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림 속에서 흔들리지 않는 삶
중년을 넘긴 어느 시점의 어느 날 사추기가 찾아왔다. 정확히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는 기억되지는 않지만 정말 부럽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세월이 가면서 세상세파에 흔들리지 않을 나만의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참으로 부럽다는 생각에 사로잡혔었다. 일생을 흔들리지 않는 생각으로 살았던 사람들이 어디 있었겠는가? 그럼에도 흔들리지 않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 같았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일생의 어느 시기, 어느 시점, 어떤 순간에 흔들리고 있던 삶을 새로운 다짐으로 흔들리지 않게 살아가는 경험을 반복하면서 살고 있으리라는 것을 상상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어떤 이들은 어느 시기, 어느 시점, 어떤 순간에 홀연히 맛본 황홀한 그 생각으로 나머지 생을 영위해 나간 사람들이 되었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친 것이다. 그 생각 속에는 세상 온갖 평온과 평안, 변화와 변혁을 아우르고 있으며, 높으면서 넓고, 가물거리면서도 선명한 시야를 포함하고 있으리라는 생각에 참으로 부러웠다. 나는 왜 지금 이 시간 이 시점 이 순간에도 흔들리고 있을까? 자괴감도 밀려온 듯했다. 이 감정은 몇 년 동안 나를 괴롭혔다. 스스로 자발적 고립을 자초하면서 서툴지만 나와의 소통을 시도해 보았다. 세상이 보내는 자극에 반응하는 수동적 소통과 더불어 나의 내부에서 일으키는 자극에 대해 반응하는 능동적 소통을 시도해오고 있다. 성인이나 초인이 되려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에 끌려가는 듯한 나의 삶을 정리하면서 다른 시선으로 살아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다른 시선의 삶에서는 내삶을 이끌어 가는 삶을 영위하고 싶었다. 지나온 삶에서 지워졌던 부담이 생각이 바뀐다고 부담이 가볍게 되지는 않을 것이지만 그 부담을 감내할 수 있는 함량을 기르는 삶이 결코 무의미하지는 않으리라는 확신은 있었다. 이것은 성인이나 초인은 되지 못하더라도 내삶에 대해서 만큼은 현자가 될 수 있으리라 믿었다.
어느 겨울날 잿빛 하늘을 배경으로 우뚝 서있는 오래된 느티나무를 만났다. 산골 조용한 마을 어귀에 자리 잡고 거목이 된 나무의 삶이 어떠했을까라는 의문이 생뚱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쁜 일과를 마치고 그곳을 떠날 때는 하얀 눈발이 날렸다. 잎이 떨어진 고목은 마치 한여름 그의 나뭇잎을 품듯이 온몸으로 눈송이들을 품에 안았다. 휘날리던 눈송이가 나뭇가지들 속으로 들어가자 조용히 내려앉는 광경이 언뜻 평온해졌다는 착각이 들었다. 그렇게 그해 나의 겨울은 지나갔다.
봄이 오고 농사일이 시작되고 나무에 새순이 돋아난 그 시점쯤. 다시 그곳을 찾았다. 일을 하는 중간중간에 자그마한 순을 내밀고 있는 나무 쪽으로 시선이 건너간다. 저 수많은 잎을 이끌고 있는 잎이 있을까? 있다면 어디에 있을까? 거대한 고목이 되기까지 저 나무는 수많은 잎을 만들기 위해서 삶을 무게를 감내했겠구나. 그 오래전에 많은 우듬순 중에서 하나의 우듬지를 선택하여 지금의 삶을 살아내고 있구나. 왠지 모를 경외감이 들었다.
우듬순은 우듬지가 되고
우듬지는 큰 나무의 가장 높이 자란 가지를 말한다. 큰 나무가 자신을 지탱하기 위하여 뻗은 가지는 많지만 나무의 중심에서 가장 높은 곳에 가지 끝의 순을 내밀고 있는 가지를 우듬지라고 한다. 우듬지에게 인간과 같은 사고능력이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생존의 본능은 있을 것이다. 우듬지는 시선이 높고 넓어야 한다. 그래야 주변의 다른 종이나 같은 종의 나무와 생존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우듬지는 흔들려도 부러지지 않아야 하고 휘어지더라도 단단함을 갖추어야 한다. 운 좋은 나무는 우듬지가 부러지면 새로운 우듬지가 나타나서 생존을 이어갈 수 있다. 그러나 깊은 산속에 들어가 보면 부러진 우듬지를 대체하지 못하여 숲의 그늘에서 신음하는 모습을 목격하게 된다. 아무리 키가 크다고 하더라도 숲을 만드는 데 참여할 수 있는 우듬지가 없으면 곤란을 겪다가 생을 마감할 수도 있다. 아마도 우듬지는 보이지는 않으나 뿌리와 연결되어 나무를 크고 아름답게 성장시키는 리더의 역할을 하는 것 같다. 우듬지는 자신을 대체할 후보들을 잘 돌봐야 한다. 자신이 곤란을 당하더라도 나무는 생존을 계속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러 개의 우듬지는 만들지 않더라도 우듬순 들은 넉넉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 우듬순 들이 나무의 생존과 우듬지의 생존을 담보해 주기 때문이다.
나뭇잎이 지면 우듬지가 보인다.
겨울 산에 올라 하늘의 높음을 감상하기 좋은 방법이 있다. 인간은 육체의 감각에 의존해서 살아가는 존재들이기에 육체가 감각할 수 있는 한계를 벗어나면 느낌을 갈무리하는 데 애를 먹는다. 육체의 감각이 미칠 수 있는 한계 속으로 대상물을 끌어들이면 느낌을 갈무리하는 데 도움이 된다. 하늘의 높음에 대하여 그 느낌을 말, 글, 영상으로 찾아볼 수도 있겠지만 남들이 전하는 하늘의 높음이 아니라 스스로가 하늘의 높음을 느끼는 것이 의미가 있을 것이다. 겨울 산행에서는 낙엽이 지고 난 이후라서 밑둥치가 크고 높이가 쭉 뻗은 나무를 찾는 것이 어렵지 않다. 높이가 있는 나무들이 모여 있는 곳에서 가장 큰 나무 밑에서 눈을 나무에 붙이고 시선을 하늘로 보내보면 높이를 체감할 수 있다. 하늘이라는 가늠하지 못하는 높이에 가늠할 수 있는 나무를 대비시킴으로써 인간의 느낌을 갈무리할 수 있게 된다. 이때 하늘보다도 아득하게 느껴지는 가지가 우듬지이다. 수많은 가지가 시야를 방해하더라도 아득한 높이에서 하늘거리면서 꼿꼿함을 유지하는 것이 우듬지이다.
논어는 파괴적으로 읽어야 한다
나와의 소통에 관심을 두고 살면서 얻은 기쁨 중에는 육체적 자극에 반응하여 기쁨을 얻은 적도 있지만, 정신적인 자극을 통하여 얻은 기쁨도 있었다. 역설의 상황에 대한 이해에서 오는 기쁨은 육체의 자극을 해소하는 데서 오는 기쁨과는 다른 것이었다.
떨어지면 죽을 수도 있는 나뭇가지 끝에 입으로 가지를 물고 매달려 있는 사람이 있다. 그 밑을 지나가는 사람이 말을 건다. 사람이 물었으니 대답을 해야 한다. 대답을 하자니 떨어질 것이고, 대답하지 않으면 사람대접을 아니한 것이니 안된다. 너는 어찌하겠느냐? 선사(禪師)가 대답을 강요하고 있다. 어떤 제자가 말한다. 그 사람이 어쩌다가 그렇게 되었는지를 먼저 말해주면 대답을 하겠다고.
창조와 파괴는 역설 속에 녹아있는 두 가지 축이다. 창조하려면 파괴되어야 하고 파괴되지 않으면 창조할 수가 없다.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논어를 읽는 이유 중의 하나는 ‘불혹’이라는 단어 때문이 아닐까 한다. 자신의 삶을 흔들림에 흔들리지 않게 살아가고 싶은 사람들은 논어라는 책 속에서 그 실마리를 찾고자 함이 아닐까 한다. 그런데 그 실마리를 쉽게 찾았다는 사람도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도 있다. 실마리를 쉽게 찾았다고 하는 사람들은 공자가 만들어 놓은 흔들리지 않는 틀 속에 자신을 맞춤으로써 흔들리지 않게 되었다고 착각하는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 하지 않을까?. 실마리를 찾지 못했다고 하는 사람들은 논어 속의 글들은 흔들었는데 자신도 같이 흔들리고 있지는 않은지 점검해 봐야 할 것 같다. 공자와 그의 제자들이 했던 말들을 정리해 놓은 논어라는 책을 내가 흔들어야지 논어라는 책이 나를 흔들게 놔두어선 안된다.
불혹(不惑)이라는 말은 공자가 60살을 넘기고 일선에서 은퇴하고 조용히 제자들과 담소를 나누는 과정에서 나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말을 공자가 남겼다는 틀에 갇혀서 생각하면 그저 한자 성어의 지식을 하나 얻는 데 그친다. 사람들의 인생을 획일적으로 정리할 수는 없다. 공자는 말년에 자신의 삶을 뒤돌아보면서 각 연령대를 정리할 수 있는 말을 창작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 뜻에 집중한다면 어떤 사람은 불혹을 다른 연령대인 20대나 30대를 지칭할 수도 있다. 세상의 어떤 현자라도 자신의 시선으로 세상을 본 만큼만 표현할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 현자들은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하는 것이 용기라고 한 것 같다. 다만 그들의 시선이 평범한 사람들보다는 높고 넓다는 것은 인정해야 할 것이다.
나는 나의 시선을 넓히기 위해 더 다양한 이야기들을 읽어보고자 한자 성어를 주목했다. 한자 성어 속에는 단순한 지식만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다양하고 깊은 시선이 담겨 있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하나하나의 한자 성어를 우듬순으로 삼고 내삶을 우듬적 시선으로 채우기 위해 한자 성어는 유용한 적정기술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생활함으로써 나와의 소통에서 가장 큰 충격일 수 있는 지금까지의 나의 삶을 지탱해 주었던 것들을 포기해야 하거나, 자신이 알고 있던 것들과 다르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이것은 나에게 죽기보다도 싫은 것들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중년의 충격으로부터 헤어 나올 수 있는 시선들을 하나씩 쌓아간다면 우듬인의 시선으로 세상을 볼 수 있을 것이라고 희망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