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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선배 May 31. 2020

"이제라도 내 인생 살 겁니다."

참 죄송했다.


한 발에 깁스를 한 채 목발을 짚고 2층 계단을 힘겹게 올라온 어르신을 뵙는 순간 '이게 아닌데' 싶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사무실 서가가 꽉 차서 일부를 비워야 또 채울 수 있어서.. 요즘 핫(?)하다는 당근 마켓에 시험 삼아 화가 시리즈 책 9권을 9,000원 가격에 내놓았다.


사실 더 큰 목적은 그 책에 흥미를 가질 분들이 초등 학부모들일 테니 새로 시작한 [온라인 화상 독서교실] 홍보가 되었으면 하는 속내도 있었다.


'꽃돼지'라는 닉네임을 쓰는 분이 관심을 보이시더니 급기야 사무실로 책을 가지러 오신다고 해서... 어찌 티 안 나게 홍보도 할 수 있을까 머리를 굴리고 있었는데..


뜻밖에도 70대 어르신이 모습을 보이셔서 많이 놀랐다.


게다가 또 한 차례 나의 고정관념 때문에 실수를 범했다.


"혹시 책 판매하시는 분이신가요?"


중고책 수집해서 판매하는 분이 아닐까 싶었다. 그러면 오신 김에 더 사가시라고 할까 싶어서 건넨 말이었다.


어르신께서는


"아닙니다. 제가 볼 겁니다."


그리고는 말씀을 이어갔다.


"한 평생 일만 하다가 이제 은퇴해서 내 삶을 살아보고 싶어서요. 그렇다고 학원 다니고 막 그렇게 배울 형편은 아니어서.. 그냥 책 보면서 공부해서 그림을 그려볼까 싶습니다."


그러면서 지갑에서 1000원짜리 9장을 꺼내서 건네주셨다.


엉겁결에 그 돈을 받으면서..


"미리 말씀을 하셨으면 제가 내려갔을 텐데.. 죄송합니다. 저희 장인어른도 팔순이 넘으셨는데 지금도 일하시면서 취미로 그림을 그리신답니다."


다시 책을 들고 힘겹게 내려 가시는 어르신의 뒷모습을 보며,


장인어른 생각이 났다. 가난한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나지 않았다면 그림의 재능을 달리 꽃 피워볼 수도 있었을 텐데..


어르신 말씀이 귀에 쟁쟁하다.


"이제라도 내 인생 살 겁니다. 한 평생 쌔빠지게 일만 하고 살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 어르신도 우리 장인어른도 그림을 통해 삶의 기쁨을 누리시길 기도로 응원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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