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다움으로 서는 사유

나다움으로 서려고 했던 사람들

by 김기황

동양의 사상에서 몰입하기 어려운 인간들이 있다. 성인(聖人), 군자(君子), 도인(道人) 등은 오래전부터 이상적 인간의 상징으로 등장해 왔다. 현대인의 삶에서도 아직 퇴장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해하려 들면 모호하다. 오랫동안 동양철학을 연구한 사람들도 명쾌한 기준이나 상태를 제시하지는 못하고 있다. 단지 윤리 도덕적으로 언급되는 성품, 품격, 인품, 인격 등과 같은 단어들 앞에 ‘높은’, ‘최고’, ‘최상’이라는 수식어를 동원하여 얼버무리고 만다. 그래서 여전히 그들은 현실 너머의 존재로 남아있다. 그럼에도 누군가는 여전히 이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인다. 때로는 도덕적으로 어떨 때는 윤리적으로 자신과 인간관계에도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보다 착한 행동을, 보다 성숙한 행동을 강요(?) 받기도 한다. 그러지 못할 때는 그들은 절대로 넘볼 수 없는 차원이라는 좌절을 안겨주기도 한다. 이래서 나는 인간이 될 수 없는 존재인가?

때로는 무명의 사람이 이야기하는 말에도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이 있다고 용기를 내본다. 어떤 이는 오르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라고 한다. 다른 이는 쳐다보아야 오르지 말지를 결정할 수 있다고 한다. 성인, 군자, 도인은 동양 사상에서 사용되는 용어이다. 서양 철학에서 이에 대응하는 용어를 살펴보았다.

그리스 철학에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아레테’를 이성적 존재로서 자기 본성에 충실한 삶을 사는 사람들의 덕목으로 제시했다. 우리말로 명확히 번역되지는 않지만 대체로 ‘탁월하다’는 의미를 지닌다고 한다. 당시의 인물 평전인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탁월함이다. 이 탁월함은 지배층이 보여줘야 하는 책임과 의무였다. 그리스의 철학자들은 이들에게 탁월함을 요구하였다. 그리고 이를 행하는 사람들의 행동적이고 실천적인 면을 강조하면서 ‘아레테’라 하였다. 시민들은 능력의 우월함을 보았지만, 철학자는 존재가 제 자리를 충실히 살아내는 상태를 아레테라 하였다.

헬레니즘 철학에서 스토아학파는 ‘지혜로운 자’ ‘행복한 사람’이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이들은 외부의 부귀나 권세가 아닌, 자기 내면의 로고스(logos:자연의 이치)에 따라 사는 것을 최고의 덕으로 삼는다고 하였다. ‘행복한 사람(Eudaimonia)’이란 “좋은 영혼의 상태”, 곧 자신의 본성에 일치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하였다. 동양 사상에서 군자가 ‘천명’을 따르듯이 이들은 로고스를 따르는 사람들이다.

기독교 신비주의 전통에서는 신비가(Mystic), 성자(聖者, Saint)가 이에 맞닿아 있다. 기독교의 성자는 단순히 도덕적 존재가 아니다, 자기 의지를 신의 뜻과 일치시킨 자라고 상정한다. 이들은 내면의 정화와 자기 비움을 통해 ‘하느님의 형상(Imago Dei)’을 실현하려 하는 사람들이다.

실존주의 철학자인 하이데거는 진정한 존재(Authentic Being)라 지칭한다. 그는 ‘본래적 존재(Dasein)’는 타인의 시선이나 사회적 규범이 아니라, 자기 존재의 근원적 가능성에 응답하는 자라고 규정한다. 사르트르는 ‘진정성(authenticité)’을 자기 존재의 책임을 온전히 짊어진 태도라 하였다.

성인, 군자, 도인 등을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동서양에서 별반 차이가 없게 다가온다. 그럼에도 인류가 이러한 사유를 계속하는 이유는 분명히 있다. 명백한 이유는 사람과 인간의 구분이다. 이 구분이 어느 날 한 개인을 특별한 존재로 드러내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 구분이 내면에서 만들어지면 그는 특별한 존재가 되는 것 같다. 그것은 오롯이 자기에게 속하는 희열일 뿐이지만.

사람과 인간의 구분이 자신의 내면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현대의 용어로 표현한다면 ‘나다움’이라 하겠다. 사람은 생명체의 분류에서 동물과 구분되는 용어이다. 동물과 구분되어 살아가는데 머무는 생명체를 사람이라고 한다. 사람은 ‘어떻게 사는가?’만을 묻는다. 인간은 생명체로 구분되어 살아가는 데 머무르지 않는 존재이다.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묻는다. 따라서 인간이라고 불리기 위해서는 그에 상응하는 책임과 의무가 따르게 된다. 그렇다고 사람으로 살아가는 삶에 가치가 없는 것이 아님은 명확하다. 오히려 인류 문명은 이러한 사람들의 노력으로 이루어진 것을 부정할 수는 없으며 그렇게 해서도 안된다. 다만 인류 역사에서는 사람들의 삶을 지탱해 준 인간의 삶을 지향한 사람들에 대한 선망이 지속되었다는 점이다. 이는 ‘나다움’이란 단순한 개성의 표현이 아니라, 사람으로 머무르지 않고 인간으로 서려는 우리에게 희망을 준다.

‘나다움’의 시작은 사람으로서의 삶에 머무르지 않고 인간으로서의 삶을 영위해 보겠다는 자각에서 시작된다. 그 자각이 인생의 어느 시기에 일어날지는 아무도 모른다. 장담하지만 열심히 노력한다고 해서 찾아지는 것도 아니다. 분명한 것은 어느 순간 지나간 순간 속에 들어 있었음을 찰나적으로 스칠 뿐이다. 부처는 이것을 ‘인연’이라 하였고, 공자는 이것을 ‘입문(入門)’이라 하였으며, 노자는 ‘가물가물하다’고 하였다. 부처는 사람들의 삶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에 대한 의미를 알아내려는 인연이 있고 나서 깨달음에 이르렀다. 공자는 입문에 담겨 있는 비밀을 깨닫고 평생을 그 비밀을 풀기 위해 천하를 떠돌아다녔다. 노자는 세상의 이치를 가물가물하다는 뜻의 현(玄) 자를 남기고 종적을 감췄다. 부처의 나다움은 자신이 깨달은 삶의 의미를 다른 사람들과 나누면서 산 삶이다. 공자의 나다움은 지극함으로 자신을 다독인 결과 세상의 어떤 소리에도 흔들리지 않고, 마음 가는 대로 행해도 법도에 어긋나지 않는다는 조용한 미소 속에 있다. 노자의 나다움은 흐르다가 멈추고, 멈추었다가 흐르는 물처럼 세상의 흐름에 녹아들어 전설이 되었다.

성인, 군자, 도인들의 나다움은 이미 전설이 되어버렸다. 이들에게 입혀진 전설은 그들이 원한 것은 아니다. 인간으로서 살아보겠다는 사람들이 그 삶이 결단코 쉽지 않음을 알아차리고 덧씌운 원망(怨望)이며 동시에 그 삶을 갈망한 원망(願望)이다. 삶의 대부분이 수치화되고 가시화되는 현대인의 삶은 그래서 더 혼란해진다. 많은 사람들이 높은 연봉과 고가의 주거, 고가의 소유물, 소유할 수 없는 명예 등을 꿈과 희망이라는 이름으로 매달린다. 그리고 여기에 도달하지 못하면서 실패라는 낙인을 찍으려고 한다. 이러한 세상에서 ‘나다움으로 살아간다’는 말은 조롱처럼 들리기도 한다. 어쩌면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도 이 글을 읽고 있는 사람들도 여기서 자유로울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원망(怨望)이고 원망(願望)이다. 그러나 어쩌면 이러한 조소를 견디는 태도야말로 나다움의 첫걸음인지도 모른다.

나다움은 지극한 태도를 견지하려는 지난한 과정이다. 그 끝은 알 수 없다. 부처도 공자도 노자도 나다움에서 있어서는 미완결의 삶이었다. 그럼에도 우리가 그들을 성인, 군자, 도인이라 부르는 것은 그들이 완전했기 때문이 아니라, 끝내 완성될 수 없는 길을 살아냈기 때문이다. 나다움이란, 사람으로 머무르지 않고 인간으로 서려는 자의 지극한 태도이며, 결코 완성될 수 없음을 알면서도 끝내 그 길을 걷고자 하는 인간의 안간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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