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사쓰마 반란
사쓰마 반란(西南戦争, 1877)은 메이지 유신을 이끌었던 영웅 사이고 다카모리(西郷隆盛)가 메이지 정부의 근대화·사무라이 해체 정책에 반발해, 고향 사쓰마(현재 가고시마)에서 일으킨 “마지막 사무라이의 내전”. 이 전쟁이 끝나면서 무사 계급의 시대가 사실상 완전히 막을 내려. 기간: 1877년 1월 29일 ~ 9월 24일 (메이지 10년). 장소: 주로 규슈 남부(가고시마, 구마모토, 미야자키, 기타큐슈 일대). 반란군(사쓰마 군): 사이고 다카모리 + 구 사쓰마 번 사무라이(시족, 士族) 중심 약 20,000명 규모. 정부군(관군): 메이지 정부의 징병군 + 경찰 + 구번 출신 사무라이 혼합군, 총 동원 6~7만 이상. 결과: 정부군 승리, 사쓰마 반란 진압 → 사무라이 무장 반란의 종언.
메이지 정부는 징병제(1873): 사무라이만 군인이 아니라, 일반 농민·서민도 군에 가는 “모두의 군대” 도입. 사무라이 녹봉(봉급)·특권 폐지: 봉급을 채권·일시금으로 전환, 결국 사실상 없애버림. → 수백 년 동안 “나라를 위해 싸우는 특권 계급”으로 살아온 시족(士族) 입장에선 “우리가 필요 없는 존재가 됐다”는 상실감·분노가 터져. 1873년, 정부 안에서 “조선을 정벌하자(세이칸론)” 논쟁이 벌어졌을 때 사이고 다카모리는 찬성파의 대표. 그는 심지어 “내가 조선에 가서 사절을 하고, 모욕당해 죽으면 그것을 구실로 전쟁을 일으켜라”라는 극단적인 제안까지 할 정도로, 사무라이들의 불만을 대외전쟁으로 풀고 싶어해. 하지만 이와쿠라·오쿠보 등 실권파는 “지금은 전쟁보다 내정·산업 육성이 먼저다”라며 세이칸론을 부결. 사이고와 그의 동료들은 이에 항의해 일괄 사직하고 고향 사쓰마로 내려가. → 이때부터 사쓰마는, 명목상 메이지 정부 소속이지만 실제로는 “중앙정부에 삐딱하게 선 반(半) 독립 상태”.
사이고는 1874년 고향 가고시마에서 사숙(私学校, 시가코) 라는 사립 군사학교를 세우고, 전국에서 몰려든 구 사무라이·젊은이들을 받아들여. 겉으로는 학문·무예 교육기관이지만, 실제로는 총·포술·전술까지 가르치는 준군사조직에 가까워. 시가코는 사쓰마 현 전역에 100개가 넘는 분교를 둘 정도로 커졌고, 구 사무라이들이 현 행정·경찰까지 장악하면서 사쓰마 현 전체가 “사이고 왕국”처럼 변해.
도쿄 정부는 “사쓰마에서 언젠가 큰일 난다”고 보고 1876년~77년, 사쓰마의 무기·탄약을 압수하려고 함. 여기에 더해, 도쿄에서 파견된 “사이고 암살 음모” 가 있었다는 소문(취조 중 고문으로 나온 자백)이 퍼지며 사쓰마 내부 여론은 순식간에 “도쿄가 사이고 선생을 죽이려 한다! 우리가 지켜야 한다!”로 향해. → 사이고 본인은 처음에 적극적으로 반란을 계획했다기보다는 “어쩔 수 없이 앞에 서게 된” 면도 있었지만, 상황은 이미 전면 무장 봉기로 기울어.
1877년 2월, 사쓰마군 약 12~2만 명은 “상경(도쿄로 간다)” 구호를 내걸고 북쪽으로 진군. 표면적인 명분은 “사이고를 암살하려 한 정부 내 역적을 처단하고 천황께 직접 호소한다”는 식. 사이고는 공식적으로는 여전히 천황에 대한 충성을 표방했기 때문에, 반란이라기보다 “정부 내 나쁜 놈(오쿠보 등)을 몰아내는 정군”이라는 프레임을 사용. 도쿄로 가는 길목에 있는 구마모토(熊本)는 서남 규슈의 요충지이자, 메이지 정부가 중요하게 생각한 근대식 성곽 + 병참 기지. 사쓰마군은 1877년 2월 말~3월 초 구마모토성을 포위·공격하지만, 성 안에는 징병군·경찰 약 4,000여 명이 버티고 있었고 튼튼한 석벽·포대와 보급으로 사쓰마군은 성을 끝내 함락시키지 못해.
메이지 정부는 구마모토 구원을 위해 전국에서 징병군·구 번 병력을 모아 관군 대군을 편성. 사쓰마군은 검술·근접전에 강했지만, 신정부군은 영국제 최신 소총·포를 갖추고 원거리에서 탄막을 형성. 게다가 관군은 철도·전신·군함을 활용한 근대식 병참·통신으로 병력과 물자를 끊임없이 보낼 수 있었고, 반면 사쓰마군은 “전통 무사 군대+지방 지원자” 구조라 탄약·식량이 갈수록 부족. 1877년 여름, 사쓰마군의 잔존 병력은 결국 가고시마 시내·시로야마(城山) 언덕으로 몰림.
사이고 다카모리는 전투 중 총상을 입고 쓰러지고, 마지막 남은 수십 명의 사무라이들은 칼을 뽑고 정부군 진지로 돌격해 전원 전사. → 이 날을 끝으로 사쓰마 반란은 완전히 진압, 일본 내에서 무장 사무라이가 정부에 맞서 일으킨 대규모 반란은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아. 정부는 이 전쟁을 위해 방대한 군비·군수비를 지출해 국가 재정이 거의 파산 수준에 이름.
사쓰마 반란 당시 정부는 사이고를 “역적”으로 규정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백성에게 인기가 많았던 성품, 죽기 직전까지 천황에 대한 충성 명분을 내세웠던 점, 결과적으로 근대 국가를 더 단단히 만든 계기가 된 점 등이 재평가되며 “마지막 사무라이”, “정의로운 반역자” 같은 이미지로 바뀜. 결국 메이지 정부 말~대정제국 시대에 사후 복권, 동상·신사(난고 신사 등)까지 세워질 정도로 “국가의 영웅” 반열에 다시 올라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