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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원 Mar 21. 2018

남성은 권력입니다

뉴스타파의 민병두 성추행 의혹 보도를 두고 말이 많습니다. 명백한 권력관계에 의한 성폭력이 아닌데, 그런 개인적인 사이에서 발생한 일까지 문제 삼는 건 너무하지 않냐는 겁니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들은 “성폭력이 권력관계에서 발생한다”는 말에서 ‘권력관계’라는 말을 직장 내 위계 정도로 이해하시는 것 같은데요. 저는 여기에 동의할 수 없는 몇 번의 경험을 했기 때문에 한 마디 적어봅니다. 멀리 살필 재주는 없고 제가 최근에 지인들을 통해 겪은 얘깁니다.


ㄱ씨의 경우


사례 1 얼마 전 일어난 일입니다. 제 지인 ㄱ씨(여성)는 (어떤 사회적 위계도 없었던) 지인 남성에게 새벽 술자리가 끝난 후 성폭력을 겪었습니다. 다행히 ㄱ씨가 현명하게 대처해 범행을 부인하는 가해자한테 약간의 (애매한) 미안하다는 말을 들어 이를 녹음했고, 이를 바탕으로 ㄱ씨는 가해자를 경찰에 신고했습니다. 경찰은 범죄사실을 확인하고 기소의견으로 송치, 검찰도 준강간미수로 1년 6월 구형, 1심 재판부는 정황을 꼼꼼히 따져 1년 6월 그대로 확정했습니다.


하지만 2심에 가기 전에 ㄱ씨는 가해자와 합의했습니다. 성폭력 가해자는 불과 몇 달 만에 풀려나 사회에 나왔죠. 왜 합의를 했을까요? 그건 ㄱ씨가 합의금을 뜯어내려는 '꽃뱀'이어서도 아니고, 경찰-검찰-재판부가 다단계로 확인한 ㄱ씨의 범죄사실이 갑자기 사라져서도 아닙니다. ㄱ씨가 합의한 이유는 딱 하나, 가해자가 ‘싸이코 기질’이 있는데, 그의 합의 요구에 응하지 않을 경우 출소 후 자신을 해코지할지 모른다는 공포 때문이었습니다.


ㄴ씨의 경우


사례 2 제 지인 ㄴ씨(여성)는 직장 상사에게 술자리에서 성폭력을 당했습니다. 사회적 위계에 의한 성폭력이었습니다. 고통/불면/우울증/정신과 상담 등을 거쳐 ㄴ씨는 가해자를 회사 성폭력센터에 신고했습니다. 운 좋게도 젠더 감수성이 있는 사람들이 처리 프로세스마다 있어서 피해자 ㄴ씨의 신변은 완벽히 보호되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해자는 해고나 형사고발을 당하지 않고 지역이 다른 타 사업장으로 전보됐습니다.


이때 피해자 ㄴ씨는 진심으로, 가해자가 강력하고 회복 불가능한 수준의 형사처분을 받길 바랐습니다. 하지만 ㄴ씨는 경찰에 직접 신고하지 못했습니다. 가해자가 직장 내 지인을 통해 자신의 집 주소를 알아내 찾아와 해코지할 것이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그 물리적이고 구체적인 공포가 신고를 하지 못한 가장 큰 이유였습니다. ㄴ씨는 해가 일찍 지는 겨우내 귀갓길에 공포에 시달렸다고 말했습니다.


권력이란?


권력의 사전적 정의는, 타인을 그의 의사와 무관하게 굴복시키는 힘입니다. 위 두 가지 사례에서 두 여성은 모두 자신들의 의사와 반대되는, 가해자에게 유리한 선택(1심 판결 후 합의, 회사 징계 후 불고소)을 했습니다. 권력이 작용한 겁니다. 하지만 ㄱ씨와 ㄴ씨 모두 가해자에게 유리한 ‘굴복’을 한 시점에 가해자들과 어떤 사회적 위계로도 얽혀있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작용한 권력은 사회적 권력관계가 아니라, 구체적이고 물리적인 권력, 남성의 생물학적 힘에서 생기는 권력입니다.


타인을 굴복시키는 힘으로서의 ‘권력’은 이처럼 다양합니다. 그것은 노래방 안에서 나를 나가지 못하게 만드는 남성의 힘일 수도 있고, 네가 정규직이 못 되게 막겠다는 협박으로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그의 의지에 반해 굴복시킬 수 있는 힘의 종류가 이렇게 다양한데, 개중에 일부만 골라 ‘권력’으로 인정하겠다는 건 너그러이 해석해도 젠더 감수성 부족일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남성의 생물학적 힘만으로도 권력이 발생한다는 점을 이해하면 해묵은 이퀄리즘 논리의 허점도 (일부) 깨닫게 됩니다. 여성혐오가 ‘남성혐오’라고 불리는 말들보다 더 문제가 되는 이유는, 여성혐오가 그 말을 내뱉는 남성의 물리적인 힘/다수성 등과 만나면 실제로 여성을 차별하고 폭력을 가하고 평판을 저하시키는 구체적인 위험을 여성의 삶에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남성들의 헤이트 스피치는 표현의 자유를 인정하는 범위 에서 일종의 사회적 문제로 다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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