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길 느와르-리처드 3세를 찾아서 리뷰
대학로가 아닌 곳에 있는 극장의 공연은 늘 특별하다. (걸어서 10분 거리기는 하지만) 극장이 자리 잡은 동네도 구경하고, 객석과 무대를 조금 더 보고 싶어서 일찍 왔건만, 입장은 15분 전부터 진행되었다. 처음 들어서자마자, 일반적인 블랙박스 소극장과는 느낌이 다른 가로로 긴 무대에 놀랐고, 푸른 조명과 새 까만 무대, 곳곳에 설치된 까만 벽들은 오늘의 연극 '골목길 느와르 - 리처드 3세를 찾아서'의 복선이었다. 왠지 모르게 심상치 않은 작품이 펼쳐질 것 같은 느낌을 극장과 무대로부터 받기 시작했다.
<골목길 느와르-리처드3세를 찾아서>는 이행성극장에 터를 둔 '극단 두'의 작품으로, 셰익스피어의 희곡 '리처드 3세'를 각색한 작품이다. 리처드는 영국 장미전쟁 시기 형제를 죽이고 2년 간 왕위를 찬탈해 정권을 잡았으며 선천적 척추측만증을 앓은 독특한 이미지로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다. 감각에 대한 사유, 사유에서 상상으로 이어지는 연극적 마법을 표현하고자 하는 '극단 두'에게 너무나 적합한 소재이며 본 극과 극단이 지향하는 요소들, 그중에서도 유려한 연출적 요소가 너무나 적합한 극장을 만나 탄생했다고 가볍게 평가를 내려본다.
<리처드 3세를 찾아서>는 전 세계 사람들을 사로잡은 셰익스피어의 서사로 시작한다. 2013년에 발굴된, 휘어있는 척추뼈를 가진 유골의 발견은 또 한 번 사람들의 상상력에 불을 지핀다. 역사적 발견과 문학적 유산이 21세기 대한민국 성북동에서 만나는 순간은 특별하지만 그 서사는 지금도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하다. 섬뜩한 악인이 등장하는 셰익스피어 클래식, 그리고 머리를 울리는 대사까지 500년이나 앞선 작가의 말이 지금 우리들의 마음을 울리는 건 이미 검증된 재미있고 익숙한 이야기이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이 작품은 리처드의 유골로 시작되어 한 인물을 복원해내는 일이다. 그리고, 이제 이 연극을 지켜본 아이의 시선으로 우리 곁을 떠나 다른 시간으로 간다."
다만 익숙한 서사는 양날의 검을 갖고 있다. 이미 다 아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서사 자체가 지루하거나 매력이 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는 로미오와 줄리엣, 베니스의 상인을 사랑하듯 수많은 고전은 아직도 여러 형태로 변형되어 읽히고 있다. 익숙한 서사를 뒤트는 표현법, 관건은 그곳에 있었다. 본 극에서도 익숙한 <리처드3세>의 서사는, 놀라운 표현법을 만나 재탄생하고 한 시도 눈을 떼놓을 수 없게 만든다.
그래서 극을 관람하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소재인 인상적인 표현법에 대해 쓰고 싶었다. 최근 극을 관람하거나 모니터링할 때, 정통적인 방식이나 연출을 따르지 않은 작품들이 많아지는 것 같다. 프로시니엄 무대보다 자유 배치가 가능한 블랙박스 극장의 인기가 높아지는 것도 이 이유 때문이 아닌가 싶다. 창작자가 원하는 표현을 하고 싶어도 무대 자체가 정형화되어 있거나 경직되어 있다면 자유도와 확장성이 크게 떨어지기 때문이다.
<리처드3세를 찾아서> 역시 신선했는데 그 이유는 다름 아닌 풍부하게 채워진 표현법과 연출 때문이었다. 연극에 있어서 표현과 움직임은 단순히 '배우들의 연기'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번에 깨달았다. 연극에서 어떤 것들이 어떠한 방식으로 움직였는지, 하나씩 짚어보는 것도 연극을 곱씹는데 좋을 것 같다.
1번. 공간의 활용과 기둥
먼저 극을 둘러싼 공간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살펴보자. 무대가 움직이는 것은 아니지만, 기둥과 같은 세트, 그리고 기둥 앞과 옆, 뒤에서 배우들은 변형되는 공간을 활용해 각 씬에 맞게 움직였다. 무대 뒤의 공간이라고 여겨졌던 기둥 뒤의 공간도 배우들의 인상적인 첫 등장, 마치 느와르 영화에서 음침한 창고에서 은밀한 일을 이야기하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 그 첫 등장으로 활용했다. 이 공간의 활용은 뒤이어 나오는 2번 내용과 결합하여 극의 묘미를 더한다.
2번. 실시간 영상과 실시간 극의 합작
공연과 영상이 동시에 나왔다. 글로 쓰니까 그때의 느낌이 전달되는 것 같지 않지만 본 극에는 관객이 정면으로 바라보는 공연이 있는 동시에, 또 한편으로는 두 대의 TV와 한쪽 벽면에 재생되는 실시간 영상이 송출되고 있었다. 아, 극이 시작할 때 리처드의 뼈를 비추는 영상과 녹음된 목소리가 나올 때만 해도 그 영상은 당연히 녹화본인 줄 알았다.
우리는 다른 연극을 관람하는 것처럼 리처드를 관찰하며 상상할 수 있지만, 하나의 선택지가 더 있었다.
러닝타임 내내 벽면에 비친 영상에는 실시간으로 촬영 중인 극의 일부가 담기는데, 잠깐 눈을 돌려 그 일부를 바라보면 조금 더 내밀한 관찰자의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다. 캠코더 하나를 들고 이 모든 것을 관찰하는 카메라도 관찰자로서 우리 관객의 시선과 함께 리처드에 대해 관찰하고, 놀라고, 신나고, 욕하고, 경탄을 자아낸다.
물론 단순히 라이브 영상을 찍는 것만으로도 어떤 연출적 효과나 표현을 가져올 수 있지만 그 영상에 담긴 내용은 단순한 촬영 그 이상의 것이었다. 객석과의 거리가 1m 남짓이었던 공연장에서 배우의 표정과 연기를 세세하게 보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카메라가 클로즈업한 사물들과 인물들은 또 다른 감동과 마음의 움직임을 선사한다. 어떤 한 인물의 시선이 되어 인물의 표정을 클로즈업으로 비추거나, 관찰자의 시선으로 빠져나와 극 전체의 움직임을 세세하게 비추기도 했다. 카메라가 담은 내용은 바로 다음 세 번째, 배우들의 움직임과 표정이다.
3번. 움직임과 표정
배우들의 움직임도 심상치 않았다. 얼굴 표정에 굉장히 신경을 많이 쓴 것처럼 보였는데, 그저 과장된 연극적 표현이라기보다는, 움직임과 표현을 통해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 뭘까 생각하게 만든다. 다섯 배우가 각각 광기가 의인화된 리처드 3세를 연기하는데, 각 배우마다 달라지는 그의 모습을 바라보는 것도 큰 매력이다. 대신 관객의 상상력이 꼭 필요하다. 장이 끝날 때마다 역할을 또렷하게 집중해서 봐야 하니깐.
리처드 3세를 표현하기 위한 뒤틀린 움직임은, 움직임이라기보다는 무용처럼 느껴진다. 악과 광기에 가득 찬, 그리고 결심에 가득 찬 말투와 행동은 무용(舞踊)이자 무용(武勇)이었다. 다양한 변형과 표현으로 어수선하게 느껴질 수 있는 극의 분위기를 잡아준 것 역시 배우들의 움직임이었다. 재밌는 것은 이 공간에서 유일하게 말과 움직임이 없었던 아기 에드워드는 극 마지막에 가서야 관객을 바라보며 웃는 장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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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사실 아직 연극이 어렵다고 느끼는 내 기준에서는 어려운 연극이었지만 그래서 더 만족스러웠다. 어렴풋이 들었던 리처드3세 이야기를 알고 있어서도 있겠지만, 흥미로운 소재를 흥미롭게 풀어낸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는 서사보다도 어떤 작품을 어떻게 이야기할지, 이야기 외적인 요소에 푹 빠졌던 만큼, 극을 관람하는 또 다른 관점으로 접근하는 시도를 지속적으로 이어나가도 재밌을 것 같다.
이미지 출처 : 경향신문, 서울경제, 서울문화재단 블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