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극곰이 내 삶으로 들어오다.
곧 있으면 마흔이지만 난 아직도 눈만 보면 5살짜리 아이가 된다. 수족냉증이 있어도 하얗게 쌓인 눈을 보면 어린아이들처럼 신나게 뒹굴고, 눈 속에 파묻히고 싶어 한다. 마치 눈은 나를 어린 시절로 돌아가게 만드는 매개체 같다. 강원도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보니 눈은 나에게 아주 친숙한 존재다. 유독 눈을 좋아했기에 눈이 오는 날이면 아파트 단지 언덕으로 달려가 동네 언니오빠들과 눈썰매를 즐겼다. 그리고 늘 1등으로 내려오며 기가 막힌 눈썰매 솜씨를 동네사람들에게 뽐냈다. 고등학생 때까지는 집에서 가까운 스키장을 다니며 겨울마다 스키를 즐겼고, 대학교에 가서는 스노보드 동아리를 만들어 겨울방학 때마다 스키장에서 시즌생활을 했다. 심지어 지금의 남편도 스노보드를 타다 눈 위에서 만났을 만큼 눈은 내 인생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이렇게 눈을 좋아하는 나에게 잠시 꿈만 같았던 시기가 있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아버지께서 교환교수로 캐나다 오타와를 가시게 된 것이다. 그 당시엔 캐나다라는 나라도 모르고, 캐나다에서 영어를 쓴다는 것도 모른 채 가족들을 따라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오랜 비행 끝에 도착한 오타와는 여유롭고, 자연이 풍부해 보였다. 그리고 얼마 뒤 겨울엔 학교를 못 갈 만큼 눈이 쏟아지고, 도시를 관통하는 리도 운하가 얼면 스케이트를 타고 출퇴근을 한다는 엄청난 사실을 알게 되었다. 눈을 좋아하는 나에겐 꿈같은 일들이었다. 그리고 그해 겨울, 아직도 눈만 감으면 생생하게 떠올려지는 잊지 못할 추억을 만들었다.
하루아침에 눈이 50센티 넘게 내린 날이었다. 정말 소문대로 스쿨버스는 운행을 안 했고 학교를 못 갔다. 자연스럽게 주차장에 쌓인 눈을 눈삽으로 치우며 오빠들과 눈놀이가 시작됐다. 이 날은 유일하게 합심하는 날이었다. 앞마당에 2~3미터 쌓아놓은 눈 속에 굴을 파기도 했고, 뒷마당에는 눈으로 이글루를 만들어 그 안에서 잠을 자기도 했다. 정말 온몸으로 눈을 즐길 수 있어 행복했다. 엄마는 체감온도 -50도에 육박했던 오타와에서 지내시며 뼈 시리게 추워하셨지만, 눈이 많이 오는 춥디 춥고 길고 긴 오타와의 겨울은 나에게 완벽한 곳이었다.
눈으로 온 세상이 하얗게 뒤 덮인 크리스마스 시즌이었다. 동네의 모든 집들이 경쟁하듯 크리스마스장식을 반짝반짝 꾸몄고, 시내 또한 멋진 크리스마스트리와 캐럴소리로 가득 차 있었다. 교회를 다니지 않아도 눈이 많이 오는 오타와에서의 크리스마스는 몰입도가 높을 수밖에 없었다. 가족들과 자주 놀러 가던 쇼핑몰 또한 들뜬 분위기였고, 이곳저곳에서 크리스마스 선물 판매가 한창이었다. 그런데 수많은 장난감과 인형들로 가득한 진열대 위에서 나의 마음을 쏙 빼앗은 인형이 하나 있었다. 그건 바로 눈처럼 새하얀 털에 까만 눈 두 개, 코 하나가 박혀 있는 북극곰 인형이었다. 첫눈에 보자마자 반해버렸고, 엄마에게 사달라고 조르기 시작했다. 평소에도 물건을 잘 사주시지 않던 엄마는 내 말을 들은 채 만 채 하셨다. 난 집에 돌아와서도 그 북극곰 인형이 눈을 뜨나 감으나 아른거렸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크리스마스이브를 기다렸다.
드디어 크리스마스 날 아침. 자고 일어나니 배게 옆에 무언가 큰 선물포장이 있었다. 기대감에 부푼 체 포장을 뜯어보니 바로 그날 마주했던 북극곰 인형이 들어있었다. 다행히도 엄마는 그날 내 말을 확실히 들으셨다. 난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은 행복을 느끼며 산타할아버지(엄마)에게 감사함을 전했고, 바로 북극곰 인형에게 ‘polar’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폴라를 선물 받은 이후로는 어디든 폴라와 함께했다. 잠 잘 때도, 여행 갈 때도 폴라는 늘 내 옆을 지켰다. 내가 힘들고 속상한 일이 있으면 고민을 들어주기도 했고, 순수한 눈망울로 나를 위로해주기도 했다. 그렇게 폴라는 나의 가장 친한 친구가 되었다.
폴라 덕분에 나의 관심은 자연스레 진짜 야생 북극곰으로 이어졌다. 신문기사나 잡지에 나온 북극곰 사진이 있으면 스크랩하여 방에 붙여두었고, 북극곰이 나오는 다큐멘터리가 있으면 꼭 TV를 챙겨보았다. 폴라에게는 눈처럼 하얀 털만 있었다면 다큐멘터리에 등장하는 북극곰은 새하얀 눈 위에서 자태를 뽐내고 있었기에 더욱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특히나 눈이 쌓인 언덕에서 엎드려 미끄러져 내려오는 북극곰의 모습은 내 마음을 녹여버렸다. 그렇게 북극곰의 귀여운 모습에 반하고 또 반하면서 내 생활은 점점 북극곰으로 가득 차 갔다. 마치 친구들이 아이돌에게 빠지듯 난 북극곰에게 빠져버렸다. 폴라는 내 침대 붙박이였고, 컴퓨터와 휴대폰 바탕화면엔 북극곰 사진이 늘 자리 잡고 있었다. 내 노트북에는 북극곰 스티커가 도배되어 있었고, 북극곰 인형과 갖가지 북극곰 소품들을 학교에 가지고 다녔다. 그러다 보니 주변사람들에게 내 북극곰 사랑은 널리 널리 알려지며 나를 대표하는 대명사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