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다움으로 서는 사유

더 나은 나, 어른

by 김기황

더 나은 나’로 설 수 있는가?

노자의 도덕경(道德經)은 철학적, 심리적, 사회적 관심으로 오랜 시간 읽히고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도(道)와 덕(德)에 주목한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의도를 단 한 글자에 담았다. 먼저 그는 도(道)를 도(道)라 하고 이름(名)을 이름(名)이라 하면 도(道)와 이름(名)이라 할 수 없다고 했다. 이 얼마나 난해한 말인가? 도(道)를 도(道)라고 이름(名)을 이름(名)이라 하지 못한다고 한다면 이런 말을 왜 하는가? 노자는 이런 이율배반적이며 역설적인 난해함을 현(玄) 자에 담았다. 흔히들 ‘검다, 어둡다’ 등으로 뜻을 새기지만 ‘가물가물하다’가 글의 내용과 더 맞다. 노자가 설명하려고 하는 것은 도와 덕이 아니라 세상의 이치이기 때문이다. 세상의 이치는 도와 덕을 넘어서는 차원이다. 도와 덕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세상의 이치를 콕 집어 명확하게 부를 수 있는 이름은 없다. 다만 사람들이 명확하다고 하는 확신하는 이름들이 난무할 뿐이다. 그렇다고 도(道)의 본질이 단지 불확실성인 것은 아니다. 도는 불확실한 것들을 품은 흐름이며 그 흐름에는 당연히 생명의 잠재성도 담겨 있다.

사람은 태어나서 부모의 보살핌과 주위의 관심으로 성장해 간다. 사람을 응대하는 기술을 익히게 되면 타인과의 교류가 활발해진다. 사람들과의 교류만으로는 부족해짐을 느낀 사람들은 학습과 공부를 한다. 성년이 되면 자신의 가치관과 삶을 유지할 수 있는 능력을 계발하고 숙련하여 자신의 삶을 일구어 가는 길을 들어선다. 이러한 자질을 쌓음으로 사람과 동물을 구분할 수 있게 된다. 단지 본능에 충실한 동물과 같은 층위에 머물지 않겠다는 자각을 한 사람을 비로소 인간이라 한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불혹. 마흔 즈음의 흔들림이 가혹(佳惑)인지 가혹(苛酷)인지가 가물가물한 것은 이제까지의 인간 삶에 대한 중간 점검이다. 이 가물가물한 흔들림을 잘 견딘 사람에게는 상대에 대한 너그러움의 품격이 갖추어진다. 상대에 대한 너그러움은 시야가 넓기에 얻을 수 있는 품격이다. 더 나아가 자신에 대한 관대함을 얻게 되면 품위를 얻게 된다. 품위를 얻으면 세상을 고립된 경계지음으로 살피지 않는다. 그는 세상의 이치를 다양하게 인식하는 경계품음의 태도를 품게 된다. 그리하여 영원한 생명의 흐름이 손을 뻗으면 자연스레 그 손을 잡을 수 있는 어른이 된다. 어른이기에 가능한 태도다. 어른은 ‘더 나은 나’가 되기 위해서 자신을 살피고 살핀 사람이다. ‘더 나은 나’가 되기 위해서는 가물가물하는 세상에서 뚜렷하다고 확신할 수 있는 자신만의 가치를 찾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렇게 찾은 가치가 있어야 ‘더 나은 나의 삶’을 가꾸어 갈 수 있다.

싯다르타가 지향했던 깨달음의 완성형은 불타(佛陀)이다. 공자가 지향했던 깨달음의 완성형은 봉(鳳)이다. 장자가 지향했던 깨달음의 완성형은 붕(鵬)이다. 싯다르타가 동물의 본성을 거부하고 인간이 되겠다는 결심을 했다. 자신의 고립된 성(城)을 벗어나 자발적 고독으로 세상과 맞섰다. 그리고 불타가 되었다. 싯다르타의 이야기가 전해지지도 않았음에도 이역만리에서 깨달음에 관한 다른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나타났다. 싯다르타의 이야기는 손에 잘 잡히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구체적인 실물을 상상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실물은 본 사람은 없지만 ‘나의 삶’에 충실하면 혹시 볼 수도 있다는 희망을 담았다. 그러나 사람들이 ‘나의 삶’에 충실하기를 바랐던 그의 바람은 엉뚱하게 흐르기도 하였다. 그의 이야기는 사람들에게 희망과 좌절을 동시에 맛보게 하였다. 나의 세상은 내가 태어나면서부터 시작된다. 여기의 세상은 나의 세상이 아니다. 내가 존재하기 이전부터 있는 세상이다. 나의 존재와는 상관없이 저절로 흘러가는 세상이다. 이렇게 흐르는 세상에서 나를 인식하는 그때부터 나의 세상이 흘러간다. 당연히 세상은 나를 포함하면서 나를 제외한 모든 것들의 세상과 중첩되어 존재한다. 그러니 나의 세상을 인식하는 일은 생각보다 혼란하고 곤란하고 어렵고 가물가물하다. 그렇게 공자는 봉(鳳)이라는 내삶의 상징물을 던져놓고 갔다. 이 상징물이 너무도 소중했던 그의 사람들은 봉(鳳)을 땅에 주저앉혀버렸다. 사람들은 봉(鳳)이 세상 어딘가에 있을 것이라는 기대와 황홀하다는 그 모습을 보기 위해서 어지럽게 쏠려 다녔다. 모두가 그렇게 봉(鳳)을 보기 위해 애쓰고 있을 때 또 한 사람이 나타난다. 땅에 주저앉힌 봉(鳳)이 아름다울 수도 있을 것이라 하였다. 눈에 보이는 아름다움을 넘어선 아름다움도 볼 수 있다고 외치는 용기를 낸다. 그래서 세상에서 일어나는 것들과 애쓰는 것들을 이겨내면 다른 세상을 볼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의 깨달음을 하늘로 날려 보냈다. 그래서 장자가 지향했던 깨달음의 완성형은 붕(鵬)이다. 붕(鵬)에 대한 절실한 구함이 있다면 장자의 다른 이야기는 읽을 필요가 없다. 지친 용이 개천에서 쉰다고 용이 아닌 것은 아니다. 용은 개천에서 살아가는 모기가 덤빈다고 해서 짜증을 내지는 않듯이 다른 차원의 존재가 되었는데 달리 구할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이 비밀은 오랫동안 사람들에게 전해졌으나 비밀이라는 것이 알려지면 비밀이 되지 않는지라 사람들이 다시 공자의 봉(鳳)을 찾기 시작하자 장자가 하늘로 놓아준 붕(鵬)은 잊혀 갔다. 그러나 인간 세상에 비밀은 없었다. 불타(佛陀)와 봉(鳳)과 붕(鵬)이 감추고 있는 비밀은 부처가 되고 봉(鳳)을 눈으로 보고 붕(鵬)을 타고 하늘을 날 때 나에게 일어나는 현상이 무엇인가라는 것이다? 즉, 가물가물한 세상을 가물가물하지 않게 살아가는 내삶을 예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비밀을 싯다르타의 제자가 되기를 거부하고 부처가 되기를 작정한 사람들이 또 가물가물하게 만들어 버렸다. 그들은 부처가 되고 봉(鳳)을 보고 붕(鵬)이 되어 하늘을 나는 것은 엄청난 이야기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부처가 되고 봉(鳳)을 보고 붕(鵬)이 되어 하늘을 날게 되어도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하였다. 그저 일상의 세상이 흘러갈 뿐이라고 하였다. 내삶을 예찬할 수 있는 사람으로 살아가려는 평범한 사람들의 희망을 허망하게 꺾어 버린다. 평범한 사람들을 가물가물한 세상으로 다시 내몰아 허망하게 만들어 버린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의 과격한 애정(?) 속에서 감춰 놓은 실마리를 찾아내야 한다. 스스로 ‘더 나은 나’의 삶을 가꾸어 이 허망한 이야기에서 벗어나도록 안간힘을 써봐야 한다. 그래서 부처가 되기로, 봉(鳳)을 찾기로, 붕(鵬)이 되어 하늘을 날기를 꿈꾸어 본다. 그때는 그 꿈 너머의 세상을 넘겨다보는 만용을 부려도 좋지 않을까?

내삶은 어떤 누구도 같이 갈 사람, 같이 가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지만, 반드시 가야만 하는 나의 일상이다. 인생은 같이 가고자 하는 사람은 없지만, 그래도 나서야 하는 길이다. 삶은 아무도 대답해 주지는 않지만, 나는 반드시 답을 찾아야 하는 일상이다. 내삶을 일구어가기 위해서는 지금 내삶의 찰나(刹那)의 모습을 놓쳐서는 곤란해진다. 인생에서 혼란이 일어난다고 해서 모든 것이 무너지거나 파괴되지는 않는다. 혼란은 우리의 머릿속에 있을 뿐이다. 삶에서의 혼란은 결국, 내가 그동안 지녔던 가치, 기준이 더 이상 사회의 가치, 기준과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일상과 삶에서의 이 혼란은 찰나로 왔다가 사라진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이 흔들리지 않는 일상과 삶을 일구어 가는 예방법이기는 하다. 그러나 찰나는 예고도 없이 오기에 예방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놓치지 않으려고 애쓸 수밖에 없는 운명에 발목이 잡힌다. 안간힘으로 애쓰고 있는 찰나를 만나면 내가 믿고 있었던 세상을 규정하는 최고의 가치들에서 벗어나 볼 필요가 있다. 특히 나는 바다를 떠다니는 배(船) 임에도 등대라고 착각하는 것은 아닌지를 살펴야 한다. 인류가 믿어왔던 초감성의 세계, 이상과 이념, 그리고 모든 사람의 인생을 규정하며 밑받침하는 목표와 근거들을 최고의 가치들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것이 나에게는 어떤 의미인가? 한번 생각해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가치들을 줍고 챙겨서 인류가 만든 가치들이 아닌 내삶을 일구어가는 가치들을 만들 필요가 있다.

인류가 만든 최고의 가치는 진선미(眞善美)로 통용되고 있다. 이 가치들은 자기를 넘어서 자기실현과 인간임을 증명하고 ‘더 나은 나’를 설명하려는 의욕을 심어주고, 조건들을 제시하고 알려준다. 이것들은 가물가물한 세상에서 나로서 서는 힘을 길러줄 수 있다. 일상에서 우리는 법, 윤리, 도덕 등을 무시하고 살아갈 수는 없다. 그렇다고 법, 윤리, 도덕 등에 얽매여서 살아가는 태도도 곤란하기는 마찬가지다. ‘더 나은 나’가 되어서 낭만적인 삶을 사는 어른이 되기 위해서는 법, 윤리, 도덕 등에 관하여 주관적 자기 기준을 세우는 노력이 필요하다. 주관적 자기 기준이란 법, 윤리, 도덕 등에 관하여 사회가 인정하는 수준보다는 우위를 갖는 자신의 사유들이다. 법, 윤리, 도덕 등에 관한 주관적 자기 기준은 사회가 부여한 가치보다는 더 나은 수준으로 높이는 기준이라야 한다. 이러한 태도라야 흔들림의 불안에 매몰되지 않으며 고요함 속에서도 흔들림을 찾아서 ‘더 나은 나’가 되기 위한 노력을 지속할 수 있게 된다.

서양 철학자 하이데거는 진선미(眞善美)를 일목요연하게 설명하였다. 진(眞)은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며, 선(善)은 모든 것을 어디에서나 이끌어 가는 흐름이나 목표이며, 미(美)는 전체로서의 존재자의 질서나 통일이다. 이 가치들의 순위 매기기는 분명히 말초적 감각을 자극하려고 만든 저속함이 포장된 작태다. 그러한 논쟁에 휘말리지 말고 진선미에서 변화를 읽어낼 수 있는 시선을 가질 수 있다면, 이 가치들을 ‘더 나은 나’의 내삶을 가꾸어 가는 도구로써 충분히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인간이라는 생명체를 규정하는 본질의 터전은 삶이다. 인생이 삶이고 일상이 삶인 삶은 이 터전에서 이루어지는 기나긴 여정이다. 사람의 행동을 빨리하면 춤이 되고 천천히 하면 행동거지가 된다. 그러나 행동을 빨리해도 춤이 되지 않고 천천히 해도 행동거지가 되지 못하게 될 수도 있다. 가치는 어떤 조건에서는 변한다. 다만 가치는 오랫동안 지지를 받고 오랫동안 지속될 것으로 인정되는 것에 부여된다. 가치들은 끊임없이 평가가 이루어지고 이전에 평가했던 가치들이 무가치화(無價値化)되기도 한다. 무가치화는 가치가 없어진 것이 아닌 가치가 변화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를 가치전도(價値顚倒)라 한다. 이제 개인은 가치를 새롭게 설정하여야 한다. 모든 새로운 가치들은 새로운 원리로 설정되어야 한다. 개인의 삶, 즉 내삶의 중요성이 무엇보다도 가치 설정의 핵심이 되어야 하는 현실이다. 아무리 지식과 정보가 홍수처럼 흘러넘치는 시대이지만 내삶의 지식과 정보는 누구도 알려주지 않으며 알려줄 수 없는 비밀일 뿐이다. 그리고 그 비밀을 파헤친 사람은 비밀인지도 모르고 사라져 간다. 따라서 개인의 내삶은 아직도 가치전도가 되지 않은 추구할 가치가 있다. 그리고 진선미는 철옹성과 같은 절대로 변화하지 않는 가치가 아니라 변화를 통찰할 수 있는 도구가 된다.

인간의 시선(視線)이란 가치(價値)를 찾는 것이다. 가치는 시점(時點)이다. 그때그때의(時) 봄(視)을 통하여 다음의 봄(視)을 위하여 설정되어야 한다. 가치는 그것이 유효하고 알맞기에 가치이지만, 고정된 것은 아니다. 가치는 그 모습을 바꿀 수 있는 사람에게는 유효한 효능을 준다. 고대의 한자문화권에서 만들어진 가치, 인류가 발견한 가치들이 현대에 와서 그 가치를 의심받고 있는 것은 당연한 현상이다. 그러한 가치들이 가치를 잃는 것이 아니라, 다른 가치로 대체되고 있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아직도 최고의 가치로 인정받는 가치를 다시 설정하는 노력이 지속되는 것이다. 가치는 유지와 향상이 동시에 만족되어야 한다. 그것은 삶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상향의 의지로 거대한 흐름을 감내함

태초의 생명이 시작된 이후로 이어져 온 생명의 흐름을 끊어지지 않게 살아온 우리는 모두 대단하고 아름다운 존재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니 생명이라는 개념은 무거울 수밖에 없는 주제다. 길고 기나긴 긴 생명의 흐름에서 어느 순간 다름의 아름다움을 받아들인 존재가 인간들이다. 그래서 인간의 유전자에는 다름이라는 색깔이 각인되어 있다. 인간들은 생명의 흐름과 다름의 아름다움을 한데 묶어서 아름답게 ‘삶’이라고 한다. 생명의 흐름과 관련되는 모든 것들을 한데 모아서 ‘삶’이라는 아름다움을 실행한 것이다. 선한 행위도 악한 행위도 포함되기에 우리는 삶이라는 단어를 대면할 때는 무겁고 신중하고 진중해야 한다. 그렇지 못한 행위를 하는 것은 아름답지 못한 것이다. 우리가 그러한 경거망동을 하는 것은 ‘삶의 가치’에 집착하거나 매달리기 때문이다. 삶은 세상이고 가치는 세상이 부여한 것이다. 삶의 가치가 아니라 ‘내삶’이라는 참(眞)에 집착해야 한다. 세상이 부여한 가치가 아니라 ‘내삶’이 찾고 만든 ‘내삶의 가치’에 매달려야 한다. 세상이 만들어 놓은 삶의 가치들을 내삶 속에서 소화할 수 있는가? 내삶이 세상을 흔드는가? 세상이 내삶을 흔드는가? 바쁜데 언제 이런 생각을 하느냐고 불평을 토로하고 있다면 아름다운 내삶이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상상력은 미래만을 위해서 활용되지는 않는다. 과거의 일들도 상상력에 동원된다. 과거를 기억, 추억, 지식, 정보라는 단어 속에 가두어 두고 있지만은 말아야 한다. 길고 기나긴 긴 생명의 흐름에서 사람의 몸을 하고 태어난 생명들은 무수히 많았다. 만약 이 사람들을 길고 기나긴 긴 생명의 흐름에서 떨어진 순간들을 시각 순으로 나열하여 아주 작은 검은 점으로 나타낸다고 상상해 보자. 그러면 나의 눈앞에는 거대한 암흑이 존재할 것이다. 그들의 죽음의 이유를 나열한다면 세상과 삶이 드러날 수 있을까? 아니라고 생각된다면 내삶을 일구어가기 위해서는 내가 던질 질문은 두 가지다. 하나는 그들은 왜 죽어야 하는지를 알고 있었을까?이고 둘째는 인간으로 태어났음을 알았을까?이다. 태어나는 사람들이 모두가 자신이 죽어야 하는 이유를 알고 죽지는 못한다. 특히 전쟁과 같은 혼란스러운 상황에서는 더욱 그럴 것이다. 죽어야 하는 이유를 내면으로 받아들인 사람들의 죽음을 호상(好喪)이라고 할 수는 있다. 그렇다고 호상의 당사자들이 인간으로 태어났음을 절실히 깨달았다고 볼 수는 없다. 그저 어쩌다 우연히 그런 죽음을 맞은 것이다. 그래서 내삶을 일구고자 하는 사람들은 적극적으로 인간임을 알아보고자 하는 사람들이다.

형이상학이 철학을 품을 수 없고, 힐링이 사람 마음보다도 크거나 높을 수는 없는 것처럼, 인간의 지혜와 행복이 인간의 삶을 밀어낼 수는 없다. 삶에는 지혜와 행복이 포함되어 있지만 전부일 수는 없다. 그래서 현자들은 삶 속에서 행복과 지혜를 찾으려 하였으나 행복과 지혜로움 속에서 삶을 찾으려고 하지는 않았다. 삶, 철학, 힐링은 인간 감정의 고저가 아니라 범위에 관련된 단어이다. 넓어야 높이가 생길 수 있다. 넓은 삶을 생각해야 기쁨 노여움 슬픔 즐거움 사랑 미움 하고자 함(喜怒哀樂愛惡慾)의 인간 감정을 품을 수 있게 된다. 단순히 자신의 감정이 유쾌하고 상쾌하고 즐겁고 기쁜 것만으로는 지속적인 삶을 유지하기는 어렵다. 삶에는 그 반대편의 감정이 반드시 수반되기 마련이다. 삶의 균형을 찾는다는 것은 어떤 지점을 찾는 것이 아니라 상태를 알아보는 것이다. 시간의 물리적 크기를 가지는 것을 세월이라고 한다면 인간의 세월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을 삶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 삶 속에서 지혜와 행복을 보아야 한다. 모든 것은 공간 속에 머물러 있어야 평안하다. 행복과 지혜를 아우르는 삶도 공간 속에서 이루어진다. 이 공간 속에서 이루어지는 변화에서 내삶이라는 참(眞)과 내삶을 일구는 선(善)과 내삶의 아름다움(美)를 예민하게 살피는 삶은 결단코 가볍지 않다. 그러므로 인간은 주어진 생명을 마치는 단순한 존재라 하기에는 아쉽다. 인간은 주어진 시간을 보내는 단순한 존재라 하기에는 허무하다. 인간은 주어진 공간을 차지만 하는 단순한 존재라 하기에는 귀중하다. 이같이 단순하게 생각할 수 없는 삶이라는 단어의 무게를 감당하고 감내해야만 하는 존재이다. 그러기에 존재로서 떳떳할 수 있는 존재가 되어야만 한다. 존재로서 떳떳하다는 것은, 내가 만든 가치로 내삶을 감내하는 일이다. 이 여정을 진선미(眞善美)가 응원하고 있다.

작가의 이전글'나'다움으로 서는 사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