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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맥스무비 Sep 28. 2021

‘오징어 게임’으로 보는 표절과 혐오란

[기획] ‘오징어 게임’으로 보는 표절과 혐오란

어떤 작품이던 아쉬운 지점이 없을 순 없다. 보는 이 마다 관점도 취향도 다르다. 작품에 대한 비판을 가할 수 있는 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자유다. 그러나 몇몇 부당해 보이는 지적에는 반문을 아니하기 힘들다.


드라마 '오징어 게임' 스틸. 사진 넷플릭스


넷플릭스 시리즈 ‘오징어 게임’은 공개와 동시 다양한 논란이 있었다. 그 중 첫 번째는 표절시비다. 일본 영화 ‘신이 말하는 대로’와 유사하다는 지적이다. 영화 속 장면을 ‘오징어 게임’ 1화에 그려진 첫 번째 게임인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에 그대로 옮겼다는 것. 이 외에도 ‘오징어 게임’은 ‘헝거게임’, ‘배틀로얄’, ‘도박묵시록 카이지’ 등 다양한 작품을 짜깁기했다는 비난에 시달렸다.

허나 이는 사실 창작자 입장에서 다소 당혹스러운 지적일 수 있다. 게임에서 지면 죽는다는 설정을 가진 데스 게임 장르의 작품은 수없이 많고, 담고자 했던 메시지도, 비주얼도 다른 와중 게임의 형식이 비슷하다는 이유로 비판하는 것은 근거가 충분치 않다.

이는 류승완 감독의 전작 ‘짝패’가 세계적인 거장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킬 빌’을 표절했다는 비판을 다시 한번 떠올리게 한다. 두 작품의 액션 시퀀스가 유사한 비주얼로 그려져 ‘짝패’가 ‘킬 빌’을 표절했다는 시비에 휩싸이기도 했던 것. 그러나 재미있는 것은 ‘킬 빌’은 그 자체만으로 다른 액션 영화들에 큰 영향을 받아 탄생한 작품이라는 사실이다.

애당초 수많은 일본 B급 액션 영화를 뒤섞은 장면이 여러 차례 등장하는 것은 물론, 우마 서먼이 입었던 노란색 트레이닝 복은 이소룡의 마지막 작품 ‘사망유희’를 그대로 따왔다. ‘짝패’가 표절했다는 ‘킬 빌’ 조차 원류가 있는 작품이니 만큼, 최근의 작품을 예로 들며 비교대상으로 삼는 것 자체가 사실상 적절치 못한 방식이다.

영화가 대중문화의 한 축으로 자리한 이래, 뤼미에르 형제의 후배들은 선배의 작품을 수없이 보고 자랐으며, 그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것은 당연히 오만이다. 장르의 유사성과 패러디, 오마주, 표절의 경계가 분명치 않은 것은 사실이나, 그림의 구도 조차 다른 장면을 들먹이며 지적하기엔 ‘오징어 게임’만의 의미가 분명하다.


드라마 '오징어 게임' 스틸. 사진 넷플릭스


‘오징어 게임’에 대한 두 번째 지적은 ‘여성혐오’를 비롯한 약자에 대한 멸시다. 여성은 의존적이고 도구화된 인물로만 그려지며, 노인은 비루하고, 외국인 노동자는 착한 바보로만 비춰진다는 것이다. 시체를 간했다고 암시했던 대사나 생식기 안에 담배를 숨겨온 장면 역시 자극을 주기 위해 지나치게 혐오스러운 장면으로 구성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이와 같은 지적에 반문하게 되는 것은 명료하다. 그렇다면 미디어는 “사회적 약자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작품을 어떻게 그릴 수 있는가”다. 파괴적이고 가학적인 이미지와 설정이 아무런 메시지도 담지 못하고 휘발된다면, 이는 분명 자극만을 위한 것이다. 그러나 ‘오징어 게임’ 속 그와 같은 이미지는, 약자가 자신의 욕망을 토로하고 쟁취하기 위해 분투하는 모습이 담고 있는 이면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수 천년 동안 지속돼 왔던 남성 위주 사회 속에서 그에 의존해 자신의 생존을 연명해야 했던 여성의 현실은, 과연 오늘 모두 해결돼 있는가.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우리네 인식은 개선되고 있는가. 노인 혐오는 사라졌고, 탈북자에 대한 시선은 부드러워졌는가. 수많은 갈등이 양산되고 서로의 이익을 위해 손가락질하고 있는 우리 사회 속에서, 약자의 목소리는 과연 들리고 있는가. 적나라하고 거친 표현에 불편함을 느낄 수 있겠지만, ‘오징어 게임’의 이미지는 바로 그러한 것들을 꼬집고 있다.

예컨대 짧게 등장하지만 깊은 인상을 남기는 캐릭터가 있다. 기훈에게 평생을 남들 뒤에 살아왔지만, 게임에서라도 1번을 해보고 싶었다며 등번호를 교환하자고 제안한 이다. 이런 이가 등장한 것은 어떤 이유인가. 광기에 휩싸이고,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지만, 이 잔인한 게임 속 약자들은 현실보다 훨씬 평등한 기회를 부여 받는다. 이런 세상 속에서 약자가 욕망을 위해 사투를 벌이는 것은 보는 이로 하여금 우리 사회의 어떤 면을 직면하게 하는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약자가 도구로 전락한 모습을 당연하게, 아름답게 그려선 안 된다. 허나 이미지가 불편하다 하여 그가 담고 있는 진의를 왜곡하고 혐오와 비하로 몰아간다면, 이는 되레 사회 문화적 발전에 역행하는 흐름일 터다. 불쾌감을 전하는 인물들이, 사건들이 여전히 우리 현실 속에 있음을 기억하고 그네들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보고 듣기에 편한 이미지만을 쫓는다면 우리는 배부를 돼지의 신세를 면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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