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십이립(三十而立): 공자의 입(立)과 현대인의 입(立) 사이에서
공자의 ‘학’을 지식을 쌓는 과정이 아니라, 자신을 납득하는 내적 근거를 세우는 실천적 사유의 길이라는 해석은 후대의 평가다. 배움은 곧 나다움이 형성되는 흐름이며, 삶의 원리가 몸과 마음에서 일치하도록 다듬는 과정이다. 이러한 후대의 해석은 공자를 성인(聖人)의 반열에 들게 했다. 공자가 살던 시대 상황과 우리의 시대 상황이 다르니 학(學)에 대한 구분이 필요하다. 공자는 학(學)의 뜻을 꾸준히 넓히고 높이면 되었다. 그렇다고 그것이 간단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지금은 지식과 정보를 습득하는 학습(學)만으로는 삶의 갈피를 잡기가 어려운 시대이다.
공자는 자신의 사유를 실천하려던 원대한 희망이 좌절되자 고국으로 귀환하였다. 오늘날의 기준으로 평가한다면 실패한 인생이었다. 어떤 나라도 그의 사유를 펼칠 수 있는 벼슬을 주지 않았다. 그렇게 많은 나라를 돌아다니면서도 풍족한 살림을 꾸려보지 못했다. 때로는 무뢰배에게 심한 모욕을 받기도 했다. 그럼에도 마음 가는 대로 행해도 법도를 넘지 않는다고 회고했다.
공자는 십 대에 배움에 뜻을 두고 삼십에 입(立)했다고 하였다. 공자가 이야기한 학(學)이 오늘날과 차이가 있었듯이 입(立)이란 의미도 다르다. 그는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며 ‘三十而立이라 적었다. 그러나 그것은 규범이 아니라 회고였다. 그가 서른에 어떤 상태로 ‘섰’는지, 그가 일흔을 넘기고 나서야 의미가 선명해졌던 기억의 재구성이었다. 따라서 우리는 그 말을 오늘 그대로 가져와 현대인의 이정표로 삼을 수 없다. 오히려 공자의 입(立)이 무엇이었는지를 살핀 뒤, 오늘의 삶이 요구하는 ‘서 있음’이 무엇인지를 다시 만들어가야 한다. 공자가 말한 ‘입(立)’은 내면의 질서가 세워지는 순간이다. 논어 전체를 보면 공자가 말한 ‘입’은 단순한 독립도, 사회적 자립도 아니다. 그가 말한 ‘입’이라는 말은 여러 곳에 작은 파편처럼 흩어져 있고, 그것들은 한 방향을 가리킨다.
공자는 배움을 도구가 아닌 삶의 본질로 보았다. 학이불사즉망(學而不思則罔). 배우고 생각하지 않으면 그물에 잡힌 물고기와 같이 얽히게 된다고 했다. 혼란한 시기를 헤쳐 나가는 예방책이다. 그래서 학습의 중심축은 생각에 있어야 함을 설파한다. 오늘날 우리는 수많은 지식과 정보를 배우는 데 힘을 쏟는 경향이 강하다. 1차 학습의 종류와 분야를 더 많이 섭렵하는 것에 몰두한다. 그러나 공자는 서른에 학을 삶의 방식으로 받아들인 상태, 즉 입(立)했다고 회고한다. ‘무엇을 배우는가?’보다는 ‘배운 것이 나에게 무엇인가?’에 시선이 머무르게 했다.
행동의 원칙을 세웠음을 ‘군자는 본을 세운다(君子務本)’, ‘인(仁)을 향해 자신을 세운다(克己復禮爲仁)’고 했다. 군자는 모든 사람이 존경하거나 신뢰할 수 있는 인간이다. 그가 힘을 쏟는 기초라면 인(仁)이어야 한다. 인(仁)의 안목은 넓어서 사리사욕에 눈이 어두운 사람은 절대 볼 수 없는 경지다. 그래서 좁은 자신의 욕망을 다스리고 넓은 인을 추구하는 것은 군자의 덕목이 된다. 군자를 나다움으로 사는 사람이라는 현대적 해석이 가능할 것이다. 나다움은 단순히 자기 욕망만을 따르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입은 근본이 몸 안에 자리 잡는 순간이다.
공자는 삶의 방향성을 수신의 길 위에 세웠고, 그 길은 외부의 성취보다 내면의 질서를 세우는 일이었다. 외부의 자격을 얻는 세움이 아니라, 자기 삶의 내면적 기준을 세웠다. ‘자신이 바르면 명령하지 않아도 저절로 행해진다.(其身正, 不令而行(기신정 불령이행))’. ‘군자는 자기에게서 찾지만 소인은 남에게서 찾는다.(君子求諸己, 小人求諸人(군자구저기 소인구저인))’.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이 앎이다.(知之爲知之, 不知爲不知, 是知也(지지위지지, 부지위부지, 시지야)’. 공자의 입은 내부의 기둥이 세워지는 순간이었다. 삶이 흔들리지 않는 것이 아니라, 흔들릴 때마다 돌아갈 중심이 생긴 상태로 볼 수 있다.
그러나 현대의 30살은 공자의 시대와 다르다. 공자 시대에는 30이면 이미 결혼했고, 가문을 이어야 했고, 사회적 위치를 갖추어야 했다. 오늘의 30은 전혀 다르다. 직업이 정착되지 않은 경우가 흔하고, 사회적 역할보다 자기 이해가 더 절실하며, 과거보다 훨씬 긴 수명을 전제로 미래를 설계해야 한다. 따라서 공자의 삼십이립(三十而立)을 그대로 가져오면 많은 이들이 ‘나는 아직 서지 못했다’고 스스로를 판단하게 된다. 그러나 이는 공자의 의도와도 맞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했지, 세대 모두에게 강요할 모델을 만든 것이 아니다.
오늘의 삼십은 ‘이미 서야 하는 나이’가 아니라 ‘어디에 나를 세울지 묻기 시작하는 나이’에 가깝다. 공자의 입(立)이 삶의 중심축을 찾은 순간이었다면, 현대인의 입(立)은 내가 기대어 설 만한 축을 탐색하기 시작하는 시기이다. 현대인은 압도적인 정보의 파도 속에서 자신의 목소리가 어디에 있는지부터 찾는 과정을 겪는다. 따라서 현대의 입은 완성이나 정립이 아니라 탐색과 수립의 과정 자체다. 공자의 입이 결과라면 오늘의 입은 과정이다.
공자의 입과 현대인의 입은 전혀 다른 시대에 속해 있지만, 그 사이에는 한 가지 중요한 접점이 있다. 사람은 어느 시대에나 자신이 서 있어야 할 자리를 찾는다. 그 자리는 사회가 정해주지 않는다. 자기 안에서 세워진다. 공자는 그 자리를 인(仁)과 예(禮)라는 가치 안에서 찾았다. 현대인은 그 자리를 ‘나다움’, ‘관계의 조화’, ‘내면의 일치’, ‘삶의 흐름’ 속에서 찾는다.
형태는 다르지만, 본질은 같다. 인간은 닿아야 할 중심을 찾고, 그 중심에 기대어 다시 자신을 세운다. 그것이 어제의 입이고, 오늘의 입이다. 그래서 현대의 삼십은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삼십이립(三十而立)은 더 이상 ‘30살에 모든 것이 자리를 잡아야 하는 나이’가 아니다. 오히려 이렇게 새로 말할 수 있다. 서른 즈음, 나는 비로소 ‘나라는 존재’를 어디에 세울지 묻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질문을 견딜 만큼 내면이 자라난다. 흔들림을 무서워하지 않고, 흔들림 속에서 중심을 찾는 힘이 서기 시작한다.
공자의 입이 회고의 경지라면 현대의 입은 질문이 깊어지는 경지다. 그 질문은 ‘나는 누구인가?’가 아니라 ‘나는 어디에 나를 세울 것인가?’라는 더 근원적인 물음이다. 그리고 그 질문을 견디는 시기, 그 질문을 놓지 않는 마음, 그 질문을 통해 나다움이 스스로 형성되기 시작하는 때. 그때가 바로 오늘의 삼십이립(三十而立)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