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주 차 과제 : 장면을 감정으로 나타내기
<직장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은 사람>
정윤 작가님의 글쓰기 수업 5주 차 과제
- 11월 19일 수정했습니다.
회의실 창으로 햇살이 쏟아져 들어왔다. 눈부신 빛의 기둥을 타고 먼지가 떠다녔다. 햇살을 등지고 선 혜림은 눈썹을 찡그리면서 머그잔을 쟁반에 담았다. 평소엔 보이지 않던 먼지 같은 존재가 유난히 도드라지는 순간이 있다면 바로 지금일 거라고 생각했다.
손잡이에 네 손가락이 다 들어갈 만큼 크고 두꺼운 잔들이 탁자 위에 두서없이 놓여 있었다. 쟁반 하나에 전부 들기는 어려울 것 같아 한 손으로 잔 세 개를 움켜쥐었다. 손목이 묵직했다. 놓치지 않으려 팔에 힘을 주는데 오히려 쟁반 위에 올려져 있던 잔들이 도미노처럼 쓰러졌다. 담겨있던 커피가 탁자 아래로 주르륵 흘러내렸다.
옆에 놓인 갑티슈 통에서 잡히는 대로 티슈를 북북 뽑아 손에 쥐었다. 원목 바닥재의 나무 틈 사이로 커피가 빠르게 스며들고 있었다. 쭈그리고 앉아 누런 쓰나미를 막고 있을 때, 회의실 문이 열렸다.
어머, 혜림 씨, 내가 깜빡하고 컵을 가져가서..
혜림과는 1살 차이 나는 정규직 사원 성대리였다. 무릎 꿇고 바닥을 닦고 있는 혜림을 보고 눈이 동그래지더니 이내 상황을 파악했는지, 손에 든 잔을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여기 두면 되나? 어쩔 수 없어, 우리 사장님이 환경문제라면 아주
말하면서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곧 뭔가 생각났다는 듯이,
근데 자기 재계약이?
12월이요.
그지, 얼마 안 남은 거 맞지? 세월 진짜, 네, 여보세요?
전화를 받고 나가는 뒤통수에 대고 혜림은 훅 콧김을 뿜었다. 손에 잡고 있던 티슈가 커피로 흥건해졌다. 누렇게 뭉쳐진 덩어리를 휴지통에 내동댕이 치듯 던졌다. 출렁거리는 휴지통 덮개 위에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일회용품 아웃. 이것도 사장님의 지시라고 했다. 아무리 환경문제에 관심이 많아도 높으신 분이 이런 스티커에까지 일일이 신경 쓰다니 시간이 아주 남아도는 모양이라고 쑥덕거리는 소리가 파다했다. 어쨌든 지난주부터 사무실에는 일회용 종이컵이 사라지고 다회용 컵이 지급되었다. 환경보호를 위해 매우 바람직한 조치였다.
한데 정리정돈을 누가 할지가 문제였다. 아니,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아서 더 문제랄까. 지난주 월요일 아침, 혜림의 부서 팀원 아홉 명이 저마다 손에 머그잔을 들고 회의실에 모였다. 1시간여 회의가 끝나자 다들 자연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남은 건 혜림과 테이블 위에 덩그러니 올려진 컵들 뿐이었다. 그날 혜림은 화장실에서 혼자 컵을 씻었다. 씻긴 했는데 말릴 곳이 없다고 중얼거린 말을 누가 들었는지, 오후에 총무팀에서 동그란 쟁반을 가져왔다. 얼결에 받아 든 혜림이 주위를 둘러봤지만 누구도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그동안 회계업무를 맡아온 계약직 사원 혜림에게 컵 씻는 업무가 추가된다고 일러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바닥을 정리하고 회의실을 나가기 직전 혜림이 뒤를 돌아보았다. 몸을 돌려 저벅저벅 휴지통 앞으로 걸어갔다. 무릎을 굽히고 앉아 덮개에 붙은 스티커를 노려보았다. 노란 바탕에 검정 글씨가 오늘따라 더 크게 보였다. 글씨만 도드라지게 양각을 새긴 듯했다. 손을 뻗어 스티커를 만져보던 그녀는 가장자리를 조심스레 뜯어내기 시작했다.
끈적한 점착제가 스티커를 붙들고 늘어졌다. 그럴수록 혜림도 손가락 끝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입술이 점점 앞으로 모아졌다.
종이가 찢기면서 '일회용품' 네 글자가 먼저 뜯어졌다. 이제 두 글자만 더. 혀밑에 침이 고였다. 꿀꺽 침 삼키는 소리가 고막을 울렸다. 중간에 누가 들어올까 봐 겁이 났지만 차마 돌아볼 수 없었다. 이를 더 꽉 깨물었다. 벽시계 초침 소리가 똑딱거렸다. 폭탄 제거반이 된 심정이었다. 마침내 남은 두 글자도 '아웃'시켰다.
그런데 점착제 자국이 보기 싫게 들러붙어 있었다. 혜림은 손톱을 세워 그마저도 한 줄씩 긁어냈다. 남기면 찜찜할 것 같았다. 발목이 저려왔지만 동작을 멈추거나 자세를 바꿀 수도 없었다.
순간 눈앞이 흐려졌다. 시키지도 않았는데 화장실에서 혼자 컵을 씻고 있는 자신의 정수리가 아른거렸다. 모두에게 깍듯이 공손했던 자신의 말투와 혼자만 달랐던 출입증 색깔 같은 것들도. 스티커를 붙이던 직원들의 웃는 얼굴도 떠올랐다. 그들에게 소리치고 싶었다. 난 일회용품이 아니야, 절대로! 갑자기 혀뿌리가 얼얼해졌다. 마치 목안에서 누군가 잡아당기는 것처럼. 굳게 악문 어금니 사이로 뜨거운 입김이 흘러나왔다.
이윽고 혜림이 몸을 일으켰다. 떼어낸 스티커 조각을 엄지와 검지로 짓이겨 휴지통에 던져 넣은 뒤였다. 쭈그리고 앉아있었던 탓인지 다리가 후들거렸다. 주먹으로 허벅지를 퉁퉁 두드렸다. 어쩐지 옷에 커피 냄새가 나는 것 같기도 했다. 두 손으로 냄새를 털어내는 시늉을 하던 그녀가 창가로 다가갔다. 햇살이 비쳐드는 창문 손잡이를 옆으로 힘껏 돌렸다.
비스듬히 열린 들창으로 외부의 찬 공기가 들어왔다. 마음 같아선 창을 더 활짝 열어젖히고 싶었지만 건물 구조상 어쩔 수 없었다. 그래도 환기가 되고 있는지 냄새가 한결 옅어졌다. 풀풀 떠다니던 먼지도 보이지 않았다.
혜림은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뱉기를 몇 차례 반복했다. 청량한 바람이 자신의 폐 속으로 들어오는 장면을 상상하자 몸이 가벼워지는 느낌이었다. 회의실 밖에서 누군가 그녀를 찾는 소리가 웅웅 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