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감(五感)과 황금률(黃金律)
인간의 오감(五感)은 매우 중요한 문(門)들이다. 오감은 외부 자극을 내부로 전달하고, 내면의 감정을 외부로 드러낸다. 이 문들은 자극과 감정이 교차하는 시점에 아주 짧은 순간 세워졌다가 사라지기에 눈에 보이지는 않는다. 성격을 달리하는 수많은 문들이 세워졌다가 사라지기에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대표적으로 생존을 위한 동물적 본능에 충실한 문(門)과 인간이기에 개인 본성의 조화를 추구하는 문(問)이 있다. 동물적 본능에 충실한 문(門)은 몸의 생존에 예민하다. 개인 본성의 조화를 추구하는 문(問)은 영혼의 생존에 예민하다. 그래서 오감을 즐거움이나 쾌락에만 끌려다니게 해선 곤란하다. 세상이라는 외면과 인간이라는 내면이 교차하는 알 듯 모를듯한 그즈음에 가물가물한 그곳에 문이 세워진다. ‘나’다워지기 위해선 눈을 비비고 ‘나’를 찾아야 한다. 그러면 내 영혼의 설핏한 모습이라도 만날 수 있다.
‘내가 하기 싫은 것은 남에게도 하지 마라.’ 인류 최고의 황금률(黃金律)이다. 이 황금률에서 모든 인류의 문명이 파생되고 발전되었다. 이것이 황금률이 되는 이유는 아주 단순하다. 이 말을 지킴으로써 더 좋은 세상이 될 것임을 확신하지만 지키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이 황금률을 지키는 방법은 자신을 찾는 것이다. 이해하고 나면 쉬운 이 방법은 이해하기는 쉬우나 실천하는 것은 어렵다. 이 시점에 문(門)이 하나 세워진다. 그 문은 분명히 자신을 사랑하는 문들로 이어진다. 이 출발점의 문을 열지 못하면 나머지 문들은 사라지고 만다. 여기서는 반드시 순서를 지켜야 한다. 뒤에 있는 문을 먼저 열어볼 수는 없다. 이 문만은 반드시 열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즐거움과 쾌락에 몰두하는 것이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이라고 착각하게 된다.
자신을 사랑하는 것은 내면의 움직임이다. 내면의 움직임은 고요하다. 고요하기에 자극적이지 않으면서 그 긴장을 유지하기가 어렵다. 그런데 외부에서 일어나는 일이 순간적인 자극으로 지나가는 일이 많아서 지속적인 긴장을 유지할 필요가 없기에 자꾸만 빠져들어 그 고요함을 잊어버린다. 이러한 내면의 어려운 긴장을 유지하는 역할을 ‘나는 아니면서 나에게 영향을 주지만 존재를 확인할 수는 없는 내속의 다른 나’인 영혼이 담당한다. 의학적, 신학적, 과학적, 인문학적 발전을 끊임없이 도모하고 있는 인류가 지금의 결과들과 앞으로의 이러한 인류의 업적을 모조리 쏟아부어도 결코 밝혀내지 못할 것 중 하나일 것이다. 이 어렵고 험난한 일을 인류가 이루지 못할 것이라고 좌절할 필요는 없다. 인류 차원에서는 어렵고 힘들지라도 개인 차원에서 이일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어려운 일은 아니다. 어찌 보면 개인들이 이 일이 어려워서 인류에게 떠넘긴 일인지도 모른다.
자신을 사랑하는 일을 깨닫기는 쉬워도 실천하는 것이 어려운 것은 영혼이 미성숙하기 때문이라고 확신한다. 물론 자신을 사랑하는 일을 깨닫지 못한 사람에게도 영혼은 있다. 그러나 그들에게 영혼은 자신을 더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주지 못하는 영혼이기에 문제가 있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신을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어주는 영혼을 만나는 것이 중요하다. 인간의 영혼은 그 인간이 살아있을 때까지만 역할을 맡는다. 한 인간의 영혼은 그 인간이 편안히 삶을 마감하는 그 순간으로 이끌어주고 그의 영혼도 영원한 휴식으로 들어간다. 내가 생명의 거대하고 고고한 흐름에서 내려왔음에도 나의 영혼이 있다는 주장들은 의미가 없다. 나의 영혼이 남아서 나 아닌 다른 존재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은 괴담일 뿐이다.
인간의 영혼이 그 인간이 살아있는 동안에만 있다는 것은 생존전략과 연결된다. 각자의 이러한 생존전략들을 묶어서 우리는 ‘지혜’라는 개념을 만들어 냈다. 모든 종교가 자기들의 종교에는 지혜가 풍부하다고들 한다. 그러나 그 종교를 만든 사람들의 영혼은 모두가 사라졌다. 영혼이 사라졌다는 것은 살아있지 못하다는 것이며 살아있지 못하다는 것은 지혜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지혜가 있다고 하는 것은 그 종교에서 지혜를 얻고 살았던 사람들의 지혜를 지금의 사람들이 생존에 필요한 도구, 즉 지혜로 사용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혜는 결코 개인의 생존보다도 우선할 수는 없다. 지혜는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일 뿐이다.
인간의 오감이 중요한 이유는 자신의 내외부를 이어주는 연결 통로이기 때문이다. 모든 연결에는 소통이 원활해야 자연스럽다. 이 원활한 소통을 위해서 상상의 장소에 문이 세워져 있다. 이 문을 통해 드나드는 자신의 감정 들을 예민한 긴장을 하면서 살펴야 한다. 그래야 ‘누워서 제 얼굴에 침 뱉기’를 하지 않을 수 있다. 그래서 자기 사랑이라는 최소이자 최대인 인간 본성을 유지할 수 있다. 그래야 만이 자신의 영혼을 맑게 피어나게 할 수 있다. 그것이 나의 영혼을 편히 쉬게 할 수 있는 방법이다. 이것이 내가 거대한 생명의 흐름에 감사하는 것이며 또한 고고하고 거대한 생명의 흐름이 나에게 편히 쉴 수 있는 휴식을 허락하는 이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하기 싫은 일을 남에게도 하지 마라’는 말이 인류의 황금률이 되는 이유는 누구나 이 말을 자신 속에서 깨닫게 되면 알게 되는 것이다. ‘내가 하기 싫은 일을 남에도 하지 마라’는 말이 황금률이 된 것은 인류가 온갖 포장을 씌워서 빛나게 할 정도로 매우 귀중한 진리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말은 명실상부한 인류의 황금률이다. 사람들은 이것이 황금률이 된 이유를 생각하지 않고 황금률이 된 결과만을 주목하기에 문제가 된다. 그래서 황금은 찾으려 하지 않고 거기에서 빛나는 빛에 눈이 멀어버린다. 이렇게 빛나는 것을 총칭해서 지혜라고 한다. 지혜는 자신의 생존을 지탱하려는 개인의 내면에서 발현되는 아주 작은 조짐인데, 자기의 내면을 살피지 않은 사람들은 그 순간을 만나기가 어렵다. 그래서 사람들은 나의 외부에서 빛나는 빛들만을 허둥지둥 쫓아다니게 된다. 나의 내부의 황금은 밀쳐두고 다른 사람들이 뿜어내는 빛만을 쫒는 것이다.
상대방의 기분을 상하게 하려는 의도의 말을 하려고 할 때 나의 오감이 교차되는 문에는 긴장이 감돈다. 상대가 느끼게 될 그 감정을 제일 먼저 나의 오감이 느끼기 때문이다. 이때 나의 영혼이 나선다. 굳이 그럴 필요가 있냐는 타이름으로. 그럼에도 상대를 괴롭히려고 쳐다보기 거북한 것들을 찾아서 헤맨다. 마침내 찾았을 때 나의 영혼이 다시 나타난다. 상대를 괴롭히기 전에 이미 너를 괴롭혔다고. 이러한 행동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라고. 그럼에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 인간은 이번에는 아주 고약한 맛을 보여주기로 한다. 나의 영혼은 이렇게 말한다. ‘너는 고약한 맛을 생각하면서 너 자신을 괴롭혔고, 그 맛을 보기 위해 너의 혀를 사용하면서 너를 학대했다. 자기를 사랑하는 것은 다른 사람이 싫어할 것 같은 것을 너 자신에게 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하면서.
그래서 인류는 어느 날 정신이 번쩍 들었는지 자기가 하기 싫은 것을 남에게도 하지 않기로 한다. 그럼에도 자신을 학대하는 사람들이 있기에 그러한 행동들은 반면교사로서의 황금률이 되었다. 황금률의 자세와 태도를 유지하는 사람들은 흔하지 않다. 그럼에도 그들은 늘 다른 사람들의 눈에 띄었기에 빛이 났다. 그러나 그 빛은 스스로 내는 빛이 아니었다. 남들이 만들어 준 빛이었다. 물론 이러한 현상은 빛이 나는 사람들은 자신에게 황금이 있음을 깨달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그 빛을 지혜라고 하면서 오늘도 그 빛만을 쫓고 있다. 이들이 이 빛을 지혜라고 부르는 이유는 왜일까? 인류의 황금률에서 자신에게 자기를 사랑하는 인간 본성이라는 황금을 찾고, 그 황금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에게도 그렇게 해야 한다. 그러나 지혜를 쫓는 사람들은 자신의 행동으로 자신의 황금이 옮겨간다고 잘못 이해한다. 자기를 사랑하는 황금은 언제나 자기에게만 있다. 절대로 옮겨가지 않는다. 자신이 사라지면 황금도 사라진다. 그리고 그 황금은 영원히 다시 나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인간은 황금이라는 존재에 눈이 멀어 언젠가는 나타날 것이라는 착각에서 ‘사라진 황금’을 지혜라고 하면서 찾아다닌다.
황금률을 깨달은 사람들을 어떤 모습을 하고 우리 곁에 있을까? 그들은 왜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자신이 깨달은 바를 이야기 해주지 않을까? 아마도 황금률 때문일 것이라고 짐작한다. 이러이러한 것이 황금률이라고 말한다는 것은 자신이 실천하고 있음을 보여줘야 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실천한다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물며 다른 사람들에게 이야기한 것까지 실행에 옮기기에는 더 힘들 것이라 짐작한다. 그래서 그들은 조용히 자신의 삶을 이어가는 것 같다.
어느 날 문득 ‘신독(愼獨)’이라는 한자 성어가 눈에 밟혔다. ‘혼자 있음을 삼간다’라고 해석되는 이 한자 성어는 당시의 정치 상황이 스며들어 있지만 후대에 개인의 정신과 육체를 수양한다는 의미로 변화되었다. 이 한자 성어를 깨달은 사람들의 행동거지와 연계하여 자기 사랑을 하는 사람들의 행동을 상상해 보았다.
소음에 묻힌 일상에서 벗어날 수 있는 곳을 찾을 수 있다면 자신의 발걸음에서 무슨 소리가 나는지 들어보길 권한다. 만약 자신의 발걸음에서 새어 나오는 소리가 자신의 오감 중에 하나를 건드려서 거슬리고 있다면 그 소리가 남들의 귀에도 거슬릴 것이라는 생각을 해보기 바란다. 그냥 흘려버릴 수도 있다. 아이들이 자신의 불만을 나타내는 뚜렷한 행동 중의 하나가 신발을 끌면서 걷기라고 한다.
이들은 신발을 땅바닥에 끌고 다니지 않을 것 같다. 태양이 내리쬐는 모래 해변을 맨발로 걸어본 사람들은 발바닥으로 전해오는 강렬한 자극을 안다. 이 자극을 통증이라고만 받아들인 사람들은 신발의 통증에는 관심이 없다. 신발은 나의 오감의 연장이다. 신발이 나의 오감의 연장인 까닭은 발바닥으로 전해오는 자극을 완화시킴으로써 나의 오감이 나의 외부와의 소통을 원활하게 해 준다는 의미다. 대부분의 나의 주위의 소음에 묻혀서 또는 나의 오감에 예민하지 않음으로써 내가 걷는 발걸음에서 무슨 소리가 나는지에는 관심이 없다. 물론 영혼에 관심이 없는 사람도 그럴 것이다. 영혼은 모든 사람에게 있을 수 있으나 가만히 세월만 지나면 자연히 생기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영혼은 자기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들에게 어느 날 찾아오는 인연이며 소중하게 다루어야 하는 약한 인연일 뿐이다.
자신의 오감에 집중해서 얻은 내면의 고요가 육체적 습관이 된 사람들은 어떤 모습일까? 이들의 걸음걸이는 단순하고 진중하면서 가볍게 보일 것이다. 이는 본인이 의식하는 게 아니라 몸이 기억하고 움직이기에 그렇게 보인다. 그래서 기품이 있다.
자신의 영혼을 맑게 유지하는 사람들은 다른 곳에서도 찾을 수 있다. 이들과의 대화에서는 거북함이 느껴질지도 모른다. 그들은 내가 평소에 함부로 쓰는 말들을 꼭 써야 될 상황이 아니라면 쓰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말을 쓰려고 하는 순간을 자신의 오감이 가장 먼저 알게 되며 그것은 ‘누워서 침 뱉기’ 임을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이 해야 할 말을 조용히 할 뿐이다. 당연히, 하지 않아도 될 말은 웬만해서는 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이런 사람들을 그저 조용한 사람이라고만 하고 만다. 그저 조용한 사람들과는 구별해야 할 것이다.
영혼을 맑게 유지하려는 사람들의 손길은 소란스럽지 않을 것이다. 이들이 지나다니는 곳에서는 큰소리가 별로 들리지 않을 것이다. 이들은 자신이 지나가는 문을 쾅 소리가 나게 놔두지 않는다. 빈 택배 상자를 휙 집어던지지 않는다. 자신이 마신 물컵을 탁하고 소리 나게 하지 않는다. 자신 손을 거쳐간 물건들을 함부로 취급하지 않는다. 이러한 사람들은 이미 자기 사랑을 외물에게도 뻗친 사람들이다. 그런데 그러한 행동은 의식적이지 않을 때도 나타나는 지를 주의 깊게 살펴야 한다. 왜냐하면 혼자 있을 때를 삼간다는 것은 혼자 있을 때 무의식적인 행동이 가장 많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혼자 있을 때도 소란하지 않게 행동하는 습관을 몸이 기억해야 자연스러운 행동으로 이어질 수 있다. 이런 사람들에게서는 품위를 배울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영혼을 맑게 유지하는 사람에게서는 크게 변하는 표정을 읽을 수 없다. 언제나 자신의 내면에 평안함이 자리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자아도취와는 천양지차인 것이다. 이들은 모든 것이 여유로워 보인다. 여유롭다는 것은 남들이 나에게 한 실수에 대한 진정한 사과를 받아주고, 내가 실수를 했을 때는 즉시 진정한 사과할 수 있는 마음의 상태이다.
인류의 황금률을 실천하려면 나를 살피고 그곳에서 출발하는 것이 최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