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아침.
어제는 하루 종일 흐리고 간간이 비가 내리더니 오늘 아침까지도 흐리다. 차분한 공기가 좋다. 아침 일찍 서둘러 씻고 화장을 했다.
오늘은 친한 동생 주리가 인사동에서 그림 전시회를 하는 날이다. 수요일 부터 시작했으니 벌써 4일째다.
그제 화분을 미리 보냈고, 일주일 동안 여는 전시회 중 오늘은 주리가 하루 종일 상주하는 날이라 오늘 만나기로 했다.
비가 올 듯 무거운 회색 공기에 우산을 두고 온 것을 후회했다. 그러나 버스가 저 멀리서 보인다. 다시 집으로 가기에는 시간이 부족했다.
버스에 올라 자리를 잡고 앉았다.
오랜만에 주리를 만난다는 생각에 시간이 더디 갔다. 전철역에서 내려 바쁜걸음으로 경인미술관으로 갔더니 주리가 두 손을 잡으며 반갑게 맞아주었다.
오래된 기와집과 고풍스러운 마당의 장독대, 정자, 그리고 나무들이 정겹다. 그 사이 제 5전시관에서 주리의 그림이 전시 중이다.
우리 둘은 보기만 해도 좋았다. 함께 손을 잡으며 웃었다. 한껏 올라간 톤으로 언니~ 하며 불러주는 주리가 친 동생같다.
어젯밤 우리 만남을 헤아려 보았다. 올해로 37년 째다. 주리가 스물 한 살에 난 스물 다섯살 이었다. 그 땐 아기 같았는데 어느덧 우리는 사위와 며느리가 될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렇게 긴 시간을 친 동기간 처럼 지낸다는 것이 쉽지 않지만 우리는 오랜 시간 잘 지내왔다. 둥굴레차를 마시며 서로의 안부를 묻고 그림을 봤다. 다른 세 명의 작가들 그림도 매우 좋았다. 타고난 재주가 있지 않고서는 그릴 수 없는 것처럼 나는 엄두도 못 내는 작품들이다.
그곳의 다른 작가들이 우리 둘의 사진을 찍어줬다. 주리는 언제나 웃어주는 기분 좋은 동생이다.
주리의 그림은 민화다. 궁중 민화. 지체 높은 부인들의 방을 장식할 만한 화려한 꽃들이 주로 그려지지만, 주리는 연화도를 즐겨 그린다.
난 주리의 연화도가 좋다. 분명 연꽃만 그렸는데 시원한 바람이 분다. 그리고 정적이 그려졌다. 한 송이 연꽃과 푸른 연잎들이 나른하게 만든다.
방명록에 '바람의 정원에 잠시 머물다 갑니다. 그리고 날짜와 이름을 적었다.
그렇다. 주리의 그림은 연화도라 이름 붙였지만 난 바람을 보곤 했다. 그래서 주리에게 바람을 그리는 작가라고 말을 해 주곤 했다.
주리는 그 말을 좋아했다. 그림의 이름을 지을 때 챗지피티에 물었더니 바람에 스미는 연화라고 이름을 추천해 주었다고 하며 웃는다.
언니 말대로 AI도 바람을 이야기하네! 하며 웃는다.
그림도 그리지 못하면서 보는 눈은 있어서 몇 마디 감상평을 펼치는 나를 보며 주리는 집중해 듣는다. 솔직한 감사 평을 늘어놓을 때면 진심으로 기뻐하는 주리가 어여쁘다.
그림을 잘 그리지 못한다고 해서 감상이 없는 건 아니지 않는가? 나는
"좀 더 시간을 내서 많이 그렸으면 좋겠다."
"더 자주 전시회를 열었으면 좋겠다."
"요즘엔 별로 발전이 없다."
"초심을 잃은 것 같다." 등등
하지만 이번 전시회 그림은 확실히 예전보다 좋았다. 늘 힘없이 나른한 연화도가 이번 그림엔 힘이 들어가 있었다. 강한 바람에도 꺾이지 않는 부드러움이 보였다.
아부를 조금 섞어서 진심으로 훌륭하다고 칭찬했다. 언니 덕분에 붓을 놓지 않았다며 고맙다고 한다.
약 2년에 한 번 정도 전시회를 여는데 그림을 그리고 자기 작품을 다른 이들에게 보여주는 주리가 존경스럽고 부러웠다. 시간을 쪼개가며 그림을 그리는 동생이 자랑스럽다.
날씨가 화창해 졌다. 미술관 안에 있는 찻집부터 북적이더니 한 무리의 외국 관광객들도 들어와 가이드의 설명을 듣는다. 우리가 있는 전시장도 제법 많은 사람들이 찾았다.
나는 다른 전시관들도 모두 둘러봤다. 동아리 수준의 전시회도 있지만 한 곳은 전문 작가인듯 그림이 매우 감동적이었다. 요즘엔 우리 민화를 그리는 작가들이 많은 것 같다. 다섯개의 전시관 중 두곳이 민화다. 소재가 다르기에 느낌도 매우 달랐다.
난 감기 몸살로 아픈 후라 몹시 피곤했다. 세 시가 넘어가고 네 시를 달려가고 있었다. 이제 가 봐야겠다고 말하고 일어나려고 하니 "저녁 6시에 끝나니 함께 가자"고 한다. "아이고…. 난 집이 멀어서 이제 가 봐야 한다"라고 말하고 작별 인사를 했다. 나온 뒤 인사동 길을 홀로 걸으며 간간이 전시관을 들러 감상했다.
모두 자신의 시간을 아름답게 꼼꼼히 채워가는데 나만 구멍이 숭숭 뚫린 볼품없는 삶을 사는 것 같았다.
오랜만에 신은 구두가 발등을 벌겋게 만들었다. 아픔이 살살 몰려오자 드디어 뭔가 해야 한다는 목표가 생겼다. 양말을 사서 신어야 했다. 전철을 타러 지하상가를 지나는데 귀여운 양말이 눈에 띄었다.
이천 원을 주고 양말을 사서 플랫폼 의자에 앉아 양말을 신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심심한 일상이 피곤함이 몰려오면서 살아있음을 느끼게 해 줬다. 얼마 만에 느껴보는 피곤함인지…. 반가웠다.
전철을 탔다.
서울역에서 공항철도로 갈아타고 자리에 앉자 조금 지나니 눈이 감긴다. 비몽사몽 눈을 감았다 떴다 하며 졸았다. 갑자기 전화가 걸려 왔다. 딸이다.
어? 그런데 다음 정거장이 내가 내려야 하는 운서역이다. 하마터면 공항까지 갈 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