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어에는 commuovere 라는 단어가 있다. 누군가의 이야기가 내 마음 깊은 곳을 건드리는 것이라는 의미다. 단어를 보고 곰곰이 생각했다. 누가 내 마음 가장 깊은 곳을 건드렸을까. 지금 이렇게 생겨먹은 나를 설명할 때, 절대 빼놓을 수 없는 그 누구. 내게는 광주 사람들이다. 나는 2019년 봄에 1980년의 광주 사람들을 처음 만났다. 나는 그들을 만나면서 비로소 우리의 현대사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나는 광주 사람들 덕에 87년 대학생들을 만났고 그 대학생들 덕에 노무현 대통령을 만났다.
5.18 민주화운동을 다룬 영화 <택시 운전사>에서 택시기사 만섭은 광주를 목격한 후 서울로 올라가다 한 식당에서 주먹밥을 먹는다. 그는 주먹밥을 먹다 광주에서 한 시민에게 받은 주먹밥을 떠올린다. 만섭은 결국 갈림길에서 눈물을 흘리며 다시 광주로 차를 돌린다. 소시민으로 살아왔던 만섭이 방관자에 불과했던 이전의 모습을 버리고 참여자로 변모하는 순간이다.
촛불이 광화문 광장을 가득 채웠던 8년 전 그 겨울, 나는 외고 입시에 잠식되어 광화문에 선 사람들을 외면했다. 그리고 3년 뒤 나는 광주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어버렸다. 그들의 이야기를 읽으며 깊이 울었다. 나는 이제 이전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없다. 그들이 시대 속에서 겪은 슬픔, 아픔, 고립 그리고 상실. 나는 끝내 이해할 수 없으리라.
<5.18_정태춘>
5.18! 한 시대를 깨우고 나를 깨웠다. 불의와 야만과 폭압과 학살. 분노와 저항과 헌신. 모든 것을 바꿔 놓았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용감한 시민들 공원 묘역에 차갑게 누워있고 학살자들 아무도 사죄하지 않았다. 지금 감옥안에는 아무도 없다. 당대의 불의를 올바르게 청산하지 못하는 또다른 불의의 시대에 학살자들 고개 똑바로 쳐들고 말한다. 왜.. 우린 아무 잘못이 없다. 폭도의 후예들아.
새 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자.
어디에도 붉은 꽃을 심지 마라
거리에도 산비탈에도 너희 집 마당가에도
살아남은 자들의 가슴엔 아직도
칸나보다 봉숭아보다 더욱 붉은 저 꽃들
어디에도 붉은 꽃을 심지 마라.
그 꽃들 베어진 날에 아 빛나던 별들
송정리 기지촌 너머 스러지던 햇살에
떠오르는 헬리콥터 날개 노을도 찢고, 붉게
무엇을 보았니 아들아
나는 깃발 없는 진압군을 보았소
무엇을 들었니 딸들아
나는 탱크들의 행진 소리를 들었소.
아, 우리들의 오월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그날 장군들의 금빛 훈장은 하나도 회수되지 않았네
어디에도 붉은 꽃을 심지 마라
소년들의 무덤 앞에 그 훈장을 묻기 전까지
무엇을 보았니 아들아
나는 옥상 위의 저격수들을 보았소
무엇을 들었니 딸들아
나는 난사하는 기관총 소릴 들었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