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다움으로 서는 사유

한자성어에 대하여

by 김기황

사유의 재료로서의 일상

도마 위에 여러 가지 식재료들을 올려두더라도 요리하는 행위가 개입되지 않는다면 그 재료들이 어울려 빚어내는 요리의 맛을 맛볼 수 없다. 책꽂이에 많은 책을 꽂아 두더라도 스스로 읽고 이해하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면 사유의 열매를 얻을 수는 없다. 이메일로 많은 자료를 받았다고 해도 압축을 풀지 않으면 그 내용을 알 수는 없다. 압축된 파일을 풀지 못하면 아무리 유용하다고 하더라도 무용지물이다. 개인이 겪는 순간순간의 변심과 매일 겪는 혼돈을 스스로 돌아보지 않는다면 성숙한 인격을 갖추기는 어렵다. 개인에게서 일어나는 순간순간의 변심과 매일 겪는 경험의 혼돈이 삶의 방향을 잃게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개인의 변심과 혼돈을 해소하는 방법은 다양하다. 그렇지만 이 과정에서 선택하는 방법들이 고정되고 습관으로 이어지게 되면 시야가 좁아지고 시선이 낮은 차원에 머무르게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를 극복하고 넘어서기 위한 인류의 시도들 또한 다양하게 남아있다.

인류가 남긴 이야기의 종류가 많은 것은 사람들이 겪는 일이 그만큼 다양하다는 것이다. 모든 사람은 이러한 이야기에 나오는 몇 가지의 경험들로 생을 마감할 수밖에 없다. 그러함에도 이렇게 숫자가 많은 것은 인류가 축적한 문명의 힘이다. 내가 경험하지 못했던 시공간에서 벌어진 일들에서 인생의 여러 요소의 보편적 가치와 사회적 기준들이 나와 연결되는 점은 무엇이며 그 이유는 무엇인가를 매 순간 자신에게 던지면서 살아갈 수는 없다. 특히 상황은 이해되나 화를 참지 못할 때, 무심결에 육두문자를 내뱉을 때, 육체가 먼저 반응할 때의 당혹감은 수치스러울 수도 있다. 이러한 당혹스러웠던 경험을 자기 검열로 벗어나고자 할 때 인류가 남겨놓은 이야기들을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다.

우리에게는 인간들이 경험한 모든 것을 망라하여 이야기하는 한자 성어가 있다. 표기는 한글로 하지만 한자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 그 숫자가 너무도 많다는 점, 굳이 실생활에서 그리 많이 사용할 일이 별로 없다는 점 때문에 사람들의 관심은 크지는 않다. 특히 한자는 글자마다 뜻을 가진 표의문자이다. 그래서 한자에 대한 상당한 지식이 있어야 이해될 수 있는 것도 있다. 그러나 영화의 제목만으로 그 영화의 내용을 알 수는 없지만 영화를 보고 나면 영화의 제목을 이해할 수 있게 되듯이 한자 성어도 이야기를 읽고 나면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영화의 내용을 압축한 영화제목처럼 인간의 경험을 압축한 한자 성어는 일상에서 겪는 순간순간의 변심과 매일 겪는 혼돈을 압축파일처럼 저장할 수 있도록 해준다. 그리고 때가 되면 압축파일을 풀어서 일상을 돌아보는 사유의 재료가 되게 한다.

인문적 태도를 위한 한자 성어

현학적으로 한자 성어를 읽는다는 것은 한자 성어의 근거가 있는 유래, 여기에 사용된 한자어의 뜻이 변천된 내력과 문장의 문법적 구조를 살펴서 작자의 의도를 명확히 밝히는 작업으로 볼 수 있다. 이는 분명히 개인의 인식이나 이해의 폭을 넓히고 깊게 하는 데 도움을 준다. 또한 이러한 방식의 이해도 분명히 필요하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은 옛날이야기를 옛날로 돌리게 될 수도 있다.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살아남은 한자 성어의 갇힌 구조-원래의 뜻-에서 꺼내기 위해서는 다양한 개인들의 인식과 태도가 도움이 된다. 인문적 한자 성어 읽기는 이러한 갇힌 구조를 밝히는 것이 아닌 현학적 한자 성어 읽기에서 파악하고 이해한 것을 개인이 세계와 대면할 때 적용하고 정리하는 것이다.

나를 반성하는 도구로써의 한자 성어를 지양(止揚)하고 내삶을 성찰하는 도구를 지향(指向)하게 되면 내삶에 대한 나의 관심을 집중시키는 아주 유용한 습관이 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존의 한자 성어를 해석해 놓은 뜻을 단순히 답습하는 것에 머무르는 것은 곤란하다. 그것은 너무도 자신의 정신적 자유를 과소평가하는 것이다. 세상과 사물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기 위해서는 정보나 지식을 늘리는 것보다 자신의 내면으로 시선을 보냄으로써 자신을 알아가는 것이 더 유용하다. 한자 성어의 기존 해석을 개인의 순간순간의 변심과 매일의 혼돈의 정리에 활용하고 일상에서 일어나는 역설을 이해하게 될 때 이해의 폭은 넓어진다. 그러므로 서양철학과 불교철학과 중국철학을 비교하는 것은 지식과 정보를 늘리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한자 성어는 지식과 정보를 나의 삶의 성찰을 풍부하게 해주는 연결점이 되기도 한다.

인류가 남긴 이야기를 이해하려는 목적이 내삶의 우연한 사건을 설명하는 일회성의 사유이거나 일상적인 지식의 축적을 위한 도구가 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내삶의 질을 높이고 양을 늘려서 내삶의 리더로 살아가는 긴 과정 동안 정신적 활동의 밑거름이 되게 해야 한다. 삶은 일회성이지만 삶을 이루는 인간의 행동과 활동은 일회성이 아니다. 인간의 행동과 활동은 인간이 주도적으로 반복하거나 중복되게 일으키는 의도적인 행위이다. 그러나 복사하듯이 과거의 경험을 재현하는 경우는 절대로 없다. 다만 지나간 일들에 대한 회상에서 과거의 경험을 추상화, 범주화하는 사유들 때문에 그렇게 보일 뿐이다. 추상화, 범주화된 사유를 많이 가지는 것을 골치 아픔이라고 하게 되면 나태해져서 안주하게 된다. 추상화, 범주화된 사유의 경계를 적극적으로 품겠다는 오만이 있어야 자유의지로 살아가려는 긍정적 사고에 가까이 갈 수 있다. 인류가 남긴 이야기는 기존 해석으로 나를 ‘만약’이라는 상상에 가두어 둘 수도 있다. 그 상상에서 찾아낸 추상과 범주를 내삶의 리더로 살아가려는 내실을 키우고 시선을 높이는 정신적 함량을 위해 활용한다면 인류의 정신적 유물임을 확신할 수 있을 것이다.

고사성어의 창고 <태사공서(太史公書)>

<태사공서(太史公書)>는 중국의 혼란한 시기에 실제로 일어났던 일을 기록했다고 해서 고사성어의 창고라고 한다. 저자인 사마천은 다양한 인간관계의 유형을 창의적으로 풀어내었다. 가업의 산물인 <태사공서>가 공공의 치적인 <사기>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 것은 약 300년의 세월이 흘러서였다고 한다. 긴 세월을 보내면서 사람들은 역사를 이루는 것이 인간들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일들이라는 인식을 정립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세상의 흐름과 인간관계의 이해가 삶에서 중요한 부분임을 인식한 것으로 보인다. 세상과 인간의 끊임없이 주고받는 상호관계가 삶이며 그 속에 담긴 생각들에 대한 보편적 인식을 한 것은 동서양이 비슷한 것 같다. 그래서 ‘세상을 살아가는 개인들의 삶의 자세나 방법’을 ‘지혜’라고 칭하는 제안이 보편적 가치로 사람들의 공감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사마천은 지식인으로서 지키고자 하였던 품위를 손상당하는 참혹한 상황을 이겨내기 위해서 ‘하늘과 인간의 관계를 탐구하고 고금의 변화에 통달하여 일가(一家)를 이루고자 하는 개인적인 희망을 품고 살았다’(태사공자서(太史公自序))고 토로한다. 개인적인 억울함을 개인적인 업적으로 승화시킨 사람들에게서 실마리를 찾고 자신의 분한 생각을 펴고 그 뜻이 세상에 받아들여질 수 있도록 자신을 드러내고자 하였다. 그러면서 자신이 죽고 나서야 옳고 그름이 판명될 것이라 예견하였다. 그렇게 사마천은 하나의 생각을 인류가 ‘지혜’를 발명할 수 있도록 남겨 주었다.

한자 성어는 지혜의 보고가 아니라 지혜의 창고일 뿐이다. 다만 어떤 사람에게는 분명히 보물창고가 되기도 한다. <태사공서>에는 다양한 사람들의 인간관계의 경험을 정리한 많은 한자 성어들이 나오는데 그 속에 지혜가 담겨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때 지혜라고 하는 것은 지나간 일 즉, 세상의 흐름에서 그 시대 상황에서 적용되었던 생각이라는 점이다. 사마천도 <태사공자서(太史公自序)>에서 자신의 저술은 자신만의 사명이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 내용을 후대에 강요한 것은 아니다. 이는 후세사람들이 자신의 저술을 참고하라는 것이지 강요한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그 시대와 자신의 환경에 따라 <사기>를 통하여 얻은 생각들이 개인의 삶에서 유용하게 활용되었으므로 지혜를 얻었다고 하는 것이다. 사마천은 <사기>에 아주 다양한 사람들을 등장시킨다. 사마천 이전에 살았던 거의 모든 계급의 사람들을 망라하고 있다. 뚜렷한 계급사회였던 그 시대에 하층계급이나 미천한 계급의 사람들까지도 기록에 남겼다는 자체가 인류 문명사에서 <사기>의 위대함이 자리하는 것이다.

지혜는 고정되어 있는가?

<태사공서>가 300여 년이 흐른 뒤에 <사기>라는 명칭을 획득한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사마천의 개인적인 억울함을 해소했다고 하는 것은 의미가 전혀 없다. 그는 이미 소멸(消滅)되어 자연으로 돌아간 존재이기 때문이다. 사마천이 기록한 내용이 사실임을 인정했기 때문이라는 생각도 부질없기는 마찬가지다. 사마천의 기록은 사람들의 기억에 의존한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사마천이 사람들의 경험을 정리하면서 ‘하늘과 인간의 관계를 탐구하고 고금의 변화에 통달’하려고 했다는 노력을 인정받았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늘과 인간의 관계는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이자 현재이며 고금의 변화에 통달한다는 것은 세상은 끊임없이 변하더라도 삶은 유지되어야 한다는 사람들의 깨달음이 <태사공서>가 <사기>로 격상된 배경이라고 생각된다.

사람들이 무심하게 흐르는 세월에 감춰져 있는 역설을 찾아내는 통찰을 지혜라고 부른다면 지혜는 변화된다는 ‘유동성’을 내포하게 된다. ‘유동성’에만 집착한다면 과거의 일을 지나간 것으로 여기는 소홀함에 빠지게 한다. 그래서 중첩된 구조의 지혜가 요구된다. 과거의 지혜를 제거하고 ‘유동성’ 속에서 현재의 새로운 지혜를 찾아내는 시도가 필요하게 된다. 이것은 사람들의 삶은 그 모습만을 바뀔 뿐이지 시간이 흘러도 같은 무늬가 반복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혜는 과거의 일에도 소홀하지 않도록 우리를 긴장하며 살아가도록 기록을 남겨둔 것이다. 과거의 지혜를 책 속에 있는 지혜라고 여기는 것은 나를 관찰자로서의 입장에서 서게 하기 때문이다. 이곳에는 나의 새로운 지혜가 들어설 자리가 없다. 그러므로 한자 성어에 있는 지혜가 나의 지혜로 옮겨지기 위해서는 한자 성어의 시대와 환경을 상상해 보는 생각에서 얻어지는 것에서 자신만의 지혜를 재정의하는 노력이 요구된다. 여기서 지혜는 개별성을 확보한다. 그런 연후에 한자 성어를 다시 보게 되면 그전과는 다른 의미들을 찾아내게 되고 무릎을 치는 횟수가 많아지게 될 것이다. 이럴 때 한자 성어는 생각을 넓고 깊게 풍부하게 하는 도구로서 충분히 활용할 수 있을 것이며 ‘지혜의 보고’라는 말에 희미한 미소를 지을 수 있을 것이다.

‘절대’라는 개념을 형용사로 사용할 수 있는 것들이 얼마나 될까? 또 그것을 모두가 받아들일 수 있는 문장들은 무엇이 있는가? 인류가 밝힌 과학적 사실들에는 ‘절대’라는 수식어가 많이 사용된다. 그렇더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현재까지 인류가 밝힌 과학적 사실에만 한정된다는 점은 간과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만일 새로운 과학적 발견이 있다면 그 ‘절대’라는 수식어는 힘을 잃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인류의 정신적 사유에 ‘절대’라는 수식어는 어떨까? 절대 지혜, 절대 윤리, 절대 도덕, 절대 진리 등은 성립되지 않는다. ‘절대’라는 수식어는 객관적 사실의 수식에 더 잘 어울리기 때문이다. 인간적 윤리 인간적 진리 인간적 도덕 등. ‘적’이라는 수식어로 근사치를 이야기할 수 있을 뿐이다. 이러한 개념들도 출발점은 개인에게 있다는 것을 생각해보아야 한다. 인류가 축적한 지혜는 한 사람의 천재성에 기인한 것은 아니며 여러 사람의 일상의 경험이 쌓이고 쌓여서 개념화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류의 지혜를 이해하는 것과 나만의 지혜를 찾아내는 노력은 매우 중요한 인간 활동임이 틀림없다. 지혜는 내삶 속에 스며들어 내가 세계를 대하는 순간에 발휘될 수 있어야만 의미가 있다. 지혜는 인간에게서 나에게로 건너올 수 있어야 하며, 나에게서 인간에게로 건너갈 수 있어야 한다.

선인들은 절대 지혜는 없다고 했으며, 지혜를 찾고 구하는 것은 지혜롭지 못하다고도 했다. 이는 인간의 지혜를 찾는 행동에 또 따른 틀 지음을 경계하는 말이지 아무런 생각도 없이 함부로 살거나 막무가내로 살아가는 행동을 권장한 말은 결코 아니다. 장자는 수레바퀴를 깎는 기술자와 최고통치자인 왕을 등장시켜 지혜를 이야기하고 있다. 기록으로 남은 성현들의 말은 지혜가 아니라 지혜의 찌꺼기일 뿐이라고는 했다. 지혜를 독립된 실체로 보지 말고 인간의 오감으로 세상을 대면하는 그 순간에 술 찌꺼기를 술 찌꺼기가 아닌 향미를 가진 술로 바꾸는 행동을 할 것을 장자는 수레바퀴를 깎는 기술자의 목숨을 담보로 이야기하고 있다. 이 이야기에서 찾아낼 수 있는 느낌을 각자가 어떤 측면에서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는가에 따라 새로운 이야기가 굴러갈 것이다. 우리는 한자 성어를 스토리 텔링으로 읽을 것이 아니라, 스토리 롤링으로 읽어야 한다. 전자는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이고 후자는 이야기가 굴어가는 것이다. 즉 화자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생성 소멸하는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2,000여 년 전의 이야기를 지금에 굳이 강조할 필요는 없다. 눈덩이를 굴리면 단단히 붙는 눈도 있고 쉽게 떨어지는 눈도 있다. 그러다가 햇볕에 녹으면 사라진다. 그리고 다시 계절이 돌아오면 눈덩이는 생긴다.

이해의 폭을 넓혀 다른 차원으로

인류가 남긴 이야기 중 하나인 한자 성어를 우리 사회에서는 지식에 대한 하나의 측정기준으로 사용하는 것은 교육의 일반적인 목적에 잘 들어맞기 때문일 것이다. 한 집단 구성원들을 그 집단에 지배적이거나 그 집단에 의지해서 살아가는 사회 성격 또는 문화 패턴에 따르도록 훈련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기나긴 혁명 202p 중간 단락) 이러한 사회 성격과 문화 패턴을 따르도록 훈련할 수 있는 쉬운 도구가 집약적이고 압축된 한자 성어가 될 수 있다. 여기에 따르는 부정적인 측면이 한자 성어가 지식의 박제로 남는 이유이다.

이미 한글로 해석된 한자 성어를 학습적으로 이해하는 일은 별로 어렵지 않다. 한자의 음과 뜻을 알고 나면 학습적으로는 이해하는 것이 된다. 그러나 학습적 이해는 지식을 넓히는 데는 도움이 되지만, 자신과의 소통 즉, 자신을 살피는 데는 조금 부족하다는 느낌이다. 자신과의 소통에 필요한 지혜를 위해서는 생각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때의 노력은 자신과의 소통을 위한 애씀이다. 수백 년을 살아온 나무들은 자신의 크고 작은 뿌리들을 가지와 같은 넓이로 뻗음으로써 오랜 시간을 생존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 중심이 되는 뿌리들을 땅속으로 깊이 내리게 하고 부피를 키웠기에 오랜 세월 동안 생존할 수 있었다. 우리는 지식의 폭을 넓히는 것과 더불어 깊이를 추구함으로써 자신을 인식하는 계기와 자신의 지혜로 살아가는 삶을 추구할 수 있다. 대부분의 한자 성어는 한자의 뜻을 모르더라도 기억하기에는 그렇게 어렵지는 않다. 왜냐하면 한자 성어는 몇 글자로 된 이야기들이기 때문이다. 마치 긴 세월을 한두 시간의 이야기로 압축시켜 영화에 담아주는 것과 같다. 대단한 압축력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한자 성어들은 자신과의 소통에서 발현되는 지혜로 살피지 못한다면 흥미를 잃은 옛날이야기일 뿐이다. 이는 자신의 문제이지 결코 한자 성어의 가치의 문제는 아니다.

지혜는 현실 세계와 직면하는 순간에 발휘되는 인간 내면에서 나오는 고도화된 사유의 체계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이 오감을 통하여 접촉하는 것은 전체 세상의 일부일 뿐이다. 한자 성어는 우리가 경험했던 일상의 전체를 짧은 순간 하나의 느낌으로 정리할 수 있도록 하는 묘한 매력을 가지고 있다. 그 속에는 시간과 공간을 아우르며, 시공간에 있는 자신을 자각시켜 주면서 시공간과 자신을 하나로 생각하게 해주는 마력이 있다. 그러므로 부분을 전체로 전체를 부분으로 이해하라는 선현들은 지혜롭게 살아가는 방법을 가르쳐 주면서 지혜를 내려놓으라는 말을 한 것 같다. 도대체 어찌하라는 것인지 혼란스럽기만 하다. 지혜는 전체에서 부분을 찾아서 전체와 소통하는 것이다. 이때의 부분은 지혜를 찾는 행위이다. 그런데 부분을 찾는 행위가 마무리되면, 이번에는 그 행위로 얻은 지혜는 경계를 구분 지었기에 전체와는 분리되게 돈다. 지혜를 얻는 순간 불통이 된다. 그래서 선인들은 지혜를 얻음과 동시에 지혜를 버리라고 했다. 그래야 경계가 없는 곳을 자유롭게 거닐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나와의 소통

나와의 소통을 위하여 스스로 밝히는 지혜는 기존의 사전적인 정의에 반드시 부합될 필요는 없다. 사전의 정의로 나의 지혜를 틀에 가두기보다는 좀 더 넓게 정의함으로써 자신과의 소통을 풍성하게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그러므로 자신이 만들어 가는 지혜가 다양한 색깔과 맛이 있다고 해서 초라해하거나 소심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나는 지혜를 자신이 세상과 접촉하면서 한없이 흐르는 시간과 공간에서 한없이 흘러가는 생명으로 남아 있을 수 있기를 바라는 인간의 마음이라고 생각한다. 사마천의 <사기>는 한없이 흐르던 어떤 시공간에 나타나서 지금까지 흐르고 있으며 앞으로도 흐를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흐름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지혜가 가진 다양한 색깔과 맛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시각은 눈높이에서 팔을 뻗고 엄지손가락을 펴면 그 많은 시야에서 엄지손가락만큼의 부분만 인식한다고 한다. 자신의 시각이 그러한데 타인을 이해한다고 하면서 타인의 머릿속에 있는 생각을 전일하게 읽고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의사소통이란 애초에 어려운 것이며 완전한 의사소통은 힘들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그래서 인간은 의사소통에 관심이 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의사소통은 자신이 딛고선 징검다리와 타인이 딛고선 징검다리 사이에 큰 돌보다는 작은 돌덩이들을 채워놓는 것이다. 한자 성어는 나의 정신을 이해하고 타인과의 의사소통의 품격을 높이는 도구가 될 수 있다. 그러나 내가 이해하는 한자 성어가 타인과 비슷할 수는 있지만 완전히 같을 수는 없음을 안다면, 한자 성어를 다르게 보거나 새롭게 보는 생각은 중요하다. 의사소통은 자신이 아는 한도 내에서 이루어진다. 앞을 보지 못하는 여러 사람이 코끼리를 묘사하는 것과 같다고 하겠다. 그것을 단순히 이야기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를 확장하여 타인을 이해하는 데까지 나아가야 우리는 그 이야기를 소화했다고 할 수 있다. 의사소통은 초등학교 때 말 전달하기 놀이나, 가끔 방송에 나오는 입 모양으로 문장이나 단어 맞추기 게임을 보면 쉬운 노릇이 아님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것들은 타인과의 소통에 연관되는 것이기는 하다. 자신과의 소통은 타인과의 소통에서 좀 더 나은 소통을 생각해보는 것이며, 이는 단순히 말을 많이 한다거나 어려운 말을 사용하는 것과는 다른 차원이다.

인지심리학에서 인간은 인지적 구두쇠라는 표현을 한다. 사고를 편집적으로 한다는 의미라고 한다. 한자 성어의 최대약점으로는 이러한 인간의 인지적 성향에 많은 영향을 받는다는 점이다. 한자 성어는 긴 이야기이다. 그것을 축약시켰다. 편집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그 이야기에 담겨있는 풍부한 내용은 등한시한 채 축약된 한자 성어의 뜻만을 기억하고자 한다. 원래의 이야기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생각들은 편집적 사고에 밀려나고 만 것이다.

그동안 뭐 하고 다녔던가?

한자 성어에 지혜가 담겨있다고 하는데 그 지혜는 아는 사람만 아는 것 같다. 소위, 성인이라는 사람들의 차원이 높고 경지가 다른 사유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낮은 단계로부터 이해와 노력이 필요하다. 2000년 동안 사회를 이끌어 온 성인의 지혜에 도달하기 위해서 그들의 저작을 읽고 뜻을 새기는 일이 가장 최선의 길이라 짐작한다. 한편으로는 굳이 그럴 필요를 느끼지 않는 아이러니가 있기도 하다. 굳이 성인들의 지혜가 아니더라도 나의 개인 생애에 영향을 미치는 지혜도 충분히 있으리라는 자기 위로의 마음이 없지도 않다. 그렇지만 성인들이 부러워지는 것만은 숨길 수 없다. 그래서 낮은 차원에서라도 부산을 떨어보고 싶다. 고담준론(高談峻論)에 몸을 온몸을 적시지는 못하더라도 발목이라도 잠길 수 있다면 한 개의 점인 나의 생애를 기나긴 선(線)인 생명에 얹어 놓아도 부끄럽지 않으리라는 자기만족의 감정은 어쩔 수 없다. 다행히 한자 성어의 짧은 글귀는 한자 사전과 이제까지 습득한 지식으로 기존의 해석을 어렵지만 이해하는 데는 무리가 없으니 부산을 떨어볼 수는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갇힌 구조 속에서의 이해가 아니라 나만의 해석으로 나 자신과의 소통에 유용하다면 그 해석으로 만족하는 오기를 부려볼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기존의 해석을 왜곡하는 우를 범하는 경계심은 늘 가져야 한다. 왜곡은 해서는 안 될 일이기도 하거니와 한자 성어에서 나만이 보았던 경험과 생각을 이야기하는 것은 한편으로 치우칠 위험이 있다. 나만의 지혜를 포함한 인류 문명에 축적된 지혜를 가지고 흘러가는 세계와 대면하는 삶의 리더로서 일상에서 순간순간 문득 파고드는 단어나 문장들에 멈칫멈칫할 때, 그 순간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을 때, 그 순간이 지나가면 다가오는 혼란들이 무섭다면 여유가 필요한 순간들이다. 그 여유는 단순히 시간을 허비하는 것이 아니다. 그 여유는 자신의 외로움이나 고립감을 깊이 들여다볼 수 있는 순간이다. 인류가 발명하고 발전시킨 추상화, 범주화는 띄엄띄엄하게 놓여 있는 징검다리와 같다. 징검다리와 징검다리 사이에는 내가 알지 못하거나 내가 알고 있으나 연결하지 못하는 작은 돌들이 있다. 징검다리 사이에 조그만 돌을 아주 많이 채우게 되면 훌륭한 발판이 되며, 전체 징검다리 사이를 이렇게 하면 매우 탄탄한 다리가 되어 나는 그 속에서 자유롭게 거닐 수 있게 될 것이다. 한자 성어를 소통과 연결하는 것은 같은 공간에 더 많은 작은 돌을 넣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그 작은 돌들은 자신을 비롯한 개인을 이해하는 도구이다. 한 공간에서 다른 공간으로 가는 길을 더 많이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럴 때 사용되는 한자 성어는 나와 나 아닌 나를 연결하는 도구로 사용될 수 있는 아주 유용한 문화라고 할 수 있다. 큰 홍수가 나도 떠내려가지 않는 돌다리는 나와 나 아닌 나를 연결해 주는 소통의 힘이 강력하다는 의미이다.

인간은 자신의 외로움과 고립감, 호기심, 궁금증들을 좀 더 증폭시키고 확대하여 내삶의 질과 양을 늘려야 한다. 이는 인간은 삶을 시작하는 지점이나 삶이 끝나는 지점에 머무를 수는 없고, 이 두 지점을 연결하는 선상에서 움직여야 하기 때문이다. 인간 삶의 움직임이 역사이며, 역사에서 삶과 관련된 인간의 지혜를 찾는다면 한자 성어가 그 하나일 수 있다. 역사에서 나만의 지혜를 찾겠다는 의식은 한자 성어를 지식의 박제로 두는 것이 아니라 내삶의 호기심과 궁금증을 충동질하는 도구로 사용할 때 비로소 빛이 난다.

인간의 지혜는 많다. 성현들의 말, 성인들의 말, 명언, 격언, 속담 등등, 찾아보면 사람들이 지혜라고 부르는 것들이 많이 있다. 그런데도 나는 왜 지혜를 찾고 있는가? 사람들이 말하는 그 지혜들을 받아들이면 될 터인데 말이다. 그것은 사람들의 지혜와 나만의 지혜를 구분하지 않은 혼동에서 오는 것이다. 아무리 좋은 지혜, 대단히 훌륭한 지혜라고 해도 내가 세상과 대면하는 과정에서 사용되지 않거나 못한다면 그 훌륭한 좋은 지혜는 나에게는 ‘찌꺼기’ 일뿐이다. 이렇게 된 것은 나와의 소통을 많이 하지 않는 대부분 사람에게 나타나는 현상이다. 말을 하는 것을 들어보면 지혜로운 말을 많이 하는 것 같은데 실제 행동을 보면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다. 지혜를 지식으로 여기면서 지혜를 많이 알고 있으면 자신의 품격이 올라갈 것이라는 착각에서 사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그들은 지혜라고 생각하는 것과 관계되는 주변부의 내용을 열심히 들먹인다. 핵심은 그 지혜를 자신이 다룰 줄 아는가인데 말이다. 내가 세상과 대면하거나 나를 성찰하고 내삶의 질과 양을 더 풍부하게 하지 못하는 지혜는 그저 지식일 뿐이다. 지혜와 지식의 차이는 엄청난 것이다.

나에게 한자 성어의 가치는 나의 경험을 창조적으로 다루는 도구로 사용할 수 있다는 점으로 사회를 프레임이 아니라 패러다임으로 봐야 한다는 각성을 준 점, 그래서 나와의 소통으로 새로운 이해와 해석을 할 수 있게 해 준 점이다. 한자 성어는 이야기이다. 그 속에는 고담준론이 보이지는 않지만 숨어 있다. 그 숨어 있는 고담준론을 찾아내는 것은 사상가나 이론가가 되기 위함이라기보다는 실제 생활에서 활용하기 위함이다. 그래서 한자 성어에는 실제 생활에 가깝게 쓰이는 지혜가 담겨있다고 한다. 그러나 지혜는 고정된 지식은 아니며 숨어 있는 곳을 찾아내는 실행 즉, 사유가 필요한 것이다. 사유는 인간을 움직이는 가장 최고의 흥분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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