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사춘기 시절엔 연예인을 좋아했다. 요즘처럼 덕질까지는 몰라도 열심히 사진을 모으고 잡지를 사고 카세트테이프나 LP를 구입하고 연습장에 영어 가사를 열심히 적고 TV에 나오면 큰 소리로 따라 부르기도 했다. 음악 순위 프로그램은 빼놓지 않고 보고 스포츠 스타부터 가수 배우 해외 연예인 국내 연예인 할 것 없이 모두 사랑했다. 연습장 표지는 좋아하는 연예인 사진이 장식했고 밤 10시만 되면 밤을 잊은 그대에게나 별이 빛나는 밤에 같은 방송을 들으며 잠이 들었다. 그땐 그렇게 사랑이 많았다. 피곤한 줄 모르고 즐겁기만 했다. 공부하느라 힘들었을 텐데 그 고통은 아예 생각도 나지 않는다. 사람이 살아갈 수 있는 것은 기억의 편집기술 때문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분명히 그때도 고통이라는 게 있었을 텐데 아무리 뒤져봐도 보이지 않는다. 돌아보면 아득히 먼 시간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때를 떠올리니 학창 시절이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지금도 그때 산 레코드판들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 빛바랜 표지가 나보다 더 늙었지만 소리는 여전하다.
그리고 30년이 훌쩍 지나 내 나이 50이 들어서서 아이돌 덕질을 해야 만 하는 시간이 올 줄 누가 알았겠나? 중학생이던 막내딸이 사춘기가 되더니 아이돌 덕질을 시작했다. 원 디렉션을 좋아하기 시작하자 갑자기 나를 TV 앞에 앉혀놓고 다섯 명의 멤버 이름을 가르쳐 주며 외우란다.
"아니. 너만 좋으면 되지 나까지 좋아해야 하니?"
당연히 엄마도 좋아해야 한다며 끝까지 우겼다. 나는 하는 수없이 그들의 뮤직비디오를 매일 봐야 했다. 그러다가 리암을 응원하기 시작했다. 잠들었던 말랑말랑한 설렘이 깨워졌다. 딸은 만족해하며 맘 놓고 앨범을 사달라고 조르기 시작했다.
'아. 그래 이러려고 그랬구나... '
그러더니 자신은 원 디렉션을 만나러 영국으로 유학을 가야 한다며 중학생 주제에 대학생들이 하는 토플을 공부하겠다며 책상 앞에서 열심히 영어 공부를 했다. 나는 속으로 웃었다. 그렇게 간절하게 영어 공부를 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 '음. 괜찮은데? 스스로 공부도 하고 말이야...'
그 후 엑소를 지나 방탄소년단까지 함께 덕질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방탄소년단은 데뷔 초부터 덕질을 했다. 원 디렉션을 지나 엑소를 통과하고 방탄소년단으로 오니 점점 멤버 수가 늘어났고 일곱 명의 이름을 다 외우라는 명이 떨어졌다.
"참나 원 ... 아니 저 아이들의 이름을 내가 다 알아야 하니? " 하고 물으니 당연하단다. 그리고 뮤직비디오를 숙제처럼 매일 보기 시작했다. 딸은 진이 잘생겨서 좋다며 화면에 나오는 진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좀 봐봐요. 정말 잘생겼죠?" 하는 게 아닌가.
"아니 네 눈에나 잘 생겼지 나는 잘 모르겠어. 아이돌은 다 잘 생겼지 뭐..."
그러면서도 반강제로 뮤직비디오를 봐야 했다. 관심을 갖고 보기 시작하니 진이 잘생기기는 했는데 춤은 그다지 잘 추는 거 같지는 않았다. 워낙에 춤을 잘 추는 아이들이 앞에서 있으니 뒤쪽의 진이 눈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그런데 내 눈에는 진 옆에 한 사람이 눈에 띄었다. 그건 바로 랩몬이었다. 거의 로봇처럼 추는 춤이 어색해서 웃음이 나왔다. 재는 관절이 굳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재는 누구니? " 했더니 랩몬이라고 했다.
"그런데 재는 왜 춤을 저렇게 추냐?"
했더니 깔깔대며 웃으면서 랩몬은 춤은 잘 추지 못하지만 랩을 잘한다고 말했다. 나는 '음 그래? 저렇게 춤을 춰도 아이돌을 하네?' 하고 속으로 말했다. 소리 내어 말하면 혼날 것 같았다. 너무나 푹 빠져 있는 딸아이의 심기를 건드리기 싫기 때문이기도 했다. 일곱 명의 이름을 다 외우라는 숙제는 내게 버거웠다. 관심이 있어야 쉽게 외워지지 이렇게 막무가내로 외우라면 어떡하라고... 그래서 딸에게 내가 좋아할 때까지 기다려 달라고 말했다. 그렇게 매일 반강제로 뮤직비디오를 보다 보니 처음으로 눈에 들어오는 사람이 하나 있었다. 정국이였다. 가장 잘 생겼다고 생각했다. 아니 예쁘다고 말해야 할까?
"재는 누구니? 나 재부 터 알아 갈 거야... 딸은 웃으며
"거 봐요 어머니도 좋아할 줄 알았어요." 하더니 정국이라고 가르쳐 줬다. 그 후부터는 정말 팬이 됐는지 순식간에 이름을 알아갔다. 노래도 모두 꿰차게 되었고 아이들 성격도 알아가면서 진심 덕질이라는 것을 하게 됐다... 그 후부터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멤버는 지민이었다. 지민이의 착한 심성이 마음에 들었다. 지민이만 보면 미소를 보내는 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딸은 진에서 슈가로 바뀌었다.
처음으로 고척 스카이 돔에서 공연을 하던 감격을 시작으로 새로운 영상이 올라오면 바로바로 보기 시작했고 연말 인기상을 받게 하겠다고 딸과 둘이 앉아서 투표를 했고 더 많은 표를 주기 위해 밤새워 가위바위보를 해야 했으며 핸드폰과 탭을 동원해서 조회수를 올려주는 덕질을 요란하게도 했다. 지금은 너무나 유명해져 세계적으로 알려졌지만 그때는 자신들을 알리기 위해 동영상을 정말 많이 찍어 올렸었다. 자신들이 살고 있는 작은 아파트에서 고생하던 시절부터 좀 더 큰 집으로 이사 간다고 찍었던 영상을 보며 잘 됐다고 박수도 쳐주었다. 당연히 새 앨범이 나올 때마다 거금을 들여 구입했고 브로마이드를 얻기 위해 치킨을 시켜 먹었으며 화장품을 샀다. 이제 그들은 아마추어 같은 모습은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점점 세련되어졌고 세계적으로 유명해지면서 우리는 이제 우리가 덕질하지 않아도 되겠다며 서서히 관심이 줄었다. 지금은 군대도 다녀오고 제법 선배 미가 나는 여유로운 모습이 보기 좋다.
드디어 딸이 성인이 되고 남자친구가 생기면서 아이돌 덕질에서 해방되었다. 아직도 새로운 팀이 나오면 열심히 보는 것 같지만 더 이상 엄마에게 함께 덕질하자고 요구하지 않아서 좋다. 더 이상 앨범 사는데 돈을 쓰지 않아도 되고 반강제로 앉아서 함께 뮤직비디오를 보지 않아도 되었다.
방탄소년단의 새로운 앨범이 나올 때마다 사달라고 조르던 그 귀한 앨범을 당근에 팔까요? 하고 물어보기도 한다. 그 앨범을 받을 때 손도 대지 못하게 하더니 지금은 내가 보관하고 있다. 사람 마음이 다 그런 거지 뭐 하면서도 다 내 돈으로 산 건데... 하며 웃음이 나온다. 음악은 핸드폰으로 들으니 CD는 그냥 장식용이 되어버렸다. 방탄 소년단의 음악보다 발라드를 더 많이 듣는다. 그렇지 그럴 때지...그게 정상이지...
세월이 지나고 세대가 지나도 사람의 감정 변화는 똑같다.
아름다운 사춘기, 사랑이 시작되는 시기 누구라도 사랑하고픈 마음을 연예인을 향해 열심히 내 뿜는 시기. 그 시간이 지나면 내 옆에 있는 사람에게 사랑이 옮겨가는 게 당연하지만 그 즐겁고 아름다운 시절을 기억할 것이다. 나는 막내딸 덕분에 사춘기를 두 번 경험했다. 방탄소년단 이후로는 아는 가수가 별로 없다. 요즘엔 내가 사춘기 때 한창 유명하던 가수들이 하는 공연 방송을 볼 수 있다. 그때를 생각하니 그 시절 그 많던 고민은 하나도 생각나지 않고 즐거웠던 일만 생각이 난다.
가슴이 몽글몽글 해 지는 마음을 두번이나 느껴보다니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딸. 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