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믿고 보는 픽사'의 27번째 장편 애니메이션 작품인 영화 <엘리멘탈>에 대해 이야기해보려고 합니다. 아 참, 첫 문장부터 한 가지 수정해야 할 부분이 생겼네요. '믿고 보는 픽사'라 불렸던 과거에 비해, 최근의 평가는 그리 긍정적이지만은 않으니까요. 유명한 평론가가 영화 업(Up, 2009)에 대해 남기셨던 짧은 평이 하나 생각납니다. "픽사의 구내식당에선 대체 어떤 메뉴가 나오길래" 라는 문장이었는데요. 이 간단한 비유야말로 픽사의 찬란했던 시절을 대변합니다.
2007~2010년에 이르기까지 픽사에서 내놓았던 작품들은 매 년 놀라움 그 자체였습니다. 라따뚜이(2007), 월-E(2008), 업(2009), 토이스토리3(2010)로 이어지던 200%짜리 타율은 '믿고 보는 픽사'라는 말이 나오기에 차고 넘치는 수준이었죠. 물론 이후에도 픽사 스튜디오는 훌륭한 작품들은 제작했지만, 그 때에 비할만큼 모든 작품이 성공적이지는 않았습니다. 또한 디즈니-픽사가 ott를 주력 사업으로 하던 시점부터 픽사의 작품들은 많이 달라졌다고 생각합니다. 2006년 디즈니 인수합병 이후에도 픽사 는 자신들의 철학을 지키고 이를 작품에 충분히 반영해왔으나, 근래에는 달라졌다는거죠.
픽사의 작품이 디즈니 풍의 그것과 구별되는 가장 큰 특징은, 다름 아닌 '내러티브'에 있습니다. 비슷한 메시지를 전달할 때에도, 픽사의 작품에는 특유의 기발한 상상과 애틋한 은유가 담겨 있으며 바로 이러한 점이 아이를 데리고 극장에 간 어른들이 되려 눈물 흘리도록 만들었던 힘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허나 근래 픽사의 여러 작품들은 관객들로 하여금 '픽사 치고는 진부하다' '감동이 없다'는 평을 받는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상황이 이렇기에 개봉 당시 영화<엘리멘탈>을 감상하러 가는 제 마음은 걱정 반, 기대 반이었습니다.
2023년에 개봉한 영화 엘리멘탈(Elemental, 2023)
1. 엘리먼트 시티의 '아메리칸 드림'
우선 영화의 배경이 되는 엘리먼트 시티는 미국의 뉴욕시를 모티브로 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 대도시에는 다양한 특징을 가진 종족들이 '아메리칸 드림'을 실현하고자 모여듭니다. 그리고 엘리먼트 시티는 영화 주토피아(2016)의 주인공이 시골을 떠나 도시로 향하던 장면과 겹쳐 보이기도 합니다.
첫 장면에 등장했던 한 쌍의 부부이자 불의 종족인 버니와 신디는 그들의 가족, 동족과 함께 고향에서 열심히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곳이 자연재해로 파괴되면서 가족과 동족을 뒤로 하고 새 삶을 찾아 대도시로 이주하게 됩니다.버니와 신디는 일터이자 삶의 보금자리인 가게를 차리기 위해 도시를 떠돌다가, 결국 변두리의 다 쓰러져가는 가게를 하나 얻게 됩니다. 그들이 이곳을 열심히 수리하고 열과 성을 다해 가게를 운영하게 되면서, 도시의 변두리는 불의 종족이 함께 살아가는 터전으로 바뀌게 됩니다. 이 영화의 감독인 피터 손(Peter Sohn)은 한국계 미국인입니다. 그는 아마도 이 장면을 통해 '맨 땅에 헤딩'을 해야 했던 1세대 이민자들에 대해 헌사를 보내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2. 'K-장녀'와 '금수저'의 만남
불 같은 성격을 가진 '앰버 루멘'
버니-신디 집안의 장녀이자 유일한 자식인 앰버는 아버지의 가게를 물려받는 것을 일생의 목표로 여깁니다.(여러모로 k-장녀의 헌신을 떠올리게 하는 인물입니다.) 앰버는 말 그대로 '불 같은 성격'을 갖고 있기에 번번이 사고를 치게 되고, 그녀의 분노는 모든 일을 그르칩니다. 그런 앰버에게 아버지는 상대의 마음을 진정으로 바라 보라고 가르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분노의 폭발은 좀처럼 조절이 되지 않습니다. 1년 중 가장 중요한 가게의 행사 날, 홀로 가게 운영을 맡게 된 앰버는 또 다시 폭발하게 되고 수도관이 터지며 그녀는 '웨이드 리플'을 만나게 됩니다.
그녀가 우연히 만난 웨이드는 물의 종족으로, 앰버의 가게에 대한 위법 사항을 확인하고는 자신이 공무원이라며 가게 운영이 중단될거라고 합니다. 이 말을 하면서도 웨이드는 미안하다며 분수 같은 눈물을 펑펑 흘리죠. 웨이드는 외모와 성격 모두 앰버와는 정 반대에 놓여있는 인물입니다. 그의 성장 환경 역시 매우 풍족했기에 부유한 환경 속에서 여유롭게 지내 왔습니다. 웨이드는 특별히 노력하지 않아도 상대의 마음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것에 능하고, 이를 통해 다른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융화되는 성격을 보여줍니다. 앰버는 이러한 웨이드를 바라보며,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모든 일에 부드럽게 대처하는 것이 마냥 신기하기만 합니다.
반대에 이끌리다
<반대가 끌리는 이유> 라는 제목의 노래를 알고 계시나요? 사람들은 나와 다른 특징을 가진 상대에 대한 호기심을 갖기 마련입니다. 앰버와 웨이드는 가정환경도 성격도 출신도 너무나 다릅니다. 앰버는 어려운 환경에서 태어나 장녀로서 가업을 물려 받아야만 하며, 불처럼 타오르는 성격을 갖고 있습니다. 반면 웨이드는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늘 여유가 있고 여린 감수성을 갖고 있으며 쉽게 화내거나 흥분하지 않죠. 두 사람은 물과 불, 동전의 양면 같은 존재이니 친구로서도, 이성으로서도 결코 이어질 수 없는 존재처럼 묘사됩니다.
3. 픽사의 로맨스는 이렇게
그러나, 결국 두 사람은 사랑에 빠지게 되고 용기를 내어 서로의 손을 잡게 됩니다. 불과 물이 만났을 때, 두 사람이 손을 잡았을 때 그들은 서로의 성질을 공유하고 온전한 평형을 이룹니다. 이들이 서로를 사랑하고 어울려 살아가는 데 있어 '다름'은 장애가 될 수 없었습니다. 이 영화에서 손을 잡는 장면은 흡사 월-E(2008, 픽사)에서 월-E와 이브가 서로의 손을 마주 잡을 때의 뭉클함을 떠올리게 했습니다. 누구에게나 사랑하는 사람의 손을 잡았던 첫 순간이 있을겁니다. 당신의 그 순간은 어땠나요?
사랑하는 이의 손을 잡는다는 것
4. 서로 다르지만, 우리는 어울려 살아간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과 다른 특징을 가진 존재를 미지의 대상으로 여기고 두려움을 느낍니다. 생존을 위한 경쟁으로 각인된 본능이기에 자연스러운 현상이죠. 그러나 두렵더라도 상대를 이해하려는 노력을 멈춰서는 안됩니다. 내가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는 누군가를 증오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앰버와 웨이드가 그랬듯이 불과 물처럼 다른 사람들도 균형을 이루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영화 <엘리멘탈>은 픽사가 근래에 개봉했던 작품들 중에서도 특히 칭찬할 부분이 많습니다. 계속 해서 타오르는 캐릭터를 애니메이션으로 구현한다는 것은 굉장한 도전이었을 것이고, 4원소의 특징들이 자연스럽게 화면에 구현되는 기술력에는 픽사의 여전한 장인정신이 담겨 있습니다.
끝으로, 디즈니의 실사 영화 <인어공주>가 왜 비판의 대상이 되는가에 대한 해답을 이 영화에서 찾으면 어떨까하는 생각도 듭니다. 서로의 다름을 존중하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주인공의 피부색을 바꿔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앰버는 불 같이 타오르고, 웨이드는 물 처럼 흐를 때가 가장 매력적이며 아름다운 법입니다. 인어공주는 인어공주의 모습일 때가 가장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것처럼 말이죠. 부디 앞으로의 디즈니가 앰버와 웨이드처럼, 대상을있는 모습 그대로 아끼고 사랑했으면 합니다.
영화 <엘리멘탈>은 픽사의 어떤 영화보다도 불처럼 뜨거웠고, 동시에 물처럼 부드러웠던 영화였습니다. 웨이드와 앰버가 서로의 손을 잡는 장면은 잊혀지지 않을 듯 합니다. 픽사의 차기작은 인사이드 아웃2(2024.6.14.)입니다. 개봉이 벌써 3달 앞으로 다가왔네요. 부디 인사이드아웃1으로 부푼 기대감을 한껏 충족시킬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