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갓집-1(외갓집 가는 길)

by 길은연

어린 시절 외가댁에 가던 소중한 추억을 담다.

도시에서 태어나고 학교를 다녔어도 어릴 때부터 외갓집에서 지낸 시간이 많다 보니 농촌 추억이 많다. 늘 엄마나 이모 삼촌이 데리고 다니다가 3학년 때 처음으로 혼자서 갔다. 내려야 하는 정류장 이름을 잊어버리지 않게 외우고 또 외웠다. 광석리. 광석리...

버스를 갈아타는 일을 무사히 해냈다. 그런데 가는 길에 가지고 있는 돈을 몽땅 누군가가 가져가 버려서 버스비를 못 냈다. 손수건에 지폐를 돌돌 말아 잘 쌌는데 어째 그 돈만 사라지고 만 것이다. 중간에 내려야 하는데도 차비를 못 냈으니 당황한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자는 척하며 종점까지 갔다. 겨우 생각해 낸 방법이 자는 척하는 것이었다. 사람들이 모두 내리고 나 혼자 남았다. 안내양 언니가 곁에 와서 자는 척하는 나에게 "꼬마야 내려야 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수없이 내가 혼자 외가댁에 가는데 돈을 잃어버려 차비를 낼 수 없다고 이실직고했더니 이렇게 어린데 너 혼자 가느냐며 괜찮다고 했다. 그러고는 종점에서 출발하는 버스 기사님께 사정을 말하고는 내려야 하는 곳을 말해주었다. 어찌어찌 외갓집을 무사히 갔지만 어른들의 걱정을 들었다. 하지만 그 후로는 혼자서도 다닐 수 있었다.


다음 해 국민학교 4학년 때다. 여름방학이 되었고 여느 때처럼 옷과 방학 숙제 책을 싸고 외갓집으로 갔다. 물론 혼자서 갔다. 외갓집은 버스를 두 번 갈아타고 마을 어귀에서 한참을 걸어가야 했다. 버스가 다니기는 했지만 자주 다니지 않았고 또 언제 오는지 알 수 없었기에 한여름 오후 서너시의 뙤약볕을 받으며 걸어가야 했다. 얼굴로 쏟아지는 햇살에 뺨은 벌겋게 달아올랐고 땀이 송골송골 맺힌다. 가는 길은 멀고 더웠지만 지루하지 않았다.

수로 옆 길가에 코스모스가 꽃을 피울 준비를 하고 있었다. 끝없이 늘어서서 자라는 하늘하늘거리는 코스모스 대를 손으로 쓰윽 만지며 지나간다. 여린 잎들이 손끝을 미끄러지며 스쳐 지나간다. 풀냄새가 손바닥에 담긴다. 가끔 꽃망울이 달려있으면 무슨 색인지 자세히 들여다본다. 분홍색 작은 꽃잎이 서로를 꼭 껴안고 봉우리 안에 있는 걸 보면서 빨리 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방학이면 짠하고 나타나는 잠자리들이 여기저기 날아다니며 시골길을 함께 간다. 손에 닿을 듯 말 듯만큼의 거리를 두고 날아다닌다. 누런 먼지가 풀풀 나는 돌길 오른쪽엔 너른 논이 펼쳐져 있다. 한참을 가다 보면 미루나무가 하늘을 뚫을 기세로 일정한 간격을 맞춰 서 있다. 그러면 '미루나무 꼭대기에 조각구름이 걸려있네.'하며 노래도 부른다. 미루나무는 정말 키가 컸다. 푸르게 자란 벼들이 가득 차 있는 논도 보고 코스모스도 보고 나무도 보고 발밑에 잘디잔 돌도 툭툭 차며 느릿느릿 걸었다. 어른과 함께 걸었다면 빨리빨리 걸으라고 화를 냈을 것이다. 아마도 30분 거리를 한 시간 반도 더 걸었던 것 같다. 하지만 이렇게 볼 거리가 많은데 어떻게 지나칠 수 있느냐 말이다. 학교가 끝나고 집에 들러 가방을 싸고 바로 나섰으나 버스를 갈아타며 한참을 걷다 보면 뜨거운 햇빛도 조금씩 기운을 잃어가는 시간이 된다. 마을 어귀에 가까워지면 논을 둘러보던 안면이 있는 아저씨께서 아는 체를 해 주신다. 그러면 나는 수줍게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를 드렸다. 네시가 넘어 다섯시가 다 되어 갈 즈음 갈림길에서 고민을 한다. 얕은 언덕을 넘으면 지름길이라서 빨리 갈 수 있지만 가는 길에는 무덤도 보이는 터라 무서웠다. 다른 길은 잘 닦인 도로 이기는 한데 멀리 돌아가야 한다. 어디로 갈까 하는 고민은 잠시뿐이다. 이모와 삼촌들과 넘던 익숙한 언덕을 넘어가기로 했다. 밤 나무가 많아 발밑에는 밤 가시가 남은 껍질들이 여기저기 널려있었다. 그 속에 있던 밤들은 산에 사는 다람쥐들이 가져갔나 보다 상상하며 잠시 몸을 숙여 들여다본다. 혹시라도 남은 밤 알이 남았을까 싶어서다. 도시에서는 밤송이를 보기 힘들기 때문에 나에게는 신기한 사물이다. 그러나 시골 언덕은 당연히 무덤이 한두 개 정도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온갖 무서운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운다. 뭔가 서늘한 기운이 엄습해 와서 가슴이 쿵쾅거리게 만들었는데 그 무서움이 너무나 컸다. 나무가 많아 그늘이 져서 약간 어둑한 언덕을 혼자서 괜찮아 괜찮아를 반복하며 두근거리는 가슴을 다독이며 고개를 넘었다. 작은 소리로 노래도 불렀다. 숨을 헐떡이며 빠른 걸음으로 언덕을 넘는다. 옛날이야기에 나오는 여우가 나올 것 같았다. 아니 귀신이 쫓아올 것 같았다. 그 커다란 두려움이 들고 있는 가방을 꽉 잡고 빠른 걸음으로 종종거리며 달려가게 만들었다. '다음에는 멀리 돌아서 갈 테다' 하고 생각은 하지만 번번이 이 언덕을 넘었다.


이렇게 혼자서 이곳저곳 참견을 하고 걸었으니 보지 않아도 시간은 두 세배나 더 걸렸다. 드디어 외갓집에 거의 다 와간다. 늘 그렇지만 그 언덕을 넘는 시간엔 저녁을 짓는 시간이 된다. 시골 마을은 이른 저녁을 먹기 때문이다. 마을이 보이기 시작하면 집집마다 굴뚝에서는 하얀 연기가 올라오고 시골 동네에서만 맡을 수 있는 짚과 나무를 태우는 구수하고 익숙한 냄새가 나기 시작한다. 언덕을 넘는 동안 해는 뉘엿뉘엿 기울기 시작했고 나는 할머니 댁으로 달려갔다. 뒤에서 귀신이 쫓아오는 것처럼 무섭기도 하고 할머니 댁이 반갑기도 했다. 모두들 집으로 들어갔는지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할머니네 동네 사람들은 거의 다 아는데 저녁 짓는 시간이 되면 개미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동네 사람들을 만나면 "오. 그래 방학했구나." 하며 반가워해주시는데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할머니 댁은 동네에서도 제법 큰 집에 속했다. 농사도 많이 지으셨다. 대문 앞에는 소가 끄는 수레가 한쪽에 자리 잡고 있다. 탈곡기도 대문 옆에 바짝 놓여있다.

할머니 댁 대문을 밀고 들어서니 할머니랑 할아버지 이모 삼촌이 반갑게 맞아주셨다. 얼굴과 눈이 동글동글하신 할아버지는 혼자 온 손녀딸이 대견해서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다. 이제 다 컸다고, 혼자서도 잘 왔다고... 어릴 때부터 늘 외갓집에서도 지냈고 방학이면 늘 상 함께 지내는 터라 너무나 편안하게 내 집처럼 집안 구석구석 휘젓고 다녔다.

외양간의 소하고도 인사를 하고 마당에 돌아다니는 닭들에게도 인사하고 부엌으로 사랑방으로 뒤란으로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커다란 가마솥에는 뜸을 들이는 밥 냄새가 구수하다. 뒷마당 우물에는 수박을 시원하게 하기 위해 담가 놓았고 장독대에서 금방 퍼 온 된장을 들고 할머니는 찌개를 끓이신다. 담장 울타리에는 나리꽃도 피어있고 봉숭아꽃도 피어있고 그리고 노란 국화꽃 비슷한 게 피어있다. 봉숭아꽃은 머지않아 이모들과 나의 손톱을 물들일 것이다. 이모들은 나하고 나이 차이가 그리 많지 않아 언니 같았다.


외갓집은 먹을 것 천지 꽃 천지다.

며칠 지나면 할아버지 생신이시다. 곧 일가친척들과 사촌들이 모두 모일 것이다. 그때는 내가 손님을 맞이하는 주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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