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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람 Feb 19. 2024

또 가우디를 만나다

- 걷기 22일 차 -

가끔 하루의 시작이 경이로울 때가 있다. 오늘 역시 국내에선 보기 드문 일출을 만났다. 그러나 곧 일몰처럼 몰려온 비구름에 아쉽게도 황홀경이 금세 덮여버렸다.

계속 흐렸다. 커다란 태극기로 배낭을 감싸고 걷는 우리나라 젊은이를 만나기 전까지는 내 기분도 날씨를 따라다녔다.    

  

순례길에서 만나는 대한민국 젊은이들은 우리나라의 미래이다. 무한한 가능성을 보는 것 같아 반갑고 기분이 좋아진다. 그러나 배낭의 크기를 보면 대견하지만 한편으론 안쓰럽기도 하다.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자신의 생각을 펼치라고 엄마 마음으로 바람 한 자락을 길 위에 깔아놓았다.    

   

‘아스토르가’를 가기 위한 경유 마을 ‘오스삐탈 데 오르비고’에 닿았다. 이곳에는 로마시대에 처음 축조된 후 여러 시대를 걸쳐 증보수 공사를 한 아름다운 돌다리가 오르비고강 위에 놓여있다. 19개의 아치로 구성된 이 다리는 까미노 프랑스길에서 가장 긴 석조교인 ‘명예로운 걸음의 다리(Puente Paso Honroso)’이다. 중세 레온 출신의 기사 ‘돈 수에로’가 사랑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결투를 치렀다는 사랑 이야기가 전해지는 바로 그 다리이다.    

   

돈 수에로는 연인과 사랑의 표시로 매주 목요일마다 목에 칼을 차고 다니기로 약속을 한다. 만약 그가 약속을 어긴다면 300개의 창을 부러뜨리거나 오르비고강 다리 위에서 한 달 동안 결투를 하기로 했다.

돈 수에로는 이 약속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으나 서서히 지쳐갔다. 하는 수없이 왕께 싸움을 허락해 달라고 요청했고, 유럽의 기사들에게 자신이 목의 칼을 벗을 수 있게 도와달라는 요청도 했다. 이에 많은 기사들이 그와 결투를 하게 된다.   

   

성 야곱의 축일을 제외하고 한 달간 싸움이 이어졌다. 수많은 창이 부러지고 부상자도 생겼다. 한 명은 끝내 사망까지 했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거친 후 마침내 돈 수에로는 목의 칼을 벗게 된다.

그 이후 돈 수에로는 자유의 상징이 된 목 칼에 은도금을 하고 야곱에게 바치기 위해 산티아고로 순례를 떠났다. 풍문에는 현재도 산티아고 대성당에 돈 수에로가 바친 목 칼이 보존되어 있다 하고, 지금도 매년 6월이 되면 첫 주말에 돈 수에로가 벌인 결투를 기리는 축제가 열린다고 한다.        


매력적인 풍경의 ‘아스토르가’는 다양한 예술과 문화유산과 건축물이 남아 있는 도시이다. 에스파냐 광장에 위치한 바로크 양식의 시청 꼭대기 시계탑은 매시 정각마다 여자와 남자 조형물이 시간을 알리는 종을 쳐서 이채롭다. 전해지는 얘기로는 시계를 만든 장인이 아스토르가 사람들의 인색함이 싫어서 정시에만 종을 쳐 알려주도록 만들었다고 한다.      


시청 광장을 가로지르면 산타 마리아 대성당이 나오고 그 오른쪽에는 아스토르가 주교관이 있다. 대성당과 가우디가 설계한 주교관은 볼거리가 풍부하다.

산타 마리아 대성당은 이곳에서 가장 중요한 건축물로 파사드(fasade)와 내부의 석조 기둥이 인상적이다. 건축을 아는 사람이라면 공부할 재료의 풍부함에 얼마나 가슴이 뛰었을까 하는 생각이 스친다.

파사드의 정교함과 아름다움은 놓칠 수 없는 볼거리이다.


주교관은 가우디가 설계한 현대식 건축물이다. 유럽의 성 같은 외관과 뾰족한 첨탑이 기대감을 갖게 한다. 그러나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 아스토르가 교구 측과 갈등을 계속하던 가우디가 열정만으로 공사를 계속할 수 없다고 판단한 후, 도면을 불태우고 공사를 포기한 것이다. 그 때문인지 2층까지는 가우디의 작품이고, 3층은 현지 건축가 리카르도(Ricardo)의 작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건축물의 모순은 여전히 가우디의 작품으로만 홍보하고 있다는 것이다.

원래 주교의 거처로 건축되었으나 현재는 까미노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구경하는 재미에 빠져 빗속에 너무 많이 걸었나 보다. 쇳덩어리가 매달린 것처럼 다리가 무겁기도 매운 듯 아프기도 하다. 어르고 달래며 함께 다녀야 하건만 볼거리가 많으면 이것을 잊고 무리를 한다.     


‘꼬시도 마라까또’는 아스토르가의 향토음식이다. 일반적인 서양 식문화는 수프를 먹은 후 고기를 먹지만, 꼬시도 마라까또를 주문하면 고기가 먼저 나오고 수프는 나중에 나온다. 그 까닭이 나름 설득력이 있다. 식사 중에 적군이 나타나면 뛰어나가 전투를 벌여야 하는데 수프를 먹다 나가면 힘을 못 쓰기 때문에 고기부터 먹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음식을 먹기 위해 라푼젤 언니와 맛 집이라고 알려진 곳을 찾아가니 현지인으로 꽉 차 있다. 빈자리를 찾다가 전 부장과 김 대리를 발견했다. 이들과 합류해 즉석에서 ‘까미노 아부지'의 깜짝 생일 파티를 했다.

일면식도 없는 현지인들이라 양해를 구하고 케이크에 촛불을 켜니 레스토랑 안에 있던 사람 모두가 한 마음으로 축하 노래를 불러주었다.

행복해 보이는 까미노 아부지의 표정에 내 마음이 덩달아 행복해진다.     

  

* 걷기 22일 차 (산 마르틴 델 까미노~아스토르가(Astorga)) 23.5km, 누적거리 521.5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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