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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람 Feb 21. 2024

철 십자가 앞에서 두 손을 모으다

- 걷기 24일 차 -

여전히 흐렸음에도 불구하고 일출은 환희롭다. 가랑비 속에서 사진 몇 컷을 찍고 이동하는데 눈발이 날리더니 갈수록 심해진다. 날씨 변덕이 죽 끓듯 해 눈을 제대로 뜰 수가 없다.

안개인지 구름인지 모를 부윰한 공기 속으로 들어간다. ‘은하철도 999’를 타러 가는 ‘메텔’을 만날 것만 같은 흐릿함이다.      

해발 1,500m에 위치한 이라고산의 철십자가(Cruz de Ferro)를 향해 간다. 봉긋 솟은 돌무더기 위로 5m 남짓한 높이의 떡갈나무 기둥에 꽂힌 철 십자가. 모든 순례자는 이 앞에서 두 손을 모은다.

철 십자가가 서 있는 자리는 선사시대부터 영적인 장소였다고 한다. 은둔 수도자 ‘가우셀모’가 이곳에 십자가를 세운 이후 순례자들은 저마다 자기 나라 혹은 자기 마을에서 돌멩이를 하나씩 갖고 와 놓았단다. 돌을 놓으면서 걱정과 번뇌와 미련도 함께 던지는 것이라 여겼다니 얼마나 경건한 마음이었을까. 지금은 돌을 놓던 것에서 더 다양해졌다. 돌은 물론이고 메모, 사진, 기념품 등 자신의 마음이 담긴 물건에 간절한 마음을 담아 철 십자가 앞에 놓고 고개를 숙인다. 나는 보이지 않는 마음의 돌을 꺼내 눈앞의 돌무더기 공간 한편에 놓고 꺼내놓을 수 없는 마음의 평안을 빌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안개의 자욱함이 신비롭다. 차분한 마음으로 주위를 둘러본다.

사람은 누군가 혹은 어딘가에 의지하고 싶을 때가 있다. 스스로 나아갈 길을 모를 때, 끝없이 방황할 때는 더욱 그렇다. 신의 존재에 경외감을 갖고 경배하고 찬양한다.     


‘만하린(Manjarin)’으로 내려오는 오솔길 옆에서 독특한 분위기의 집을 만났다. ‘만하린 산장’이다. 대문가에는 울긋불긋한 깃발들이 나부끼고, 여러 지역을 안내하는 듯한 나무 표식이 어지럽게 배치되어 있는 낡은 집. 그러나 그 어지러움 속에서 기사단을 나타내는 십자가 표식을 찾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강렬한 붉은색의 그것이 가장 눈에 잘 띄는 가운데에 위치해 있기 때문이다.        


이 집의 주인은 중세 기사 복장을 하고 있으며, 자신을 템플기사단의 마지막 기사라고 한단다. 다른 이들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신통력까지 갖췄다는 그는 어떤 사람일까 궁금하다. 불쑥 만나고 싶다는 욕구가 강하게 일었다. 하지만 나는 다리에 문제가 생긴 도보 여행자 아닌가. 모든 생각을 바로 실행할 수 없는 신체적인 한계를 느끼며  스콧 피츠제럴드가 쓴 『위대한 개츠비』의 오마주로 읽힌다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기사단장 죽이기』를 소환한다.      


삼십 대 중반인 ‘나’는 친구 ‘아마다 마사히코’의 도움으로 그의 아버지이자 저명한 일본화가인 ‘아마다 도모히코’가 살던 산속 아틀리에에서 지낸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천장 위에 숨겨져 있던 ‘도모히코’의 미 발표작 일본화를 발견한다. 작품 제목은 <기사단장 죽이기>이다. 이 그림이 발견된 이후 주위에서 기이한 일들이 잇달아 일어나 주변 상황을 완전히 뒤바꿔 놓는다.  

<기사단장 죽이기>는 에도시대의 작가 ‘우에다 아키나리’가 쓴 괴담 <하루사메 이야기>까지 인용해 더욱 박진감이 넘친다. 현실과 비현실을 넘나드는 책의 스토리에서 기사단장이 곧 우리들의 이데아(idea) 임을 알게 되는데, 그렇다면 혹시 만하린의 마지막 기사는 에고(ego)가 아닐까.     

생각이 비약하기 시작하자 17세기에 활동했던 화가 ‘비에고 벨라스케스’의 그림 <시녀들>도 떠오른다.  

    

햇살 잘 드는 화가의 작업실에서 커다란 캔버스를 앞에 두고 그림 그리던 손을 멈춘 채 숨 고르기 하는 화가. 여기서 화가는 벨라스케스 자신이다.       

화가의 뒤쪽, 작업실 벽에 걸린 거울에는 펠리페 4세와 왕비가 투영되어 있기에 우리는 벨라스케스가 왕과 왕비를 그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작품 속에는 공주가 모델인 왕과 왕비를 보러 와 있기에 수행하는 시녀들과 개까지 등장한다. 그러나 이 그림에서 눈길을 끄는 건 산티아고 기사단 표식의 겉옷을 입은 벨라스케스이다. 계급사회였기에 결코 될 수 없었던 귀족을 꿈꾸며 그림 속에서나마 자신을 기사로 표현한 것은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이때는 벨라스케스가 기사단에 입단하기 전이었으니 말이다.     


산티아고 기사단은 1160년에 이슬람교도에 대항하면서 성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를 향해 가는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 조직된 가톨릭 기사들의 모임이다. 벨라스케스는 노력 끝에 1659년에 산티아고 기사단에 입단했다고 한다.      



경유지인 ‘아세보마을’은 흑요석 지붕과 나무 테라스가 특징인가 보다. 집집마다 아름다운 테라스가 있고 노랗고 빨간 꽃들이 만발해 지나가는 내내 얼굴에 미소가 지어진다.

마을은 고요하다. 그러나 자전거를 타고 산티아고를 향해가다 이곳에서 생을 마감한 독일인 순례자 ‘하인리히 크라우스’를 기리는 ‘자전거 비’를 본 순간 전율이 일었다. 그 길을 나는 다리에 문제가 생긴 상태에서 걷고 있는 것이다.      


로마시대에 조성된 몰리나세카(Molinasec) 다리는 여간 견고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어울리지 않게 메말라버린 메루엘로((Meruelo)강은 약간의 물만으로 초라하게 명성을 유지하고 있다. 빈 강이 건너편의 산 니콜라스 성당과 함께 나를 바라본다.


날씨는 여전히 을씨년스럽다. 이와 대조적으로 경유하는 마을들은 어찌 이리도 예쁠까. 소박한 집 나무 테라스에 앉아 내 좋은 사람과 여유롭게 차 한 잔 마시고 싶다. 행복을 폴폴 날리며 가을 속으로 들어가고 싶다.   

   

* 걷기 24일 차 (바라날 델 까미노~ 몰리나세까(Molinaseca)) 26km / 누적거리 571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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