.
숀 베이커의 접근은 명확합니다. 노동의 정의가 먹고살기 위한 육체적·정신적 노력이라면, 성매매도 노동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성노동자도 다른 노동자와 같은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관점입니다. (다만 저는 딥페이크나 텔레그램 성범죄 등 여러 형태의 성착취가 만연한 한국에서 모든 성매매를 성노동으로 긍정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성노동자는 어느 사회에서나 그림자 속에 있습니다. 감독은 이렇게 지워진 사람들을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끌어올리고, 관객이 그들 인생의 격랑을 함께하며 묵직한 존재감을 느끼게 합니다.
그렇게 다양한 사람들의 자리에 고루 빛이 듭니다. 숀 베이커를 아웃사이더들의 예술가라고 부르는 이유입니다.
다른 누군가가 잠시라도 내 삶에 들어오면 보이는 세상이 달라집니다. 친구가 취업을 못해서 고민하면 백수 청년의 눈으로 세상을 보게 되고, 장애인 친구가 생기면 문턱이나 계단들이 계속 눈에 들어옵니다.
영화나 문학 등의 예술은 우리를 소외된 타인의 입장에 서게 만들어주고, 그렇게 우리가 겪는 세상의 폭을 넓혀줍니다. 심지어 이미 죽어서 사라진 존재라면 혼으로라도 불러들여 그들의 목소리를 듣게 하지요. 한강 작가의 <소년이 온다>처럼 말입니다.
이런 예술 작품들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갖은 폭력을 감당해온 사람들과 우리를 연결시킵니다. <아노라>는 저에게 그런 영화였습니다.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깊은 인상을 남깁니다. 이 장면이 남기는 여운 때문에 객석에서 일어나기가 힘들었습니다.
아노라에게 남성들은 어떤 존재였을까요? 성매매 업소에서 일하는 여성으로서 아노라가 접하는 남성들은 대부분 자신과 섹스하려고 돈을 주는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런 아노라를 인간적으로 대해주는 남자가 나타납니다. 그는 아노라의 찌질한 모습을 다 지켜봤는데도, 아노라의 입장에서 같이 화를 내주고 위험한 상황을 막아줍니다.
하지만 아노라는 남자를 서툴게 대합니다. 왜 나를 강간하지 않는데? 라고 반문할 정도로요. 그러다 찾아온 마지막 순간, 모든 걸 잃은 아노라를 위한 남자의 배려에 아노라는 순간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굳어버립니다.
그 순간 자신의 진정한 마음이 아니라 성적인 쾌락을 보상처럼 건네는 아노라... 이 모습은 짙은 연민을 느끼게 합니다.
하지만 섹스만으로 끝나지 않고 눈물이 터져나왔을 때, 아노라는 자신의 모습을 낯설게 느끼며 조금 정화되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이제는 성을 주지 않아도 사랑받을 수 있는 존재라고 스스로를 믿게 되지 않았을까요? 신 따위는 없다 믿었을 삶에 인간이라도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요. ☀
보나쓰 : 주말쯤 좋은 것들을 보고 나서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