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용 23절-지극함의 시작, 일상의 간곡함
중용 제23절은 이렇게 말한다. “간곡한 지경에 이르는 것이니, 간곡하면 성실한 것이 있는 것이니, 성실하면 나타나고, 나타나면 뚜렷해지고, 뚜렷해지면 밝아지고, 밝아지면 동하고, 동하면 변하고, 변하면 남을 교화할 것이니, 오직 천하에서 지극한 사람이라야 남을 교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이 구절은 오래전부터 성인의 경지, 혹은 도덕적 완성의 길로 이해되어 왔다. 영화나 교과서 속에서도 이 말은 대개 ‘도달해야 하는 높은 수준’처럼 등장한다.
불편하다. 성인, 군자, 성현들이 타고난 듯한 지극함이나 도대체 보이지 않는 위정자들의 성실함을 그 오랜 세월 강요한 이유가 뭘까? 항간에서는 그들이 그렇지 않기에 수양의 표석으로 삼기 위함이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래도 불편하기는 마찬가지다. 저 말들이 머리로는 이해되는 데 행동으로 실천하지 못하는 동기를 알 듯 모를듯하기 때문이다.
불혹을 넘긴 어느 즈음에. 이 구절을 읽다가 ‘간곡함’을 아는 것이 내삶의 시작일 수 있다는 나만의 생각을 정리해 보았다.
성실함이나 지극함은 마치 누군가가 정해놓은 목표처럼 제시된 것으로 느껴졌다. 그 목표를 향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실천하라고 요구받을 때, 성실은 더 이상 마음의 상태가 아니라 성과의 수단으로 변해있었다. 중용의 문장은 다시 읽으면서 그렇게 단순히 명령하는 어조가 아님을 느꼈다. “간곡한 지경에 이른다”는 표현 속에는 오히려 시간과 반복, 그리고 서서히 쌓여가는 마음의 무게가 담겨 있었다. 간곡(懇曲)은 억지로 곧게 펴지지 않은 마음, 자신의 뜻을 꺾어서라도 상대에게 닿으려는 부드러운 힘으로 보였다. 이 단어에서 억눌림보다 따뜻한 체온이 있음을 보았다. 그리하여 “간곡하면 성실한 것이 있는 것이니”라는 말은 누군가의 지시가 아니라, 마음의 움직임을 따라가면 자연히 성실에 이른다는 뜻으로도 읽혔다.
나는 그 가능성을 일상의 루틴에서 찾고자 한다. 지극함이란 어떤 종교적 경건함이나 초월의 상태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깨어 있는 순간을 말한다. 매일 같은 시간에 일어나고, 같은 길을 걸어가지만 어느 날 문득, 그 길가의 나무 한 그루가 다르게 보일 때가 있다. 그것이 간곡함의 시작이다. 이 작은 변화는 외부의 성취가 아니라, 내 마음이 움직이고 있음을 알아차린 순간이다.
하지만 현대 사회는 이런 내면의 움직임을 허락하지 않는다. 우리는 성실을 관리하고, 열정을 측정당한다. 일정표와 목표 관리 속에서 마음의 미세한 떨림은 사라진다. 그리하여 성실은 더 이상 살아 있는 인간의 상태가 아니라 평가 가능한 태도로 변질된다. 그래서 나는 묻는다.
“성실은 배워서 실천하는 덕목인가, 아니면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서서히 길러지는 감각인가?” 나의 대답은 후자다. 성실은 지식이 아니라 연습이다. 그리고 그 연습은 특정한 수행이 아니라 매일의 자연스러운 행동 속에서 일어나는 마음의 조율이다. 우리는 흔히 “성실하라”는 말을 들으면 긴장하고 의지를 다진다. 하지만 진정한 성실은 의지의 강도가 아니라 관심의 지속성이다. 작은 일을 무심히 하지 않고, 반복 속에서도 새로움을 느끼는 힘, 그것이 간곡함의 실제적인 형태다.
‘지극하다’, ‘간절하다’, ‘간곡하다’는 모두 오늘날의 언어 감각에서 멀어진 단어들이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이 말들은 감정의 강도가 아니라 마음의 깊이를 말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강한 감정은 표현하지만, 깊은 마음은 잊어버렸다. 그렇다면 이 단어들을 다시 떠올리게 된 ‘이전’을 상상해 보자. 아마 그것은 삶의 가벼움에 대한 피로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빠르게 돌아가는 사회 속에서 우리의 말과 행동은 얕아진다. 누군가를 위로하고 싶어도 말이 공허하게 흩어지고, 무언가를 이루고 싶어도 그것이 정말 ‘나의 일’인지 모르겠다. 그때, 사람은 문득 ‘깊이 있게’ 살고 싶다고 느낀다. 그때 떠오르는 말이 바로 지극 함이다. 지극함은 초월의 상태가 아니라, 얕아진 자신에 대한 그리움이다. 또한, 타인에게 마음이 닿지 않을 때 우리는 간곡함을 느낀다. ‘곡(曲)’은 굽힘이다. 내 뜻을 조금 굽혀서라도 상대에게 닿고자 하는 정성,
그 굽힘 속에서 인간은 비로소 진심을 배운다. 그리고 자신이 진심으로 무언가를 바랄 때,
그 바람의 형태는 간절함이 된다. 그것은 머리로 판단된 욕망이 아니라, 몸으로 체험한 생의 진심이다. 결국 이 세 단어는 모두 삶의 표면을 넘어, 내면의 진심이 다시 작동하는 순간을 가리킨다. 그것은 배우거나 가르칠 수 있는 덕목이 아니라, 살아가며 조금씩 회복하는 감각이다.
이쯤에서 나는 중요한 구분을 떠 올린다. 삶과 내삶의 차이다. ‘삶’은 모든 사람의 것이다. 사회가 그려놓은 길 위를 걷는 일, 도덕과 윤리가 규정하는 인간의 일반적 형식이다. 여기서 삶은 외형이며,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규정된다. 이 ‘삶’ 속에서 성실은 사회적 의무로 기능한다. ‘성실하라’, ‘최선을 다하라’는 말은 언제나 외부의 기준을 향한다. 그리하여 성실은 어느새 보여주기 위한 태도로 바뀌어버린다. 반면, ‘내삶’은 오직 나만이 감각할 수 있는 영역이다. 남이 뭐라 해도 내가 진심으로 느끼고 살아내는 하루, 그 감정의 미세한 결이 ‘내삶’을 이룬다. 이때의 성실은 평가가 아니라 존재의 진정성이다. 내 마음이 내 행동과 어긋나지 않도록 조율하는 연습, 그것이 내삶의 간곡함이다. 삶과 내삶의 구분은 단순히 철학적 정의가 아니라, 지극함이 시작되는 자리다. 삶은 사회의 언어로 말해지지만, 내삶은 오직 내 감각과 마음의 언어로만 말해질 수 있다. 따라서 지극함이란 ‘삶’을 ‘내삶’으로 되돌리는 과정이며, 그 회복이야말로 중용이 말한 “간곡한 지경”의 실제적 의미다.
지극함은 결코 특별한 일이 아니다. 그것은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조금 더 ‘깊이 보려는 태도’로 시작된다. 이를테면, 매일 같은 시간에 마시는 한 잔의 차를 그냥 넘기지 않고 향을 느끼는 것, 무심히 지나치던 나무 한 그루에 오늘은 다른 빛이 스며 있음을 알아차리는 것, 같은 말을 하더라도 그 말이 타인의 마음에 어떻게 닿을지를 한 번 더 생각하는 것. 이런 작은 주의의 순간이 바로 간곡함의 연습이다. 간곡함은 실천의 강도가 아니라, 감각의 깊이에서 생겨난다. 그 감각이 쌓이면 마음은 자연히 성실해지고, 성실이 드러나면 삶은 투명해진다. 그것이 중용이 말한 “성실하면 나타나고, 나타나면 뚜렷해지고”의 흐름이다. 이 모든 변화는 외부로 향한 노력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을 일상 속에서 되살리는 힘이다.
결국 지극함은 어떤 이상향이 아니다. 그것은 일상 속에서 자신이 ‘살아 있음을 느끼는 능력’이다. 간곡함은 그 살아 있음의 방식이다. 우리는 매일 사회가 정해준 ‘삶’을 살지만, 그 속에서 한 걸음 물러서서 ‘내삶’을 느끼는 순간이 있다면, 그 순간이 바로 지극함의 시작이다. 삶은 모두의 것이지만, 내삶은 오직 나만이 감각할 수 있다. 간곡함은 타인에게 보이기 위한 덕이 아니라, 내 삶이 삶으로부터 이탈하지 않으려는 부드러운 저항이다. 그리고 지극함은 그 저항이 일상 속에서 자연스러워질 때 비로소 드러난다.
지극함의 길은 멀지 않다. 그것은 거대한 깨달음이 아니라, 오늘의 일상 속에서 다시 내 삶으로 되돌아오는 연습이다. 지극함은 시작이고 성실은 과정이며 내삶이 이것들을 품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