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다움으로 서는 사유

영혼의 두 줄기 – 나다움의 성취와 나다움의 함양

by 김기황

나는 요즘 ‘삶’과 ‘내삶’을 구분해 생각한다. 삶은 세상이 나에게 부여하는 이름이고, 내삶은 내가 나로서 꾸려가는 이야기다. 삶은 세상의 시간 위를 흐르지만, 내삶은 영혼의 시간 위를 걷는다. 이 구분을 자각하게 된 것은 오래전부터 내 안에 깃든 작은 갈증 때문이다. 세상이 정한 기준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어떤 내면의 목소리, 그 목소리가 가리키는 방향이 진짜 ‘나’일까? 하는 물음이 한동안 내 마음의 가장자리에서 미묘한 떨림으로 머물러 있었다. 그 떨림을 나는 영혼이라 생각하기로 하였다.

영혼을 대단한 신비나 초월의 대상으로 보았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을 믿는 인간의 능력을 비하할 수는 없다. 이 능력으로 본능에 충실한 사람에서 본성의 조화를 추구하는 인간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인류가 이룩한 정신적 진보의 길고 긴 역사와 그 속에 담긴 지식을 내 것으로 만드는 쉬운 방법은 그 능력을 믿으면 된다. 천륜과 인륜, 도덕과 윤리, 선과 악, 우정, 영혼 등. 물리적으로 존재하지도 않으면서 인간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것들이다. 이 중에서 영혼은 개인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주지만 너무나 개인적이라서 소홀하기 쉽다. 삶과 내삶을 구분하면서 나에게는 영혼의 도움이 절실해지기 시작했다.

어지럽고 혼란한 일상의 대숲에 한 개의 돌멩이가 부딪혔다. 나의 언짢은 감정을 해소하려 엉뚱한 사람에게 역정을 내려하였다. 그 순간 어느 곳에 보이지 않는 문이 세워지고 있었다. 그리고 오감이 작동할 때마다 이러한 느낌은 계속됐다. 그 문(門)은 문(問)이고 문(聞)이고 문(紋)들로 이어졌다. 문(門)이 세워진 곳은 세상의 자극과 내면의 감정이 교차하는 지점이고 순간이었다. 그 문(門)에서는 희미하게 작은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그 빛은 강렬하지는 않았지만 따뜻했다. 그 빛이 사라지면 내삶은 방향을 잃을 거 같았다. 나는 이 빛을 영혼으로 삼기로 했다. 인류는 영혼이 사라지면 삶의 방향을 잃을 것이라는 경고를 끊임없이 해왔다. 이 경고를 받아들인 사람에게 영혼은 대단한 신비나 초월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영혼은 내가 세상 속에서 나로 남기 위한 최소한의 등불이 된다.

나다움의 성취란? 자신의 내면에서 길러진 힘이 세상 속으로 흘러나오는 과정이다. 이것은 단순히 성공이나 성취의 외형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영혼이 자기의 결을 따라 움직일 때, 비로소 세상과의 관계 속에서도 조화를 이룬다. 그때 인간은 일의 결과가 아니라 태도의 진실로 존재한다. 나는 나다움의 성취를 영혼의 날숨이라고 부르고 싶다. 안에서 길러진 기운이 밖으로 뻗어나가 말이 되고 행동이 되고 관계가 되는 순간. 그때 우리는 세상에 흔적을 남긴다. 그 흔적이 진심으로 이루어졌다면, 그것이 곧 ‘성취’다. 하지만 이 성취는 단독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언제나 함양이라는 들숨에 의지한다. 들숨 없이 날숨이 없듯, 자신을 기르는 일 없이 진정한 표현은 불가능하다.

함양은 마음을 닦는 일이라는 시선에 갇히게 되면 옹색해진다. 함양은 흐름 속에 있으면서 흐름을 담아낸다. 자연은 사계절 내내 계절의 꽃을 피워낸다. 사람들은 아름다움(美)이라는 기준으로 꽃을 평가한다. 아름다움은 꽃을 평가하는 절대 기준이 되고 만다. 크기를 따지고 형태를 조롱하며 피어난 계절과 장소를 시비한다. 함양은 이 모든 것을 머금어야 한다. 이 단어의 앞 글자에 ‘젖다’라는 뜻이 있다. 사람에게는 ‘젖는 상태’가 되지만 물에게는 ‘스며드는 활동’이 된다. 꽃의 스며들기를 허락하는 인간에게 함양이 머문다. 인간이 고집하는 ‘나다움’이라는 시선으로 꽃을 보면 아름다움은 기준이 아닌 가치가 된다. 꽃의 나다움이 아름다움이기에 모든 꽃은 아름답게 보이게 된다.

함양의 앞 글자에 들어 있는 뜻을 더 살펴보자. ‘적시다, 담그다, 넣다, 받아들이다, 잠기다, 가라앉다’ 등으로 새긴다. 단순히 ‘마음 닦음’이라는 뜻은 많이 모자란다. 이 단어들을 머금으면 좁은 시선에서 벗어나서 내면의 흐름을 회복하는 일이라는 근본적인 뜻에 시선을 줄 수 있다. 세상의 자극은 늘 빠르고 강하다. 그 자극이 내면을 스쳐 지나가면서 감정이라는 파문을 남긴다. 함양은 그 파문이 사라지는 과정을 기다릴 줄 아는 일이다. 그래서 그것은 수행이 아니라 기다림의 지혜를 볼 수 있다. 옛 선인들은 조식(調息), 정좌(靜坐), 독서(讀書)로 마음을 기르고자 했다. 하지만 나는 그것들이 단지 고요한 자세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리듬을 회복하는 일상적 기술이었다고 생각한다. 회의 사이의 짧은 숨, 지하철 안의 잠깐의 눈 감음, 스쳐 지나간 문장을 오래 곱씹는 행위. 이 모든 것이 오늘의 함양이다. 함양은 외부 세계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그 세계가 내 안으로 들어올 때 그 흐름이 탁류가 되지 않게 돌보는 일이다. 그 돌봄이 오래 쌓이면 사람의 마음은 조용히 단단해진다. 그 단단함이 바로 인품이 되고, 그 인품은 아무 말 없이도 타인에게 전해진다.

영혼은 나다움의 성취와 함양을 동시에 품는다. 하나는 밖으로 나아가는 힘이고, 다른 하나는 안으로 깊어지는 힘이다. 그 두 힘이 교차하는 자리에서 인간은 비로소 자기 자신을 인식한다. 그 인식의 순간이 바로 영혼의 첫 문이다. 이 문을 통과하는 일은 거창하지 않다. 그저 하루를 살면서도 내 안의 반응을 잠시 바라보는 일, 말하기 전에 숨을 고르는 일, 욕망이 올라올 때 그 무게를 느껴보는 일. 그런 아주 짧은 찰나 속에서 영혼은 깨어 있다. 그렇기에 영혼은 성취와 함양의 균형을 잡는 중심의 자리이기도 하다.
노자가 말한 도(道)가 이름 붙여지는 순간 도가 아니게 되듯, 영혼 또한 고정된 실체가 아니다. 그것은 매 순간 다시 세워지는 중심, 즉 살아 있는 중용(中庸)이다.

일상은 늘 복잡하고 빠르다. 때로는 함양을 말하기조차 민망할 정도로 소음이 많다. 그러나 나는 오히려 이 혼란 속에서 진짜 함양의 길이 시작된다고 믿는다. 고요한 산사의 수행보다 더 어려운 것은, 소음 속에서 자기의 리듬을 잃지 않는 일이다. 타인의 시선이 쏟아지는 도시의 한복판에서 자신의 숨을 알아차리고, 조용히 마음의 균형을 회복하는 사람. 그가 현대의 군자이며, 진정한 ‘함양된 사람’이다. 그들은 세상에서 눈에 잘 띄지 않는다. 목소리를 높이지도, 자신의 덕을 자랑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그들이 머무는 자리에는 이상하게도 공기가 맑아진다. 그들이 가진 것은 지식이 아니라 기운(氣運)이다. 그 기운은 설명할 수 없지만, 그곳에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그것이 함양이 세상 속에서 드러나는 유일한 방식이다.

나는 여전히 외제차를 보면 부럽고, 고급주택을 보면 한순간 욕심이 일기도 한다. 그러나 그 욕심이 나를 지배하지는 않는다. 부러움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감정이지만, 그 감정이 내삶의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된다. 삶이 세상의 기준으로 흐를 때, 내삶은 그 속에서 방향을 잃는다. 그래서 나는 끊임없이 묻는다. 지금 이 감정은 내삶의 목소리인가, 세상의 삶의 잔향인가?

이 물음이 나를 지탱한다. 비웃음을 받을 때도 있다. 그러나 나는 그 웃음 속에서 그들의 불안을 본다. 그들은 세상 속에서만 평가받는 삶을 살기에, 내삶을 말하는 사람을 두려워한다. 나는 지질한 사람이 아니라, 영혼의 속도를 따라가려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 속도는 세상의 속도보다 언제나 느리다. 그러나 그 느림 속에서만 인간은 자신을 회복한다.

이제 나는 안다. 나다움의 성취와 함양은 서로 다른 길이 아니다. 들숨과 날숨이 하나의 호흡을 이루듯, 그 둘은 하나의 생명으로 이어져 있다. 함양은 영혼의 들숨이다. 세상에서 흩어진 마음을 다시 모으고, 흐린 물을 가라앉히는 시간. 성취는 영혼의 날숨이다. 그 고요한 중심에서 세상으로 다시 흘러가는 힘. 이 두 흐름이 이어질 때, 인간은 비로소 흔들리지 않는다. 영혼은 그 두 흐름이 만나는 자리, 삶과 내삶의 교차점에 서 있다. 그곳에서 우리는 세상 속에서 살되, 세상에 휩쓸리지 않고, 내면을 지키되 세상을 거부하지 않는다. 그 미묘한 조화가
나다움의 완성이며, 영혼이 살아 숨 쉬는 상태다.

나는 이 글을 인생의 초입에 선 사람들에게 건네고 싶다. 삶의 빠른 물살 속에서 길을 잃은 이들에게, 이 작은 독백이 하나의 숨이 되기를 바란다. 세상은 늘 요동치겠지만, 그 안에서 단 한 번이라도 자신의 영혼의 속도를 느낀다면, 그것이면 충분하다. 영혼은 멀리 있지 않다. 그것은 당신의 하루 속에서 들숨과 날숨처럼 조용히 흐르고 있다. 그 흐름을 알아차리고, 지극히 살아내라. 그것이 곧 나다움의 길이며, 삶과 내삶이 하나로 이어지는 자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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