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성어 이야기

적정기술로서의 한자성어

by 김기황

강요에 대한 반성, 적정기술

‘적정기술’의 사전적 정의는 ‘제3세계의 지역적 조건에 맞는 기술. 제3세계로 직수입된 근대과학 기술이 그 나라의 근대화에 이바지하기보다 인적ㆍ물적 환경을 파괴한 데 대한 반성에서, 새로이 자립 경제의 관점에서 모색된 기술 개념’이라고 길게 서술한다. 달리 말하면 현대 지구촌의 첨단기술을 비롯한 앞선 국가들의 발전 정도에 미치지 못하는 나라들을 도와주겠다는 내용이다. 국제관계의 정치, 외교에 관한 역사를 살펴보면 이러한 불평들이 초래된 이유가 명확하지만 책임은 굳이 논하지 말자는 국제적 암묵이 있는 듯하다. 적정기술이라는 것이 현재 경제 수준의 정도가 낮은 국가가 사용하기에는 첨단기술은 불필요하다는 숨겨진 의도가 있는 듯하여 기분이 썩 좋지는 않다. 그리고 그 숨은 의도는 금전적인 이득을 취하기에는 부족하다는 것이다. 그렇더라도 ‘적정기술’이라는 용어를 만들어낼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의 노고를 잊어서는 안 된다. 그들은 정말 순수하게 인간성에 바탕을 둔 행위들로 국가나 사회가 하지 못하거나 하지 않는 일을 수행한 사람들이다. 그들이 활동하는 지역에서 그 지역 사람들이 그들의 삶을 좀 더 낫게 꾸려나가는 방안을 오랫동안 고민한 끝에 도출된 개념임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한자 성어는 우리 시대의 적정기술

일상생활 속에서 나와의 소통을 시도하는 그것조차도 쉽지 않은 바쁘고, 다양하고, 다변하는 사회에 살고 있다. 수도자들처럼 특별한 장소를 찾을 수도 없는 것은, 우리가 모두 농자천하지대본야라는 생존 유지 수단에 매달려 생계 활동을 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철학적 사유, 정치경제적 신념, 학문적 연구들도 결국 나와의 소통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나만의 방법을 통하여 나와의 소통을 적정하게 유지하고 있다고 해도, 타인과의 소통이 어려운 것은 나의 소통 내용을 다른 사람들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누군가가 자신과의 소통을 노래한 ‘그저 와준 오늘은 고맙지만, 죽어도 오고야 마는 내일이 두렵’지 않기 위해서는 또 다른 나만의 나와의 소통 창구들을 나름의 방법으로 만들어 가야만 한다.

한자 성어를 우리 선조들은 창작의 도구로 활용하면서 살았다. 선조들이 남긴 많은 시집, 서책, 그림 등의 기록에는 한자 성어의 뜻을 알아야 글이나 문장, 그림의 뜻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것들이 많다. 오늘날에는 지식의 확충이나 점수를 얻기 위한 암기용으로 활용되는 측면이 더 강한 것 같다. 선조들은 글짓기, 그림 그리기 등에서 제 생각을 장황하게 늘어놓는 대신에 압축된 한자 성어를 활용하였다. 선조들은 이렇게 함으로써 나와의 소통뿐만 아니라, 타인과의 소통에서도 더 높은 질을 추구하는 사유의 차원을 높였다. 현재 우리가 한자 성어들을 그전보다 덜 사용하는 것은 단순히 점수 획득용으로 퇴보했다고만 할 수는 없다. 사회환경이 바뀐 것도 있기 때문이다. 우선은 학습의 저변이 넓어졌다. 전 국민이 한글을 해독하게 되었는데 굳이 뜻이 통하지 않는 말로 소통을 어렵게 할 필요는 없다. 그리고 굳이 한자 성어를 사용하지 않아도 될 만큼 우리말에는 한자 성어를 대체할 표현들이 많기 때문일 것이다. 항간에 자주 쓰이는 한자 성어들은 대부분 우리말에도 그러한 내용을 담은 표현들이 있다고 보면 될 것이다. 다음은 인쇄의 혁명이다. 선조들이 살았던 시대에는 종잇값이 비쌌다. 그래서 책을 살 수 있는 재력을 가진 사람들이 아니면 내용이 좋은 책은 자신이 직접 베껴야 했다. 이런 사정도 허락되지 않으면 책을 빌려서 읽어야 했다. 돌려줘야 하는 책의 내용을 기억하기 좋은 방법은 이야기로 만들어 기억하는 것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한자 성어는 이야기로 전해지고 있다. 어떤 책은 몇 개의 한자 성어로 내용을 정리할 수도 있을 것이다. 붓으로 한 글자씩 다른 종이에 옮겨 적는 일도 쉽지 않은 일인데, 자신의 많은 생각을 모조리 종이에 쓰는 것은 더 어려운 일이었다. 한지에 먹을 사용하여 붓으로 글씨를 쓰고 나면 고쳐쓰기가 매우 곤란하다. 그러니 쓰기 전에 많은 생각을 해야 한다. 그리고 생각을 정리하는 데 한자 성어를 활용하면 나중에 다시 기억하기가 수월하다. 우리는 생각을 정리해서 신중하게 종이에 옮겨 쓰는 세상에 살고 있지 않다. 지금은 자기 생각을 컴퓨터에 우선 쓰고 나서 다시 정리하는 세상에 살고 있으며, 이에 들어가는 비용은 거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인 세상에 살고 있다. 그러니 선조들과 비교하면 굳이 한자 성어를 더 많이 사용하지 않아도 된다. 한자 성어를 더 많이 사용하지 않아도 우리는 그 시대보다도 더 훌륭한 세상을 만들고 있다. 한자 성어를 전혀 몰라도 세상을 살아가는 데 불편함이 전혀 없는 세상에 살고 있음에도 한자 성어가 우리 주위를 떠나지 않는 것은, 여전히 한자 성어의 유용함이 존재한다는 의미이다.

첨단학문에 대한 적정기술, 한자 성어

내가 태어나보니 이러이러한 상황이었다. 이는 모든 인간이 직면하는 상황이다. 어떤 생명체도 자신이 태어날 시공간을 선택할 수는 없다. 태어나보니 궁벽한 산골의 초가삼간이었고, 울음을 그치고 보니 도시의 대문도 없는 집이었고, 정신을 차리고 보니 재벌 집이었을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어릴 적부터 나 이외의 것들은 주어지는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세상과는 별개의 존재이며, 그래서 세상은 나를 위해 이러저러한 것들을 채워주는 것이라는 관념을 고착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와의 소통이 필요하며, 나와의 소통이 궁극적으로 도달해야 하는 정해진 경지나 차원은 있을 수 없지만, 최소한 세상이 나이고 내가 세상이라는 인식만은 해야 한다. 한자 성어가 나와의 소통에 도움이 되려면, 한자 성어의 이야기가 곧 나의 이야기임을 인식하면 된다. 종교적 체험이 아니라, 우리 일상에서 일어난 일을 축약시켜 글로 창작한 것이 한자 성어이다. 한자 성어 속의 일상은 실제로 있었던 일상이었다. 우리가 착각하는 것은 한자 성어 속의 이야기가 실제로 있었다 하더라도 나의 이야기는 아니라는 것이다. 또 아니면, 착각하는 것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머릿속에서 배제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기에 나와의 소통에 활용하지 못하고 점수 획득이나 지식의 확충용으로 전락시키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떤 한자 성어든 자신을 대입하여 곰곰이 씹다 보면, 나와의 소통의 다양한 경로들을 살필 수 있다. 필요하다면 철학적, 학문적, 의학적, 종교적 인문학 접근으로 자신과의 소통이 필요하다. 일상생활에서 적정 수준의 나와의 소통은 한자 성어만으로도 풍부해질 수 있다.

나를 살피는 어느 순간 떠오를 한자 성어, 그리고 화두

한자 성어는 내가 나와 세상과의 소통한 소감을 정리할 수 있게 할 수 있다. 우리가 읽고 보고 듣는 것의 대부분은 남들이 세상과 소통하여 내놓은 감상문들이다. 위대한 종교가, 철학자, 학자, 예술가, 작가 등 모두가 그들 자신이 세상과의 소통에서 얻은 느낌을 그들의 언어로 표현한다. 위대함과 평범함이라는 평가의 차이는 세상 사람들이 그들의 감상문에 공감을 많이 하는가의 차이일 뿐이다. 그러나 위대함과 평범함은 같은 차원이다. 모든 사람이 자신과의 소통과 세상과의 소통한 내용을 많은 이에게 공감을 받을 수 있도록 전하지는 못한다. 그렇지만 나와의 소통을 나만을 위한 감상문으로 남기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다. 굳이 글로 써서 보관할 필요가 없을 수도 있다. 한자 성어를, 지식을 뽐내는 데만 쓰지 말고, 나와의 소통과 나와 세상과의 소통에 활용한다면 한자 성어는 많은 기술을 가진 심리적 적정기술이 된다. 문득문득 떠오르는 일상의 기억들과 한자 성어를 엮다가 보면, 머릿속이 간명해진다. 우리가 한자 성어를 해석한 글을 읽는 것은 한자 성어의 원래 뜻으로 자신의 삶을 비추어 보는 것은 쉽지만은 않다는 점이다. 한자 성어를 해석한 글 속에는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언어로 되어 있어 친근하거나 쉽게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한자 성어에 담겨있는 뜻을 오늘의 언어와 오늘의 시대 상황을 찾아보는 것이다. 그래서, 한자 성어는 나와의 소통을 표현하는 서술하는 감탄사, 느낌표, 탄식이다.

인류가 정신적 문화유산 속에 남겨놓은 “존재하지도 않은 상상을 믿는 능력”은 유전적 요인이 배제된 후천적으로 습득된 능력이다. 육체적 감각과 경험의 차원에서 정신적 차원의 삶으로의 이동은 인류 정신문화 역사의 중단 없는 고민거리였다. 불교에서는 일반인들의 삶에서 깨달은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선불교에서는 화두를 활용하여 깨달음에 이르고자 한다. 당연히 화두 속에는 깨달음이라는 목표에 도달할 수 있는 뜻이 담겨있다고 한다. 이는 내삶의 리더로 살아가려고 하는 사람은 맹목적으로 삶의 방향을 설정하지 않음과 연결된다. 선불교의 화두는 사람들의 깨달음을 모아서 공안이라고 부른다. 공안은 물리적 감각과 경험 속에 묻혀 사는 사람들에게는 솔직히 너무 난해한 이야기들이다. 그 화두 속에 묻어 나오는 선사들의 목소리는 우리에게 듣기 감각과 난감한 경험을 선사하는 경우가 많다. 내삶의 리더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나의 목소리보다는 나의 이야기를 해야 한다. 선불교에서 화두를 이정표 삼아 깨달음에 이르고자 노력하듯이 물리적 환경에서 살아가는 우리가 내삶의 리더로 살아가기 위해 이정표를 삼을 만한 것이 없을까? 존재하지도 않는 상상을 믿는 능력을 존재했던 실제의 이야기를 기억할 수 있는 능력을 개발하는 방법이 없을까? 나는 이것을 한자 성어를 활용하는 데서 찾는다.

한자 성어는 실제 있었던 이야기들이거나, 일상생활 속에서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존재하지도 않은 상상을 믿기 위해서 능력을 발휘하기보다, 그저 이야기를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한자 성어를 알려진 내용만을 읽는 것은 목소리내기일 뿐이다. 한자 성어의 내용으로 깊이 빠져들어 내삶의 내면으로 들어와서 내 이야기를 할 수 있어야 한다. 화두는 나의 목소리를 세상에 알리는 것이 아니라 나의 이야기를 세상에 알릴 수 있도록 연습하기 위한 도구이다. 지식도, 기술도, 심지어 화두조차 강요가 아니라 적정해야 한다. 이들 모두는 내삶의 리더로 살아가려는 사람들이 취할 수 있는 적정기술이다.

작가의 이전글희미한 기억을 더듬어 보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