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다움으로 읽는 논어

불혹(不惑). 다시 읽다

by 김기황

‘불혹’은 공자가 만든 말 중에서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단어인듯하다. 인생 역정에서 삶의 무게를 인식한 사람들이라면 한 번은 반드시 되뇌었을 것이다. 여기에는 계기라는 체험이 동반되어 있다. 내삶에서 어떤 경험이 내면을 움직였는가를 감지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예민함을 잃지 않는다. 이 예민함은 천성을 함부로 드러내는 행위보다는 천성을 살피는 도구로써 활용된다. 공자는 이 예민함을 일흔까지도 잃지 않았기에 공자는 그의 삶을 살필 수 있었다. 십 대의 배움을 이십 대에 더욱 단단히 익혀서 삼십 대에 뜻을 세웠기에 사십 대에는 흔들리거나 혼란스러워지지 않았다고 하였다. 그래서 불혹은 계기들을 예민하게 살피고 거기에서 얻은 내면의 흐름을 유지한 사람이라야 토해낼 수 있는 감상평이다.


삶은 세상의 자극과 여기에 반응하는 나의 상호작용이 만들어 낸다. 그래서 어떤 상호작용을 하는가에 따라 삶이란 단어의 무게는 달라진다. 삶에는 무게가 없다. 삶의 무게는 각자가 풀어내는 무게다. 삶의 무게를 풀어내기 위해 본성, 천성, 개성 등의 설명이 동원된다. 이런 단어들에 시선이 머문 적이 있다면 인간으로 살아가겠다는 존재적 자각의 계기가 있었다. 다만 ‘예민함’으로 내면의 반응을 살피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예민함’은 감정을 외부로 드러내는 ‘까탈스러움’으로도 읽히기에 무시, 제거 배제되어 버린다. 그러기에 스쳤던 계기들을 포착하여 내면을 살피는 태도를 유지하는 것은 ‘나다움’이라고 풀이할 수 있다. ‘나다움’에는 생명체가 이로움을 추구하는데 힘쓰는 본성, 자연이 사람에게 부여한 감정인 천성, 이 둘의 조화를 만들어 드러내는 개성이 얽혀있다. 이로움을 추구하는 데 힘쓰는 본성의 지배를 받는 존재인 인간은 흔들림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 이로움의 추구를 포기하는 것은 생존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흔들림에서 흔들리지 않을 수 있었던 계기를 알아차리는 내면에 존재적 자각이 자리한다.


불혹은 나다움으로 풀어낸 존재적 능력에 관한 각자의 감상평이다. 불혹은 흔히 마흔의 나이를 가리키는 말로 통용된다. 그러나 나는 마흔 시절의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확신하게 되었다. 후생가외(後生可畏)라는 말을 떠오르게 했던 순간, 불혹은 고정된 나이와 상관없는 진화하는 능력임을 깨달았다. 이 능력은 어느 날 갑자기 갖추어지는 것이 아니라, 삶 전체를 흔들고 밀어붙이며 깨뜨린 뒤 천천히 피어나는 내면의 기술이었다. 꿈과 희망에 몰입하던 20대와 30대의 나에게는 불혹이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그때의 나는 흔들리지 않는다는 말 자체를 일종의 성취처럼 보았고, 흔들리지 않기 위해 더 많은 것을 가지려 했으며, 흔들리지 않을 만큼 단단해지기 위해 더 많은 목표를 세우고 뛰었다. 그 시절의 나에게 불혹은 아름다운 유혹처럼 빛났다. ‘언젠가 나도 저 단단함을 얻겠지.’ 하지만 그 단단함은 나의 것이 아니라 타인의 시선 속에서 상상해 낸 그림자였다. 마흔이 지나고, 많은 시간을 돌고 돌아 50대 후반을 지나면서 나는 뒤늦게 깨달았다. 내가 마흔의 나이에 불혹을 얻지 못했음을. 그리고 그 사실이 당연함에도 부끄러워하며 자신을 홀대했다. 불혹은 나이가 주는 위상이 아니라, 자기 존재가 스스로를 얼마나 이해했느냐에 따라 주어지는 현실적 능력이었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유혹’으로서의 20~30대는 흔들림이 필요했던 시절이었다. 20대와 30대는 흔들림의 연대다. 나는 흔들리지 않으려고 애쓰면서도 동시에 더 많은 유혹을 향해 달려갔다. 더 좋은 직장, 더 많은 인정, 더 많은 사랑, 더 많은 가능성. 이 모든 것이 나를 흔들었다. 그러나 그 흔들림은 삶의 결함이 아니라 학(學)의 원료였다. 공자가 말한 학은 단순히 지식을 축적하는 행위가 아니다. 학은 ‘나를 흔들리게 하는 것들’을 이해하는 과정이다. 그리고 입(立)은 나를 서게 하는 내면의 구조를 세우는 단계다. 20~30대의 유혹은 바로 이 학과 입을 작동시키는 시작점이었다. 나는 그 시절의 유혹을 아름다웠다고 말하고 싶다. 그것은 아직 나를 규정하지 않은 가능성의 시대였고, 가능성이 나를 흔드는 방식은 사실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대부분의 사람은 흔들림을 실패라고 여긴다. 나의 지금 생각으로는 흔들림은 배움보다 앞서 존재하는, 배움을 일으키는 진동이었다. 흔들림이 없었다면, 나는 나를 이해할 기회를 얻지 못했을 것이다. 흔들림 속에서만 드러나는 내면의 균열들이 있었고, 그 균열들이 있었기에 나는 나라는 존재가 얼마나 불안정하고, 얼마나 방향을 갈망하는지를 볼 수 있었다. 그 시절의 나는 불혹을 갈망했지만, 불혹은 갈망으로 닿을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그것은 이해의 깊이로만 도달할 수 있는 차원이었다.

50대 후반에 이르러 새로운 시선이 생겼다. 흔들림이 ‘가혹(苛酷) 한 마흔’으로 재발견되었다. 돌아본 마흔은, 내가 기대하던 ‘흔들리지 않는 나이’가 아니었다. 흔들리지 않기 위한 나이가 아니라 오히려 마흔은 흔들림의 정체가 무엇인지 직면하게 만드는 시기였다. 외부의 혼란은 시간이 지나면 해결되지만, 내면의 혼란은 시간이 흘러도 사라지지 않았다. 경제적 안정도, 사회적 지위도, 명예도 내면의 공허를 메우지 못한다는 사실을 나는 주변 사람들, 그리고 나 자신을 통해 반복해서 확인했다. 그래서 나는 이 현상을 존재적 허기라고 불렀다. 흔들림의 원인은 외부가 아니라 내부에 있었다. 외부의 조건이 모자라 흔들리는 것이 아니라, 내면의 구조가 아직 조립되지 않았기에 흔들렸다. 그리하여 ‘성공한 사람들도 흔들린다’는 항간의 이야기가 이해되었다. 이 깨달음은 불혹을 완전히 다른 개념으로 바꾸어 놓았다. 불혹은 흔들리지 않는 상태가 아니라 흔들림을 꿰뚫어 보는 능력이다. 흔들림을 일으키는 조건들이 나의 방향을 어지럽히지 않는 능력이다. 흔들림의 이유를 이해했기 때문에, 그 흔들림에 속지 않는 내면의 질서가 생긴 상태다. 그러므로 마흔이라는 연령은 상징일 뿐이다. 그것은 삶의 무게를 풀어내는 또 다른 계기였다. 불혹의 실체는 나이보다 깊고, 연령보다 넓고, 시간보다 오래가는 능력이다. 그 능력은 나이가 쌓였다고 자동으로 생기지 않는다. 70이 되어도 수양하지 않은 이들이 널려 있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공자의 연령 구분은 생물학적 연령이 아니라 삶의 내적 리듬을 설명하는 비유에 가깝다. 불혹은 마흔이라는 나이를 가리키는 말일뿐, 불혹이라는 능력을 일컫는 말은 아니다. 불혹을 얻는 사람은 20대에도 등장할 수 있고, 80대에도 도달하지 못할 수도 있다. 나는 이 지점에서 확신하게 되었다. 불혹은 나이가 아니라 존재론적 자각의 깊이다. 나는 그 지각을 너무 늦게 얻은 것이 아니라, 내가 그 깊이에 도달가능한 시점이 내 삶의 리듬과 정확히 맞아떨어졌을 뿐이다.

지금의 나는 흔들림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내삶으로의 통합’이라는 흐름에 예민하게 반응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흔들림은 삶이 계속 움직이고 있다는 신호이며, 그 진동 속에서 ‘나는 누구인가?’라는 존재적 질문이 자라고 있기 때문이다. 불혹 이후의 단계는 혼란이 사라지는 시기가 아니라 혼란이 나의 일부가 되는 시기다. 나는 이제 흔들림을 밀어내지 않고, 흔들림을 통해 나의 중심이 어떻게 서는지를 본다. 이것이 내가 말하는 통합이다. 통합은 삶이 단단해지는 과정이 아니라 삶의 조각들이 서로 연결되는 과정이다. 20대의 흔들림도, 30대의 불안도, 40대의 충돌도, 50대의 허기도 모두 한 방향을 향한 파동이었다는 사실을 통합의 시기에 비로소 이해하게 되었다. 불혹이 내면의 질서를 갖추는 능력이라면, 통합은 그 질서를 삶 전반으로 확장시키는 흐름이다. 나는 이 흐름을 ‘나다움’이라고 부른다. 나다움은 출발점이 아니라 과정이며, 결과가 아니라 리듬이며, 상태가 아니라 움직임이다. 나다움이란 흔들림을 견딘 흔적이고, 흔들림을 관찰한 시간이며, 흔들림을 넘어 자기 구조를 찾은 영혼의 방향성이다. 나는 지금에서야 말할 수 있다. 불혹은 나이가 아니라 능력이며, 통합은 그 능력이 펼쳐지는 삶의 형태이며, 나다움은 그 모든 여정을 꿰뚫는 본질적 흐름이다.

불혹은 도달지가 아니라 열린 문이다. 불혹을 지나온 나는 이제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불혹은 흔들리지 않는 상태가 아니라 흔들림에 속지 않는 내면의 능력이다. 불혹은 나이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의 문제이다. 불혹은 배움(學)과 서기(立)를 통과하며 자라나는 영혼의 기술이다. 불혹을 얻은 사람은 나이에 관계없이 군자나 성인의 길 위에 설 수 있다. 불혹은 나다움이라는 흐름을 이해하는 관문의 역할을 한다. 결국 나는 불혹을 이렇게 정의하고 싶다. 불혹은 외부의 혼란보다 내면의 리듬이 더 강해지는 시점이다. 흔들림을 통해 나를 알게 되고, 나를 통해 삶을 바라보게 되는 능력이다. 흔들림이 멈추는 것이 아니라 흔들림 속에서 내가 사라지지 않는 능력이다. 그리고 이 능력은 나이가 주는 것이 아니라 삶 전체가 나를 흔들어 깨운 뒤에야 비로소 드러나는 조용한 내면의 힘이다. 그래서 불혹(不惑)은 가혹(苛酷)이었지만 가혹(佳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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