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set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오래전부터 하고 싶었던 일이었고, 동시에 가속 페달을 밟는 단계에 이르렀다. 워밍업도 없이, 마치 모든 것이 완벽히 준비된 것처럼 그럴싸하게 포장된 채로. 모든 이에게 보여줄 언박싱을 코앞에 두고, 하루하루를 구름 위를 둥둥 떠다니듯 보냈다.
그러다 곧바로 곤두박질쳐 땅 아래로 뚝 떨어졌다. 다행이었다. 이 찰나에 구원자가 나타났다는 것은 어쩌면 인생의 큰 행운일지도 모른다. 자만과 오만이 온몸을 휘감던 나 자신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하루의 기적은, 인생의 전환점이 될 만큼 강렬했다.
제대로 된 나를 만나기 위해, 다시 깨지고 부서지기로 결심했다. 처음을 두려워하지 않기로, 그동안 그렸던 그림들을 깨끗이 지우고 백지로 되돌리려 한다.
“세상에는 해봐야 알 수 있는 것들이 너무 많아.
머리로만 아는 건 오래 못 가.
그러니까 재능이 특별한 사람들보다, 버티고 하고 또 하는 사람이 가장 무서운 사람이지.
무슨 일이든 별일 아닌 듯 해내는 사람들 있지?
그 사람은 그만큼 지나온 게 많은 사람이야.
지독한 반복을 이겨낸 사람.
나는 그런 사람 절대 못 이긴다고 생각해.”
— 윤여정 배우 인터뷰 중
고등학생 때 화실을 다니며 데생과 구성을 배웠고 대학에서 디자인을 전공했을 뿐, 단 한 번도 순수미술을 제대로 배워본 적이 없다. 그럼에도 나만의 스타일로 일러스트를 그리고 글을 쓰며 자부심으로 채워졌다. 그러다 큰 그림까지 그리고서는 스몰 비즈니스를 시도하려던 찰나, 귀인을 만났다.
그토록 배우고 싶었던 회화를 이제야 본격적으로 배워볼 기회가 주어졌다. 앞으로는 그동안 쌓아온 것들을 모두 내려놓고, 온전히 받아들이는 시간만 남았다.
나무의 뿌리가 단단히 내려앉기 위해 오랜 시간을 버티듯, 절대 서두르지 않기로 한다.
세상은 늘 욕망 덩어리로 나도 모르게 끌어당긴다. 잘 가던 목적지도 흐릿하게 만들고, 절제도 흐트러뜨린다. 정신줄을 놓으면 큰일 날 세상이다.
나의 순수함은 어디로 도망갔을까,
세 달 사이에 급속도로 변질되어 버린 나의 생각과 눈이여.
파란 하늘이 펼쳐진
봄날,
오늘은 숨이 참 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