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다움으로 서는 사유

나다움을 만드는 도구들.

by 김기황

대숲에 돌멩이 하나가 떨어지면서 나는 소리, 그 맑은 울림에서 깨달음을 얻었다는 선승이 있었다. 이 희열이 책을 읽는 즐거움에도 있다. 인간의 모든 행위가 나다움으로 흐르는 과정임에는 틀림이 없다. 다만 그 무늬의 재료와 모양이 다를 뿐이다. 노자는 오색(五色), 오미(五味), 오성(五聲) 만이 아름답다고 하지는 않았다. 그것만으로는 세상을 설명할 수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선인(先人)은 하나에서 모든 것이 시작된다고도 하였다. 그래서 그 하나를 알아내겠다는 미욱한 태도는 나를 초라하게 만든다. 그 하나는 응축된 작은 점이 아니었다. 그 하나는 모든 것을 끌어안아서 하나로는 보이지 않는 하나였다. 그것이 흐름일 수도, 간단한 공식일 수도, 그리고 나다움일 수도 있다.

인문 교양을 위한 물리학, 수학 등의 책을 읽는 경우가 가끔 있다. 이러한 독서에서 오는 아쉬움이 있다. 좀 더 일찍 관심을 가졌었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이다. 이들의 저서에는 자신의 연구 분야와 삶을 연결하는 성찰이 엿보이기 때문이다. 소위 인문 분야의 저자들이 물리학이나 수학의 내용들을 언급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그런데 물리학, 수학자들의 저작에는 삶에 대한 성찰에 도움이 되는 내용이 들어 있기도 하다. 한때는 이 점이 이상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물리학 공식 중의 하나인 F=ma, 철학적 의미로는 ‘힘이 있어야 변화가 생긴다’의 해설을 접하고 나서는 궁금증이 해소되었다. 모든 것을 끌어안은 하나인 흐름을 설명해 주기 때문이다. 하나에 힘이 생기면 둘이 되고 둘이 셋이 된다. 하나는 존재이고, 둘은 관계이며, 셋은 그 관계가 빚는 변화다. 그리고 여기의 하나와 둘은 고정되어 있지 않고 흐름 속에서 다시 하나와 둘이 되는 변화를 지속하는 흐름이 이어진다.

인간의 삶에도 이러한 변화를 설명해 주는 간단하고 아름다운 공식이 있다면 좋겠다. 그러면 나다움이라는 답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물리학이나 수학에 몰두하는 사람들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매달렸음에도 삶의 공식은 만들어지지 않았다. 인류는 앞으로도 그것은 허황한 욕심이라는 결론을 내린 지 오래다. 그래서 다시 하나로 돌아간다. 인간의 삶은 과정으로서의 나다움이다.

과정으로서의 나다움은 모든 것을 품은 흐름이라는 하나이다. 물리학은 F=ma라는 하나의 공식만으로는 설명하지는 못한다. 하나의 공식으로 설명이 부족하여 둘을 만들어 내고 셋을 만들어 냈다. 인류가 사람을 인간으로 설명하기 위해 만들어 낸 도구들에는 진선미(眞善美)가 있다.

더 나은 나를 위한 삶의 도구로서 진(眞)

하이데거는 진(眞)을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라고 했다. 현실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참’이다. 여기에 어떤 수식어도 붙지 않는다. ‘참’의 앞에도 뒤에도 수식어는 붙지 않아야 한다. 참은 거짓의 반대라는 도덕적 윤리적 판단을 포함하고 있기에 일상적 가치들보다 우위에 있다. 참은 존재의 드러남의 이전의 상태이다. 그래서 참은 존재가 드러날 때 세상에 의해서 왜곡되기 전의 상태에서 찾아야 한다. 이 왜곡은 나와 나를 포함한 세상이 만들어 내는 시선이다. 그러나 또한 참은 세상이 품고 있는 존재이다. 타인과 나의 시선이 제거되고 보이는 ‘무엇’이다. ‘참’은 ‘보이는’ 감각인 시각만으로 인지하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모든 감각이 동원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나의 감각을 소홀히 하지 않는 것은 매우 중요한 태도이다. 그래서 ‘참(眞)’은 가치가 배제된 본래적이고 근원적인 존재가 드러난 그대로의 날것을 의미함으로써 가치가 되어 가물가물함 속으로 던져진다. 그래서 ‘참’이라는 말은 어쩌면 단순하게 좋은 것을, 어쩌면 신중하게 드러난 날 것 그대로에 부합하는 것을 수식하려고 사용된 것이다. 우리는 신중하게 사용된 그곳에다 방점을 찍고 가치를 부여하여 금과옥조로 만들어 놓았다. 그래서 ‘참’이란 말이 출현하면 별 고민도 없이 행동하기도 한다. 참은 근원적이고 본래적이며 날것을 찾는 도구로 사용되는 것이어야 한다.

인류의 역사에는 권력의 힘으로 진실을 은폐한 흔적들은 많이 있다. 역사를 권력을 가졌던 사람들의 기록이라고 흘겨보는 시각이 있는가 하면 사소한 것이라 할지라도 참(眞)을 구하면 품격이 올라갈 수 있다는 시각이 있다. 정조가 조선을 통치할 때 번암 채제공은 삼정승의 자리를 모두 거친 공식 권력의 2인 자였다. 그는 서학의 묵인을 주장하며 탄압하려는 사람들과 맞섰다고 한다. 우리의 눈길을 끄는 채제공과 관련된 유물 중에 일반적이지 않은 초상화가 있다. 그의 초상화는 눈동자가 정면을 응시하지 않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권력자가 아니더라도 그런 모습은 남기려 하지 않을 것이다. 권력을 가진 사람으로서 그런 모습을 남기지 않으려고 했다면 별 저항이 없이 가능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러한 초상화를 남긴 것을 타인들의 험담이 부담스러웠다고 하는 시선은 옹졸해 보인다. 이는 조선 선비들의 끊임없는 삶에 대한 치열한 사유 중에서 ‘더 나은 나’가 되기 위한 참(眞)을 추구하는 태도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조선의 선비들을 결코 뒷방 노인이라거나 꼰대라고 가치를 깎아내릴 수 없는 이유이다.


더 나은 나를 위한 삶의 도구로서 선(善)

하이데거에 따르면 선(善)은 모든 것을 어디에서나 이끌어 가는 흐름이나 목표라고 하였다. 그래서 하이데거의 선은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가치판단만은 아닌 것 같다. 착함(善)이라는 선명함을 확보했을 때의 선은 도덕적 윤리적 판단 가치의 명사형인 선(善)이다. 이때 인간의 눈앞에는 두 가지의 선택이 놓이게 된다. 머무름과 나아감이다. 여기에서 선(善)은 동사형인 선(善)이다. 스피노자는 “우리는 그것을 선이라 판단하기 때문에 그것을 향하여 노력하고 의지하며 충동을 느끼고 욕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와 반대로 노력하고 의지하며 충동을 느끼고 욕구하기 때문에 어떤 것을 선이라고 판단한다.”라고 하였다. 머무르는 것은 경험에 매몰되고 경력에 얽매이는 것이고 나아가면 탁월해질 수는 있지만 확실치는 않다. 그러함에도 인간이 나아가려는 것은 가능성, 도전, 그리고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려는 욕구가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자기의 존재를 증명하려는 상향의지의 굳건함이다. 이 굳건함을 유지하고 격려하는 가치가 선(善)이다. 선은 추구할 가치이자 추구할 수 있도록 하는 도구이다. 그래서 가치의 가치 속에 포함되어진다.

물이 낮은 곳을 향하여 잠시라도 멈추지 않고 흐르듯이 선(善)은 내삶을 일구면서 살아가려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추구할 가치를 만드는 노력을 응원한다. 노자도 도(道)를 얻으려는 사람들의 태도를 선(善)이라는 글자에 담아서 전하고 있다. 노자는 그의 사상의 핵심인 무위(無爲)를 유위(有爲)의 최고의 가치인 선(善)에 담아서 전하고 있다. 그러나 선(善)을 도덕적 윤리적 가치에만 매달려서 사유한다면 노자의 미소는 보지 못할 것이다. 명사로서의 선(善)과 동사로서의 선(善)을 볼 수 있는 시선을 키워야 ‘더 나은 나’로서 내 삶을 살아가는 더 높은 시선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노자가 이야기한 상선약수(上善若水)는 다른 시각에서 살펴볼 수도 있다. 내가 끊임없이 추구할만한 최고의 가치라면 물이 흐르듯이 지속해야 한다고 해석하는 것이 내삶을 일구어 가는데 필요한 시선일 것이다. 최고의 선(善)은 물과 같은 성질을 갖는다고 하는 해설만을 지혜로 알고 살아가는 것은 어쩌면 세상이 만든 가치에 매여서 살아가는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 학습한 존재로 살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에게 지혜는 물과 같이 끊임없이 흐르거나, 세상이 부여한 고정된 가치로만 존재하지는 않는다. 지혜는 순간이고 찰나(刹那)이다. 자신의 일상에서 틈틈이 행복한 순간을 경험했을 때 우리는 자신이 지혜로웠다고 생각한다. 누구나 알듯이 지나간 순간이었기에 지혜로웠고 행복하였다는 느낌이나 기분을 회상할 수 있다. 지혜는 자신의 시선이 일상에서 발휘되는 순간이며 행복은 지혜가 발휘되는 순간에 느끼는 즐거운 감정이다. 선(善)은 지혜의 이러한 과정의 흐름을 이야기하기도 하는 것이다.

‘더 나은 나’로 살 것을 응원하였던 장자는 선(善)을 변화로 인식하지 못해서 벌어지는 이야기도 한다. 동사(動詞)로서의 선(善) 하지 못했을 때 받는 수모는 송나라의 후예(後裔)들만이 받은 것은 아니다. 그는 수주대토(守株待兎)에서 내삶을 살았던 선조들의 후손인 송나라 사람을 어리석은 사람으로 묘사하고 있다. 장자가 보기에 송나라는 내삶을 살고자 하는 고귀한 정신을 잃은 나라였다. 내삶을 살고자 하는 새로운 사람들인 주(周) 나라가 세워준 나라가 송(宋)이었다. 주(周) 나라에 밀려난 은(殷) 나라의 후손들을 불쌍히 여겨서 만들어진 나라다. 은(殷)의 갑골 문화는 기억 속에만 존재하도록 강요하였다. 그래서 내삶을 살겠다는 의지가 박탈된 사람들이 세상이 만들어 놓은 베어진 나무그루터기를 지켜보며 속절없이 속을 태우고 있다. 세상은 그 모습을 바꾸어 갈 뿐 변화를 은폐한 선(善)을 우연히 세상에 들여보내어 사람들의 속을 간지럽힌다. 로또, 골든 여, 골든 남 등과 같은 용어가 판치는 것은 확률, 조건만남, 결혼으로 토끼를 얻으려는 송나라 사람들의 후예일 뿐이다.


더 나은 나를 위한 삶의 도구로서 미(美)

하이데거는 미(美)는 전체로서의 존재자의 질서나 통일이라고 하였다. 하이데거의 미에 대한 설명에서 유추할 수 있는 미(美)는 참(眞)에 관하여 끊임없이(善) 사유하면서 얻은 시선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절제, 통일, 질서를 순서와 순위를 염두에 두지 않고 찰나(刹那)로 파악하는 것이다. 미(美)란 굳건한 이성으로 조화를 이루고 정신을 고유의 평온한 상태로 유지할 때 부여하는 가치다. 그것의 대상은 인간이고 인간의 삶이며 당연히 우리에게는 무엇보다도 중요한 내삶이다. 미(美)는 진(眞)과 선(善)을 함유하면서 미(美)도 포함되는 더 큰 범주가 필요해진다. 참을 끊임없이 추구하면서 그곳에서 질서와 통일을 동시에 품을 수 있는 개념이 필요해진다. 대부분의 각 인류 문화권에는 명확하게 인지되지 않는 난해한 문제를 창조자, 조물주에게 돌렸다. 진선미(眞善美)를 포용하면서 진선미가 각각의 가치가 발현될 수 있는 터전이 있어야 진선미의 필요성이 대두된다. 진선미의 활동 터전은 변화이다. 즉, 진선미는 변화를 읽어내는 도구로 활용되는 것이 중요하다. 금과옥조와 같이 변화되기 어렵거나 변동되기 힘든 가치로 박제되어서는 곤란하다. 그래서 내삶을 미(美)로 파악한다는 것은 외부의 피조물을 감상하는 아름다움만이어서는 곤란하다. 굳건한 이성으로 내삶 속에도 변화가 살아있음을 알아차리고 내삶을 감탄하는 아름다움을 토해내면서 정신을 고유의 평온한 상태로 유지하면서 조화를 이루어 가면 ‘더 나은 나’로서 낭만적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아름답다’의 어원을 ‘나(我)다움’이라고 해설한 사람이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나는 확신할 수 있다. 그 사람은 자신의 본성에 따라 참(眞)됨을 보존하여 끊임없이(善) 고요함을 돌아보며 ‘나다움(美)’의 태도를 견지하였을 것이라고. ‘더 나은 나’를 위하여 내삶을 이루는 모든 일상을 낭만의 색깔로 가꾸어 어른이 되었을 것이라고. 하나의 돌멩이 소리가 대숲을 울리듯, 내 안의 힘 하나가 나를 움직이고 세상을 울린다. 그것이 진(眞)으로 드러나고, 선(善)으로 흐르며, 미(美)로 조화를 이루는 순간, 나는 비로소 ‘더 나은 나’로 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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