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라도 내 인생 살 겁니다."

by 이선배

참 죄송했다.


한 발에 깁스를 한 채 목발을 짚고 2층 계단을 힘겹게 올라온 어르신을 뵙는 순간 '이게 아닌데' 싶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사무실 서가가 꽉 차서 일부를 비워야 또 채울 수 있어서.. 요즘 핫(?)하다는 당근 마켓에 시험 삼아 화가 시리즈 책 9권을 9,000원 가격에 내놓았다.


사실 더 큰 목적은 그 책에 흥미를 가질 분들이 초등 학부모들일 테니 새로 시작한 [온라인 화상 독서교실] 홍보가 되었으면 하는 속내도 있었다.


'꽃돼지'라는 닉네임을 쓰는 분이 관심을 보이시더니 급기야 사무실로 책을 가지러 오신다고 해서... 어찌 티 안 나게 홍보도 할 수 있을까 머리를 굴리고 있었는데..


뜻밖에도 70대 어르신이 모습을 보이셔서 많이 놀랐다.


게다가 또 한 차례 나의 고정관념 때문에 실수를 범했다.


"혹시 책 판매하시는 분이신가요?"


중고책 수집해서 판매하는 분이 아닐까 싶었다. 그러면 오신 김에 더 사가시라고 할까 싶어서 건넨 말이었다.


어르신께서는


"아닙니다. 제가 볼 겁니다."


그리고는 말씀을 이어갔다.


"한 평생 일만 하다가 이제 은퇴해서 내 삶을 살아보고 싶어서요. 그렇다고 학원 다니고 막 그렇게 배울 형편은 아니어서.. 그냥 책 보면서 공부해서 그림을 그려볼까 싶습니다."


그러면서 지갑에서 1000원짜리 9장을 꺼내서 건네주셨다.


엉겁결에 그 돈을 받으면서..


"미리 말씀을 하셨으면 제가 내려갔을 텐데.. 죄송합니다. 저희 장인어른도 팔순이 넘으셨는데 지금도 일하시면서 취미로 그림을 그리신답니다."


다시 책을 들고 힘겹게 내려 가시는 어르신의 뒷모습을 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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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인어른 생각이 났다. 가난한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나지 않았다면 그림의 재능을 달리 꽃 피워볼 수도 있었을 텐데..


어르신 말씀이 귀에 쟁쟁하다.


"이제라도 내 인생 살 겁니다. 한 평생 쌔빠지게 일만 하고 살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 어르신도 우리 장인어른도 그림을 통해 삶의 기쁨을 누리시길 기도로 응원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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