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이상의 실패담이 아닌 실천담을 전하려 합니다.
눈앞에 아기가 울고 있으면 난 관찰을 시작한다. 배가 고픈 건가? 기저귀가 불편한 건가? 배에 가스가 찬 건가? 우선 아이의 상태를 객관적으로 분석한 뒤 원인을 찾아본다. 해결책을 마련하여 아기가 진정한 후 에야 힘들어하던 아이를 보며 안쓰러운 감정이 몰려온다. 종종 남편은 아이에게 감정적으로 동요되지 않는 나의 모습을 보고 로봇 같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하지만 내 성향상 문제를 발견하면 원인을 분석한 뒤 해결책을 마련해야 심리적으로 편안 해진다. 이러한 성향 때문에 학창시절에는 명확한 답이 있는 수학과 물리를 좋아했고, 인문학적 서적보다는 분석과 실험을 통해 결론이 있는 논문을 좋아했다. 물론 타고난 것도 있겠지만 엄마를 제외한 가족 모두가 이과 성향이라 더 증폭되었던 것 같다.
그렇다고 나에게 감성적인 면이 아예 없던 건 아니었다. 지금도 아무 이유 없이 하늘에서 내리는 눈을 보면 가슴이 뭉클해지면서 강아지처럼 좋아한다. 그만큼 눈은 나의 감성을 자극하는 대표적인 대상이다. 어릴 적 자연스럽게 눈처럼 하얀 털을 가진 북극곰에게 사랑에 빠졌고, 지금까지도 우리집 구석구석에 북극곰을 좋아했던 흔적들이 남아 있다. 이토록 이성적인 나에게 북극곰은 무조건적인 감성적 대상이었었다. 북극곰의 멸종위기 소식을 듣기 전까지는 말이다. 때는 2008년 대학교4학년 시절, 북극곰이 2100년에 멸종한다는 기사를 접했다. 난 슬픔도 잠시, 곧바로 북극곰의 멸종을 막아야겠다 생각이 들며 원인을 분석하기 시작했고, 그렇게 북극곰은 나에게 감성적인 대상에서 이성적인 대상으로 변하게 되었다.
북극곰의 멸종을 막기 위해서는 지구온난화를 저지해야 했다. 혼자만의 노력으로는 해결하기 어려운 범지구적 문제였지만 북극곰이 처한 위기를 생각하면 외면할 수 없었다. 나의 전공 지식을 활용하여 사람들에게 온실가스를 저감하는 건축적 해결책을 알려주고 싶었다. 하지만 건축주를 설득하여 탄소를 저감하는 설계를 실현하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한해 두 해가 갈수록 상승해가는 지구온도를 보며 마음이 조급 해지기 시작했다. 결국 나는 남편을 설득하여 직접 우리집을 짓기로 하였다. 그렇게 나의 저탄소 집 짓기 실험은 시작되었다. 첫번째 집에서는 건축실무를 하면서 궁금했지만 적용해 보지 못했던 지속가능한 건축이론과 자재들을 적용해 보았고, 두번째 집에서는 건축재료와 에너지만이 아닌 생태와 재생가능한 생활까지 고민한 집을 지었다. 하지만 두번의 집 짓기 과정속에서 내가 생각치 못했던 허점들을 마주하였고, 실험이 실패한 기분이 들었다. 난 지구온난화를 저지할 건축적 해답을 찾지 못했다는 생각에 사람들에게 내가 시도했던 것들조차 알리려 하지 않았다.
두번의 집을 지어가며 건축적 해법을 강구하는 동안에도 지구 온도 상승은 가속도화 되고 있었다. 그냥 좌절감에만 빠져 있어서는 안 됐다. 북극곰을 어떻게 도울 수 있을지 다시 고민하고 있던 와중에 이메일 하나가 눈에 띄었다. [2023년 제인 구달 박사 내한 대중강연 <희망의 실천 (Hope Through Action)>에 VIP로 초대합니다.] 내가 후원해오던 생명다양성 재단에서 보낸 초대장이었다. 평소 남에게 크게 관심이 없기에 내노라 하는 유명인사가 온다고 해도 흥미가 생기지 않는다. 그래서 이 메일을 처음 봤을 때 ‘제인구달’이 아닌 ‘VIP초대’ 부분에서 살짝 흥미를 가졌다가 그냥 창을 닫아버렸다. 하지만 강연을 가고 싶어하는 친한 친구가 있어 다시 이메일을 연 뒤 신청을 하게 되었다.
강연 당일이 되어 도착한 강당에서 무대와 꽤 가까운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사회자의 설명을 들으며 별 생각 없이 앉아 있던 와중에 박수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무대를 봤더니 창도 없는 이 공간에 한줄기 빛을 받으며 제인구달이 입장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런 게 후광인가 싶었다. 정말 신기한 건 제인구달이 입장만 하고 있었음에도 나도 모르게 가슴이 벅차올랐다. 평소 내가 마음에 품던 사람도 아니고, 관심이 있던 사람도 아닌데 아주 이상한 기분이었다. 이 묘한 감정에 휩싸인 채 강연은 시작되었고, 제인구달은 침팬지 연구를 시작하게 된 이야기부터 지금 활동하고 계시는 환경운동모임이야기까지 본인이 해오셨던, 겪어 오셨던 일들을 차분히 말씀해 주시며 편안하게 강연을 이어 나갔다. 명확한 기후위기의 해법은 없었지만 그녀가 진심으로 동물과 환경을 위해 실천해온 이야기 만으로도 나에게 충분히 울림을 줬다.
강연이 끝나고 질의응답이 시작되자마자 꽤 많은 청년들이 너나할 것 없이 손을 들고 질문을 시작했다. 이미 환경에 적극적인 활동을 하는 것 같은 첫번째 질문자는 ‘지금의 기후위기속에서 우리가 어떤 일을 해야 하는가’는 취지의 질문을 했다. 나 또한 기후위기를 대응할 건축적해결책을 찾지 못했기에 제인구달의 답변에 귀를 기울였다. 제인구달로부터 돌아온 답변은 “Tell your story (너의 이야기를 전해라)”. 플라스틱을 사용하지 말라는 것도 아닌, 환경운동을 열심히 하라는 것도 아닌 단순히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라고 하니 갸우뚱 했다. 다른 청중들 또한 이해를 못 한건지 제인구달에게 두번이나 더 비슷한 취지의 질문이 나왔다. 하지만 제인구달은 나머지 두 답변에서도 모두 “Tell your story”라고 답하셨다. 처음엔 추상적이고, 명쾌하지 않은 답변이라 생각했는데 한 번도 아닌 세번이나 같은 답변을 하셔서 무슨 의미로 하신 말씀인지 집에 돌아가는 길에도 계속 곱씹게 되었다.
그날 밤 침대에 누워 곰곰이 생각해봤다. 평소 드라마나 영화도 잘 안 보고 다른 사람들의 사는 이야기에도 큰 관심이 없던 내가 제인구달 이야기에 마음이 열렸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중요한 건 두번째 집 짓기 이후 북극곰을 살리는 해법 찾기에 좌절해 있던 나는 강연을 들은 뒤 다시 실천해 나갈 힘을 얻었다. 그리고 그 힘을 얻었다고 깨달은 순간 제인구달이 말한 “Tell your story”가 이해되기 시작했다. 끓는 지구 시대속에서 지구 온도를 낮추기 위해서는 온실가스 발생을 줄여야 한다. 이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하지만 현대사회속 넘쳐나는 편리함의 유혹으로 인해 생활속에서 온실가스 감축을 실천하긴 어려운 현실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머리로는 이해해도 실천이 부족한 상황이기에 실천할 수 있는 힘을 얻는다는 건 조금씩 지구의 온도를 낮출 가능성이 생긴다는 것이다. 여태껏 내가 지구온난화를 저지하기 위해 찾으려 했던 건축적 해법은 단순히 하나의 지식을 전하는 것일지 모른다. 하지만 북극곰의 멸종을 막기 위해 실천했던 나의 진정 어린 이야기를 듣고 다른 사람들에게 실천의 힘을 전할 수 있다면 지구온난화를 저지하는데 한발짝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이제는 더 이상 실패담이 아닌 나의 실천담을 전하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