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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디너리 Mar 11. 2024

파묘(Exhuma, 2024) 리뷰

장르와 내러티브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으니, 영화를 감상하신 뒤에 글을 읽는 것을 추천합니다.


0. 장재현의 영화는

  2024년 2월에 개봉한 <파묘(Exhuma)>는 이제 한국의 오컬트 장인으로 불리기에 손색이 없는 장재현 감독의 신작입니다. 장재현의 첫 장편 데뷔작이었던 <검은 사제들(2015)>은 국내 상업 영화계에서 처음으로 오컬트 장르를 성공적으로 연출했다는 평가를 받았죠. 당시 이 영화의 주된 소재였던 가톨릭의 엑소시즘(구마의식)은 이미 할리우드에서 수 차례 활용된 적이 있었습니다. 2005년에 키아누 리브스가 주연을 맡았던 영화 <콘스탄틴>을 대표적인 예로 꼽을 수 있겠습니다. 이 영화에는 천사와 악마가 등장했었고, <검은 사제들>과 마찬가지로 엑소시즘(악마를 정화하고 물리치는 행위)이라는 소재를 흥미롭게 연출하여 많은 관객들의 호평을 받았습니다.


1. 오컬티즘, 신앙에 의지하는 현대인

  사람들이 '오컬트' 혹은 '오컬티즘'에 흥미를 갖게 된 것에는 이미 오랜 역사가 있습니다. 오컬티즘의 핵심은 '물질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지식을 탐구하는 행위에 있습니다. 과학적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현상이 나타났을 때, 사람들은 신앙에 의존하려는 경향을 보입니다. 갑작스러운 사고, 소중한 사람의 죽음, 예상치 못했던 자연재해, 뜻 밖에 찾아온 행운, 우연히 마주친 사랑까지. 삶의 거의 모든 사건들은 쉽게 이해할 수 없고 논리적으로 설명하기도 어렵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을 두려워하고, 인과관계를 알 수 없는 수 많은 현상들을 어떤 방식으로든 이해하려 애를 씁니다. 


  INTP(성격유형: 논리술사)인 필자는 눈에 보이는 것과 과학적으로 설명될 수 있는 것만을 주로 믿으려고 노력합니다. 현대인들은 '과학'이라는 강력한 도구를 통해 과거의 그 어떤 인류보다도 넓은 시야를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먼 과거에 살았던 누군가를 상상해봅니다. 그와 그의 가족은 갑작스럽게 죽을 병에 걸렸고 당시의 기술로는 그 원인을 짐작조차 할 수 없습니다. 결국 그의 마음이 기댈 수 있는 곳은 오직 실체가 없는 '신앙'이었을겁니다. 신앙에 의존하지 않고도 세상을 해석하고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서, 현대인들은 매우 특별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의문이 하나 생깁니다. 과학의 힘을 얻은 인류가 여전히 종교를 믿고 비과학적인 것에 몰입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 감소하기는 했으나 지금도 우리가 믿고 의지하는 민간신앙들은 차고 넘칩니다. 여전히 우리는 손 없는 날에 이사를 해야 하고, 개업을 하면 고사를 지내며, 사주풀이와 무당의 한 마디에 생의 중대한 선택을 맡기기도 합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2024년의 과학이 눈부시게 발전했다 한들, 여전히 나의 인생은 이해할 수 없고 납득되지 않는 것들로 가득합니다. 예상치 못한 삶의 위기를 마주할 때마다, 사람들은 신앙을 통해 의지할 곳을 찾으려 합니다. 저 역시 힘들 때는 기도를 하곤 합니다. 대체 누구에게 기도를 하는 것인지, 그 의미가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그것이 제 마음에 큰 위로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배우 김고은의 '신' 들린 연기

2. 파묘, 한국의 오컬트를 선보이다.

  서구의 신앙을 바탕으로 했던 이전 작품들과는 다르게, 이번 영화는 한국과 동양의 민간신앙을 기반으로 창작되었습니다. 예로부터 한반도에서는 죽은사람을 좋은 곳에 묻고(모시고), 그 후에도 제사의식을 통해 돌아가신 조상을 기리는 것을 집안의 중대사로 여겨왔습니다.우리는 조상의 묘 자리를 잘못 정하거나, 성묘와 제사 의식을 제대로 치르지 않으면 집안에 큰 화가 생길 수 있다고 믿어왔습니다. 김상덕(풍수사)의 말대로 풍수지리설은 한국에서 민간신앙을 넘어 하나의 종교로 자리 잡았다고 할 수 있을겁니다. 의뢰를 받은 무당 이화림(배우 김고은)은 LA의 박지용 일가에 생기는 화의 원인이 조상의 '묘'에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파묘(무덤을 파하여)와 이장(묘를 옮김)을 통해 집안의 화를 막는 것이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말하며 영화는 시작됩니다.


  풍수사 김상덕(배우 최민식)과 무당 화림(배우 김고은)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이야기들은 '풍수지리설'과 '무속신앙'의 정수를 제대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영화에서 특히 압권이었던 순간은 '파묘'와 '굿판'을 같은 시각, 같은 장소에서 함께 연출했던 장면이었습니다. 결국 오컬트에 그 누구보다 진심이었던 감독은 이번 작품을 통해 진정으로 '한국적인 오컬트 영화'를 완성시켰다는 평을 받기에 충분합니다. 배우 김고은은 직접 무당들을 찾아다니며 그들의 행동과 방식을 연구하였고 이를 매우 인상적인 연기로 승화시켰습니다. 최민식의 연기에 대해서는 굳이 자세한 설명이 필요치 않을 것 같습니다. 그는 이번 작품에 '숟가락만 얹었다'는 표현을 사용했으나, 의 무게와 존재감이번에도 놀랍습니다. 현재 <파묘>는 베를린에 이어서 홍콩 국제영화제에도 초청 받았습니다. 한국의 개성을 담은 이 영화가 전 세계 영화인들에게 널리 알려지고 있습니다.

파묘, 그리고 한반도와 독도

3. 장르와 소재? 중요한 것은 결국 이야기

  개봉 18일만에 800만 관객을 돌파한 <파묘>는 오컬트 장르의 상업성에 대한 편견을 완전히 무너뜨렸습니다. 한국에서 미스터리, 오컬트는 지금까지 '마이너' 취급을 받아왔습니다. 작품성과 개성을 인정받는 것은 가능할지언정, 오컬트의 틀에서 제작된 영화가 '천만 고지'를 돌파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죠. 저는 영화 <파묘>의 무엇이 특별하기에 이토록 단기간에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게 된 것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좋은 영화'에 대한 기준은 매우 다양합니다. 영화의 소재와 장르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 음악이나 촬영을 중심으로 작품을 감상하는 사람도 있죠. 그럼에도 좋은 영화를 이루는 수 많은 요소들 중 가장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것은 바로 '이야기(내러티브)' 일겁니다. 연출과 편집이 기가 막힌 작품이 있더라도, 흥미롭지 않은 이야기를 끝까지 감상하고 싶은 사람은 흔치 않을겁니다. 이미 여러 매체를 통해 알려져 있듯, 이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관객들에게 '항일'이라는 메시지를 던집니다. 단지 독립운동과 항일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는 것만으로 특별한 작품이 될 수는 없겠죠. <파묘> 의 내러티브, 즉 하고 싶은 이야기를 전달하는 방식은 꽤나 특별합니다.


  이 영화에 대한 사전 지식이 없는 한, 대부분의 관객들은 <파묘>에 담긴 감독의 의도와 메시지를 뒤늦게 알아차릴 수 밖에 없습니다. 영화의 첫 장면에서부터 화림은 자신이 일본인이 아닌 한국인임을 강조하지만, 처음부터 관객들이 이 장면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기는 어렵습니다. 또한 감독은 인물에게 독립운동가의 이름을 부여하면서도 그들의 성(姓)은 의도적으로 공개하지 않습니다. 아마 봉길을 처음부터 '윤봉길'이라고 소개했다면 이 영화의 내러티브는 그다지 특별하지 않았을겁니다. 의뢰인 박지용 일가는 '태어날 때부터 부자인 사람'으로 소개되지만 그가 친일파의 후손이라는 것은 이야기의 중반부를 넘어서야 드러납니다.


  이렇듯 이 영화는 '진짜 하고 싶은 이야기'를 중반부까지 숨기다가 그 이후에 드러내고 있습니다. 특히 일본의 오니(도깨비) 귀신이 등장하면서부터 영화의 분위기는 크게 달라지는데, 이러한 전환은 다소 부자연스럽게까지 느껴집니다. 장재현 감독은 이를 통해 관객들을 강하게 환기시킴과 동시에 항일에 대한 이야기를 제대로 시작하고 싶었을겁니다. 영혼과 귀신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던 영화에 갑자기 거대한 육신과 끔찍한 얼굴을 갖고 있는 도깨비(혹은 정령)가 등장하고, 관객은 대체 이게 어떤 영문인지 궁금해하게 되는 것이죠.

'윤봉길'

4. 정의구현과 대리만족

  박지용의 일가와 같은 친일파 후손의 번성 그리고 음양사를 국책에 활용했던 일본의 한반도 침략 등 이 영화에 등장한 소재들은 모두 실제 역사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특히, 해결되지 못한 '친일청산'의 문제는 범의 허리에 박혀 있었던 칼침(도깨비)처럼 여전히 이 나라를 좀먹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땅에서는 정의가 구현되지 못했기에, 영화 <파묘>는 관객들에게 일종의 대리만족을 제공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부자였던' 친일파의 후손들은 대부분 극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합니다. 또한 '나라를 팔아먹었던' 박지용의 조부는 일본의 음양사에게 이용당해 사후 1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고통에 몸부림칩니다. 결국 그의 유해가 비가 오는 날에 관 째로 화장되어, 죽어서도 좋은 곳에 가지 못할거라는 이야기는 분명 '사이다'처럼 느껴지는 부분이 있습니다.


  풍수사 김상덕은 아끼는 딸이 먼 유럽의 백인과 결혼하는 것을 다소 못마땅해합니다. 손주가 태어나면 머리는 노랗고 헤드라이트는 파란색일까봐 걱정하죠. 그럼에도 김상덕은 '독일에서 태어난' 사위와 가족의 연을 맺게 되었고 그렇게 이 영화는 마무리 됩니다. 독일과 일본 모두 전범국가로서 전쟁 범죄에 대한 책임을 갖고 있으나, 지금껏 그들이 취하는 태도는 서로 극명하게 달랐습니다. 일본이 독일이 그랬던 것처럼 전범행위에 대해 진심어린 사과를 전하고 책임을 다하려는 노력을 보였다면 어땠을까요? 그랬다면 이 땅에 박혔던 쇠말뚝에 대한 쓰라림이 조금은 나아졌을겁니다. 김상덕의 말처럼, 우리는 죽고 한반도에는 또 다른 후손들이 태어나 같은 땅을 밟으며 살아가겠죠. 그들이 살아갈 미래를 위해서라도, 우리는 한반도에 박혀 있는 '친일'이라는 저주를 씻어내기 위해 노력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이야기를 마치며, 김상덕(독립운동가 정치인), 이화림(조선의용대 부대장), 고영근(대한제국의 군인), 윤봉길(독립운동가)이라는 이름을 앞으로 잊지 않겠다는 다짐을 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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