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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디너리 Mar 17. 2024

단 하나의 로맨스, 뼈에 새기는 인연

이터널 선샤인(2005) 리뷰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으니, 영화를 감상하신 뒤에 글을 읽는 것을 추천합니다.


0. 삶과 로맨스

  저의 지나간 20대를 회상해봅니다. 시간이 지나면 일상의 기억은 점차 흐릿해지며 대개는 잊혀집니다. 그럼에도 뜨겁게 추억할 수 있는 장면이 있다면, 그것은 필시 당신의 '로맨스'가 아닐까 합니다. 우리는 '외로움'이라는 숙명을 떠안은 채 평생을 살아갑니다. 그렇기에 누군가를 만나 사랑에 빠지고 일상을 함께하는 것은 항상 특별한 일입니다.


  사람들은 반복되며 단조로운 일상을 살아갑니다. 그렇기에 로맨스는 더욱 강력한 힘을 발휘합니다. 누군가에게 특별할 것 없는 장소와 경험이, 연인에게는 평생 동안 잊지 못할 추억으로 비춰질 수 있습니다. 로맨스는 경험과 시간에 의미를 부여하며 인생을 아름답게 수 놓는 힘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소중한 시간을 함께 한 그, 혹은 그녀에 대한 기억이 모두 사라진다면 우리는 어떻게 될까요? 그럼에도 당신은 아무렇지 않게 살아갈 수 있을까요? 영화 <이터널 선샤인, 2005>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1. '사랑'의 기억을 지워내다.
사랑의 기억을 지우다.


   평소처럼 출근 중이었던 조엘은 '그 답지 않게' 매우 충동적으로 몬탁행 열차를 타게 됩니다. 그곳에서 우연히 마주친 '클레멘타인'이라는 여성은 그와 꽤나 다른 성격의 소유자입니다. 그녀는 조엘에게 적극적으로 말을 걸고 호감을 표현하며 솔직한 자신의 감정을 전합니다. 두 사람은 함께 클렘(클레멘타인)의 집에 가게 되고 , 그녀는 조엘에게 말합니다. '넌 나와 결혼하게 될거야.' '꽁꽁 언 찰스 강에 함께 가자.' 조엘은 파란색 머리(블루 루인)를 클렘과 강에 다녀오게 되고 둘은 연애의 설렘에 흠뻑 빠져듭니다. 그러다 영화의 장면이 갑자기 전환되더니, 펑펑 울고 있는 조엘을의 모습이 비추어집니다. 이제 관객들은 진실을 마주합니다.


  과거 조엘은 '라쿠나 주식회사'에 자신의 기억을 지워달라는 의뢰를 했습니다. 클렘과 마지막으로 크게 다투었던 날, 조엘은 그녀를 찾아가 화해를 하려 했습니다. 그런데 클렘은 자신을 생전 처음 보는 사람 취급합니다. 게다가 아무렇지 않게 다른 남자를 만나며 애정행각을 벌입니다.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그는, 결국 친구로부터 진실을 듣게 됩니다. 클렘이 라쿠나 주식회사를 통해서 조엘에 대한 기억을 완전히 지웠다는겁니다. 이곳을 찾아간 조엘은 비슷한 의뢰를 하고 있는 사람들을 목격합니다. 그 역시 복수심과 충동으로 인해 자신도 같은 의뢰를 합니다. '그녀에 대한 기억을 모두 지워주세요.'


2. 추억을 거슬러 올라가며
조엘과 클레멘타인의 그 시절

  영화의 장면들은 대부분 시간의 역순으로 전개됩니다. 따라서 서사를 깊이 파악하려면 클렘의 감정이 어떤지를 살피며 감상하는 편이 좋습니다. 클렘의 머리 색은 당시 조엘과의 관계에 대한 그녀의 감정을 상징합니다. 그녀의 붉은 색(레드 매너스) 머리카락은 조엘과의 애정이 가장 두터웠던 시기를 담고 있죠. 오렌지 색(에이전트 오렌지) 머리카락은 권태 맞이했던 시기를 의미하며, 푸른 색(블루 루인) 머리카락은 조엘과의 이별 이후에 등장합니다. 초록 색(그린 레볼루션) 머리를 하고 있던 시기의 그녀는 혼자였습니다.


▶ 하워드 박사의 설명대로 클렘에 대한 기억은 최근의 것부터 삭제되기 시작합니다. 마지막으로 다투었던 날, 그녀의 머리카락은 오렌지 색으로 물들어 있었습니다. 조엘은 술을 마시고 새벽 늦게 들어온 클렘에게 화를 냅니다. 그러다 끝내 해서는 안될 말을 내뱉고 맙니다. "넌 누군가와 자고 왔을거라고 확신해." "넌 잠자리로 다른 사람들의 호감을 사잖아." 잠깐의 정적이 지나고, 내 뱉은 비수의 말은 주워담을 수 없습니다. 집을 뛰쳐나가는 클렘을 쫓아가며 조엘은 말합니다. "널 기억에서 지워서 행복해."


▶ 다투었던 그 날의 낮에 둘은 함께 벼룩 시장을 걷고 있었습니다. 클렘은 그에게 이야기했습니다. "너와 아이를 갖고 싶어." 조엘은 클렘이 아이를 키울 수 있는 준비가 안됐다며 거절합니다. 크게 싸운 뒤에 클렘은 술을 마시러 나가려고 합니다. 이 때 조엘은 진지한 대화를 시도했어야 합니다. 그러나 유치한 장난으로 응수하며 집을 나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그저 바라보기만 합니다.


3. 간직할래요. 제발 이 순간만은.

▶ 기억이 하나씩 삭제되어 가면서, 조엘은 클렘과 함께했던 시간들이 너무나 소중했음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서로에게 상처를 주었던 순간들을 생생히 떠올리며 진심으로 후회합니다. '그 때 조금만 더 상냥했더라면, 그건 내 진심이 아니었는데.' 그는 클렘의 어린 시절 못 생긴 외모에 대해 함께 나누었던 이야기를 떠올립니다. 그 때 그는 그녀에게 수 없이 반복해서 이야기 했습니다. '너는 너무 아름다워.' 그리고 그는 간절하게 외칩니다. "제발 이 순간만은 잊지 않게 해주세요."


▶ 조엘은 클렘의 손을 붙잡고 정신 없이 도망칩니다. 그러나 결국 둘은 서로를 처음 만났던 몬탁의 해변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 날도 클렘은 조엘에게 먼저 다가가 호감을 표현했었습니다. 그러나 조엘에게는 연인이 있었고, 그는 클렘을 그곳에 홀로 내버려둔 채 도망쳤었죠. 이번에도 도망을 치려는 조엘에게, 기억 속 클렘은 말합니다. "이번에는 이곳에 남는게 어때?" "작별 인사라도 해야지." "우리 몬탁에서 다시 만나자." 그렇게 두 사람이 사랑했던 기억은 모두 사라지게 됩니다.


4.  It's Okay.
It's Okay.. It's Okay.

  이야기의 끝에 이르러, 라쿠나에 근무했던 여직원은 그들의 과거와 진실을 직접 알려주게 됩니다. 그녀 역시 하워드 박사와의 불륜 관계 때문에 자신의 기억을 지웠습니다. 허나 기억을 지운 이후에도 계속 박사를 사랑했고 그에 대한 끌림을 멈출 수 없었습니다. 조엘과 클렘은 기억을 지우기 전에, 녹음을 통해 몇 가지 말들을 남겨두었습니다. 녹음 테이프에는 서로에 대한 비난과 증오의 말들이 가득합니다. '교양이 부족해.' '어휘력이 나빠' '겉으로만 화려해보여' '잠자리에 의욕이 없어' '잠자리를 통해 호감을 사'  


  조엘은 클렘에게, 녹음된 말들이 결코 자신의 진심이 아니라고 외칩니다. 그럼에도 테이프 속 그의 음성은 실언을 되풀이합니다. 조엘은 끝내 자신의 집을 떠나는 클렘의 뒷모습을 바라봅니다그러나 이번 만큼은 그녀를 쫓아간 뒤에, 힘을 주어 말합니다.


 "당신에게 마음에 안 드는 구석을 하나도 찾을 수가 없어요." 

"곧 보이고 거슬리게 될거고 답답할거에요." 

"그래도 괜찮아요. (It's Okay.)"


5. 뼈에 새겨지는 인연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무런 의미 없는 인간 관계는 없다는 뜻입니다. 나아가 누군가를 사랑하며 맺는 인연을 생각해봅니다. 사랑의 인연과 기억들은 뼈에 새긴 듯 평생 지울 수 없는 흔적으로 남습니다. 그 때 그 사람과 함께 한 시간은, 세상 어딘가에 영원토록 기록됩니다. 그렇게 그 때의 로맨스는 곧 과거의 나, 지금의 나를 정의합니다.


  이야기의 엔딩 이후 조엘과 클렘이 다시 연인이 되었을지, 아니면 이별을 했을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대로 서로의 관계가 끝났음을 인정하고 각자의 길을 걷는 선택이 자연스러웠을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둘은 평생 몬탁의 해변과 얼어붙은 찰스 강을 추억하며 살아갈겁니다. 권태와 이별의 순간이 당신의 로맨스를 끝내 슬프게 마무리 지었더라도, 그 때의 소중한 기억들은 계속 빛이 나야만 합니다. 이 영화의 제목처럼.

 'Eternal Sunshine of the Spotless Mind' : 티 없는 마음에 영원히 햇빛을 비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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